언제 장만했는지 모르는 책읽기
예전부터 책을 장만할 적에는 ‘오늘 읽을 책’을 가장 눈여겨보는데, 이 다음으로는 ‘모레 읽을 책’을 함께 살펴본다. 아무리 큰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이라 하더라도 머잖아 판이 끊어질 수 있으니, ‘오늘 바로 읽을 책’이라고 여기지 않더라도 ‘앞으로 틀림없이 찾아서 읽고 싶다고 여길 책’이라면 주머니를 털어서 장만했다.
스무 해 남짓 앞서 나온 시집들을 요즈음 하나씩 찾아서 읽으며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 시집들은 스무 해 앞서 어느 새책방에서나 구경할 수 있었다. 이제 이 시집들은 어느 새책방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일쑤이다. 일찌감치 장만해 놓았으니 예전에는 안 읽었어도 오늘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책들을 굳이 장만하지 않았다면 내 눈에 뜨일 일이 없으니 오늘도 앞으로도 읽을 까닭이 없을 수 있다.
스무 해 앞서 이 시집들을 장만할 적에는 ‘오늘 읽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스무 해 남짓 지난 오늘은 ‘오늘 읽는 책’이 된다. 예전에는 ‘오늘’이 아니었고, 오늘은 ‘오늘’이 된다. 다만, 이 책들을 가만히 살피니, 언제 장만했노라 하는 글월을 한 줄조차 안 남기기도 했다. 그냥 장만하기만 하고 아주 잊은 책이라 할 만하다. 언제 장만했는지 모르는 책이라고 할 만하다. 오늘 나는 이 책을 손에 쥐어 읽지만, 열 해인지 스무 해인지 흐르는 동안 ‘오늘 나한테 없던’ 책인 셈이다. 4348.4.3.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삶과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