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사하라 애지시선 3
김수우 지음 / 애지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82



시와 모래밭

― 붉은 사하라

 김수우 글

 애지 펴냄, 2005.9.12.



  바람이 아무리 차갑게 불어도 바닷가 모래밭은 따뜻합니다. 찬바람에 몸을 웅크리기만 하면 춥지만, 모래밭에 두 손을 묻고 모래놀이를 하면 두 손은 따뜻할 뿐 아니라, 어느새 땀이 나기도 합니다.


  꽃샘바람이 불어 풀과 나무가 오들오들 떱니다. 그러나 풀과 나무는 꽃샘바람에 시들거나 얼어서 죽는 일이 없습니다. 한동안 오들오들 떨 뿐, 햇볕이 다시 내리쬐고 바람이 가라앉으면, 언제 오들오들 떨었느냐는 듯이 잎을 한껏 열어젖힙니다. 찬바람을 먹으면서 더욱 기운차고, 흙 품에 안겨서 더욱 싱그러우며, 이웃한 다른 풀과 올망졸망 어깨동무를 하면서 더욱 푸른 빛입니다.



.. 푸른 바다가 붉은 사하라가 될 때까지 / 사막은 얼마나 이빨 시린, 슬픔의 유전인자를 숨기고 있는 걸까 ..  (붉은 사하라)



  모래밭에는 어떤 그림이든 그릴 수 있습니다. 모래밭에 그리는 그림은 바닷물이 밀려들어 모두 지웁니다. 나뭇가지를 써서 아무리 깊게 파면서 그림을 그렸어도, 바닷물은 모든 ‘모래밭 그림’을 말끔히 지웁니다. 모래밭은 바닷물결이 닿은 뒤에는 예전처럼 반반하면서 차분한 빛으로 돌아갑니다.


  모래밭에 그린 그림은 종이에 그린 그림과 달리 오래도록 안 남습니다. 종이에 그린 그림은 퍽 오래도록 남습니다. 그런데, 모래밭에 그린 그림이어도 언제나 우리가 바라보고 우리 손을 거친 그림이기에, 우리 마음에는 고이 남아요. 우리는 모래밭뿐 아니라 마음밭에도 그림을 함께 그려요.


  한편, 종이에 그린 그림은 ‘종이가 된 나무’가 살아낼 수 있을 만한 나날 동안 남습니다. 나무가 종이로 모습을 바뀌었을 뿐이니, 우리는 나무한테 그림을 새긴다고 할 만합니다. 나무한테 새긴 그림을 읽고, 나무한테 새긴 글을 읽습니다.



.. 산골 옛집 부엌문짝 / 버려졌다 그 세월 길어 올린 손끝에서 / 앉은뱅이책상이 되었다 ..  (오래된 것들은 눈이 많다)



  김수우 님이 빚은 시집 《붉은 사하라》(애지,2005)를 읽습니다. 붉은 빛깔은 무엇이고, 사하라는 어떤 곳일까요. 우리 몸을 이루는 핏물이 붉은 빛일까요. 모든 목숨을 살찌우는 열매가 붉은 빛일까요. 아침에 뜨고 저녁에 기우는 해는 붉은 빛일까요. 사랑으로 타오르는 숨결은 붉은 빛일까요. 뜨겁게 솟구치는 기쁨이나 미움 같은 뭇느낌이 붉은 빛일까요.


  모래밭은 어떤 곳일까요. 발이 폭폭 빠지는 모래밭일까요, 발이 안 빠지고 자동차가 구를 수 있을 만한 모래밭일까요. 조개가 살고 새가 날아들 수 있는 모래밭일까요, 관광지로 바뀌어 쓰레기가 나뒹구는 모래밭일까요. 아니면, 군부대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는 쇠가시그물을 길게 박아 놓는 모래밭일까요.



.. 500원 내고 붕어빵 두 마리 산 / 털실모자 할머니, 굼적굼적 / 수레에 쌓인 겨울딸기를 지나, 댓걸음 / 트럭에 실려온 충무 멍게를 지나, 몇 발짝 / 광고게시판을 지나 / 버스정류장으로 간다, 거기 ..  (산맥)



  삶을 사랑으로 짓는 사람은 하루하루 아름다운 꽃밭입니다. 삶을 사랑으로 짓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고단한 모래밭입니다. 삶을 사랑으로 짓다가 이 사랑이 무너지면, 꽃밭은 어느새 풀이 죽습니다. 삶을 사랑이 없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달아 스스로 사랑을 길어올리는 길을 찾으면, 모래밭에도 풀이 돋고 꽃이 핍니다.


  텃밭에서만 꽃이 피지 않습니다. 모래밭에 아무런 목숨이 못 깃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문명과 문화와 경제 따위를 내세워 ‘기름진 밭’이나 ‘아름다운 들과 숲’을 파헤쳐서 고속도로로 바꾼다든지 핵발전소나 화력발전소를 들인다든지 골프장이나 관광단지를 덮어씌우기 일쑤입니다. 짙푸른 숲이 하루아침에 망가집니다. 드넓은 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집니다. 문명이 빚는 건물은 재개발을 끝없이 되풀이하면서 높이 치솟으려고 애씁니다.


  사랑이 없이 짓는 문명은 어디로 갈는지요. 꿈이 없이 나아가려는 문명은 무엇이 될는지요. 삶이 없이 복닥거리는 문명은 누구한테 아름다울는지요. 정치는 정치꾼이 붙잡고, 경제는 경제꾼이 떠들며, 문화와 예술은 문화꾼과 예술꾼이 왁자지껄합니다. 다들 날마다 밥을 먹으면서도, 밥 한 그릇이 나오는 밭자락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다들 언제나 바람을 마시면서도, 바람 한 줄기가 흐르는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습니다. 다들 으레 물을 들이켜면서도, 물 한 방울이 돋는 숲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 삭은 나뭇단 뒤에서 나온 / 두 가마니는 족히 넘을 판피린병 / 아궁이 앞에서 불때던 풀솜할매가 / 찬장에 숨겼다 꺼내 마시곤 / 나무광 뒤로 된시름 던지듯 / 던지고, 던지고, 던지고 했을 거다 ..  (옛집을 허물다)



  시집 《붉은 사하라》를 읽습니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뜨거운 볕이 아닌, 마음에서 샘솟는 따뜻한 숨을 헤아리면서 읽습니다. 풀솜할매는 언제부터 풀솜할매가 되었을까 헤아리면서 시 한 줄을 읽습니다. 풀솜할배도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시 두 줄을 읽습니다.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낳은 할머니입니다. 할머니가 어머니를 낳고, 어머니가 나를 낳으며, 나는 새롭게 아이를 낳아 어머니가 될 테고, 내 아이가 아이를 낳으면 나는 새롭게 할머니가 됩니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왜 외할머니일까요. 우리는 언제부터 ‘親’이나 ‘外’라는 한자를 빌어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나누었을까요. 한자라는 중국글을 쓴 임금과 권력자와 지식인이 아닌 시골사람도 ‘친·외’라는 한자를 빌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바라보았을까요. 조선이나 고려나 고구려나 신라나 백제나 가야나 옛조선이나, 이런 ‘나라이름’이 아닌, 500년대나 기원전 500년대에 시골에서 흙을 지어 살던 사람들도 ‘친·외’라는 한자를 빌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마주했을까요.



.. 다발머리 여자애가 고무줄을 논다 / 날품팔이 면장갑이 뽀얗게 마른다 / 풍경의 틈, / 으로 불어오는 눈짓, 눈짓들 ..  (콩밭에 놀다)



  모래밭에 그린 그림은 꼭 하루를 흐릅니다. 마음밭에 그린 그림은 꼭 내 삶만큼 흐릅니다. 모래알은 어느 만큼 살았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모래알을 손바닥에 얹습니다. 나는 이제껏 어느 만큼 이 땅에서 살았을까 하고 돌아보면서 눈을 감습니다. 나는 내 마음에 새긴 이야기를 어느 만큼 떠올릴 수 있을까요. 나는 내 삶에 그린 그림을 늘 잊고 다시 잊고 또 잊으면서 바보스러운 몸짓을 되풀이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삶에 새긴 그림을 가만히 되새기고 떠올리면서 이제부터 바보스러운 몸짓은 씻어내고 사랑스러운 몸짓과 손짓으로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내 삶을 마음자락에 곱다시 그려서 언제까지나 바라볼 수 있을 때에 사랑이 태어납니다. 내 삶을 마음자락에 그리지 못하거나, 애써 그렸어도 모래밭 그림처럼 곧 사라져서 잊히도록 한다면, 나는 아무런 사랑을 짓지 못합니다. 하루가 저물면서 새로운 하루가 찾아옵니다. 4348.3.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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