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는 메뚜기 난 책읽기가 좋아
아놀드 로벨 글.그림, 엄혜숙 옮김 / 비룡소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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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90



아름다운 이웃을 찾아서 나들이

― 길을 가는 메뚜기

 아놀드 로벨 글·그림

 엄혜숙 옮김

 비룡소 펴냄, 1998.4.15.



  우리 집에 찾아오는 새를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저 새는 어디에서 살며 우리 마을까지 찾아와 뒤꼍 나무에 앉다가 어디로 갈까? 저 새는 하늘을 날며 무엇을 보고, 오늘까지 살며 어느 곳을 날아다녀 보았을까?


  우리 집에는 해마다 사월에 제비가 찾아옵니다. 제비는 사월부터 팔월 끝자락까지 우리 집 처마 밑에서 머뭅니다. 제비는 태평양을 가로질러서 한국으로 왔다가, 다시 태평양을 가로질러 중국으로 갑니다. 해마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나들이를 다닌다고 할 텐데, 아주 조그마한 몸이지만 그야말로 씩씩하게 바다를 가로지릅니다.


  제비 말고도 수없이 많은 새들이 지구별 이쪽에서 저쪽으로 씩씩하게 날아다닙니다. 대단히 먼 길을 아무렇지 않다고 할 만큼 날아다녀요. 사람은 새처럼 하늘을 날지 않는데, 새처럼 날지는 않아도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걷습니다. 무척 멀다 싶은 길도 씩씩하게 걷습니다. 이른바 ‘순례’라고도 하고, ‘여행’이라고도 합니다.



.. 메뚜기는 여행을 떠나고 싶었어요. “길을 찾아 내야지. 그 길이 어디로 뻗어 있든, 난 그 길을 따라 갈 거야.” 하고 메뚜기를 말했어요 ..  (6쪽)



  내처 걷기만 한다면, 사람은 한 시간에 십 킬로미터도 걸을 만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걷자면 둘레를 살피기 어렵습니다. 그저 앞만 보고 걸어야 시간마나 십 킬로미터씩 걸을 테지요. 길을 가다가 다리도 쉬고, 둘레를 돌아보며, 나무그늘에서 나무노래도 듣다가, 길동무와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자면, 한 시간에 오 킬로미터 길도 많이 걷는다고 할 만합니다. 어쩌면 어느 한 자리에 주저앉아 며칠 동안 머물 수 있고, 어느 한 자리에서 몇 달을 지낼 수 있으며, 아예 눌러앉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행길이나 마실길이라고 할 적에는 일부러 ‘빨리’ 다니거나 ‘서둘러’ 다니지 않습니다. 빨리 다니거나 서둘러 다닌다면 여행이나 마실이 아닙니다. 빨리 다니거나 서둘러 다니는 몸짓은 쳇바퀴입니다. 재미없어요. 그예 앞만 쳐다보고 나아가는 길이란, 나 스스로 아무런 이야기를 짓지 못하면서 멍하니 몸을 움직이는 셈이라고 할 만합니다.



.. “이건 규칙이야. 이 호수를 건너려면 반드시 이 나룻배로 건너야 해.” 하고 모기가 말했어요. “하지만 모기 선생님. 저는 쉽게 저 건너편으로 훌쩍 뛰어넘을 수가 있는걸요.” 하고 메뚜기는 말했어요 ..  (35쪽)



  아놀드 로벨 님이 빚은 작은 그림책 《길을 가는 메뚜기》(비룡소,1998)를 읽습니다. 1978년에 처음 나온 책이라 하니 꽤 묵었습니다. 1998년 한국이 아닌 1978년 한국을 헤아린다면, 그무렵에는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마실길 걷기’는 아주 마땅했습니다. 누구나 으레 걸었고, 한두 시간쯤 가볍게 걸었어요. 꽤 무거운 짐을 이거나 지고 여러 시간 걷기 일쑤였습니다.


  요새는 짐을 잔뜩 짊어진 채 여러 시간을 걸어다니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이럴 까닭이 없을 테지요. 택시가 있고 자가용이 있습니다. 버스도 많을 뿐 아니라, 택배가 있어요. 짐을 이거나 지면서 걷는 사람이 아주 드물어요.


  아이를 안거나 업은 채 걷는 사람도 드뭅니다. 아이를 안고 여러 시간 걸어서 다니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이를 차에 안 태우고 걸려서 여러 시간에 걸쳐 마실을 다니는 어른이 있을까요?



.. “날마다 날마다 우리들은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하곤 한단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게 좋아.” 하고 나비 세 마리는 말했어요. “우리는 아침에 일어난단다. 우리는 세 번씩 머리를 긁지.” 하고 첫 번째 나비가 말했어요 ..  (46쪽)



  《길을 가는 메뚜기》에 나오는 메뚜기는 새로운 길을 가려 합니다. 아직 가 보지 못한 길을 가려 합니다. 늘 아는 곳에서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마음이 되어 새로운 꿈을 키우려 합니다.


  메뚜기는 여러 이웃을 만납니다. 메뚜기가 만나는 이웃은 모두 ‘어느 한 자리’에 머물면서 지냅니다. 다른 곳으로 다니려고 하는 이웃을 만나지 못합니다. 무당벌레도 파리도 모기도 나비도 잠자리도, 그저 어느 테두리에서만 맴돌며 지내요. 이러면서 저마다 ‘늘 맴도는 테두리’가 가장 아름다운 보금자리라고 여깁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살아야 즐거울까 생각해 봅니다. 한 자리에 머무는 삶이 즐거울까요? 여러 자리를 떠도는 삶이 즐거울까요? 그야말로 아름답고 사랑스레 가꾼 ‘보금자리숲’이 있다면, 굳이 다른 곳으로 나들이를 다니지 않아도 될 만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보금자리숲이 있어도, 다른 이웃이 저마다 가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보금자리숲을 둘러보러 다니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자리에 머물더라도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레 짓는 삶입니다. 여러 곳을 돌아다닐 적에도 대단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웃을 만나러 움직이는 삶입니다. 내 나름대로 아름다운 삶을 가꾸고, 내 눈길을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북돋우는 길을 걷습니다.



.. 메뚜기는 하늘에 있는 잠자리 두 마리를 보았어요. “메뚜기, 너 참 안됐구나. 우리는 빠르게 날아다니는데 너는 걷기만 하잖아. 참 안된 일이야.” 하고 잠자리들이 말했어요. “뭐가 안된 일이니! 나는 걷는 걸 좋아하는데.” … 메뚜기는 피곤했어요. 폭신폭신한 자리에 누웠지요. 메뚜기는 알았어요. 아침이면 길이 여전히 있고, 길을 따라 가면, 가고 싶은 곳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걸 말이에요 ..  (55, 62쪽)



   아름다운 이웃을 찾아서 나들이를 합니다. 나 스스로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 새로운 곳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사랑스러운 동무를 사귀려고 마실을 합니다. 나 스스로 그대한테 사랑스러운 동무가 되고자 활짝 웃고 노래하면서 발길을 옮깁니다.


  나는 네가 반갑고, 너는 내가 반갑습니다. 나는 너를 새로 만나고, 너는 나를 새로 만납니다. 우리 함께 손을 잡아요. 내가 너한테 찾아왔듯이 너도 나한테 찾아오기를 바라요. 천천히 두 다리로 걷고 또 걸어서, 열흘이나 보름이나 달포나 서너 달에 걸쳐서 천천히 찾아오기를 바라요. 나도 그대한테 열흘이나 보름이나 달포나 서너 달에 걸쳐서 천천히 찾아갈게요. 그리고, 우리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어요. 내가 그대한테 달포에 걸쳐서 천천히 거닐며 찾아갔으니, 우리 달포에 걸쳐서 이야기꽃을 피워요. 그대가 나한테 한 해에 걸쳐서 천천히 거닐어 찾아왔으니, 우리 한 해에 걸쳐서 이야기잔치를 열어요.


  날마다 새롭게 노래를 부르는 마실길입니다. 언제나 새롭게 사랑을 짓는 보금자리입니다. 오늘도 새삼스레 꿈을 꾸는 마실길입니다. 늘 새삼스레 사랑을 길어올리는 보금자리입니다. 4348.3.18.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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