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35 밤낮, ‘밤’과 ‘낮’



  한국말에서는 늘 ‘밤낮’으로 말합니다. ‘낮밤’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아침과 낮과 저녁, 이렇게 하루를 세 가지 때로 가르는 한편, 새벽과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 이렇게 다섯 가지 때로 가르기도 하지만, ‘밤’과 ‘낮’ 이렇게 두 가지 때로 가르기도 합니다.


  왜 ‘낮밤’이라 하지 않고 ‘밤낮’이라 할까요. 왜 낮이 앞에 오지 않고 밤이 앞에 올까요. 왜 밤이 뒤에 서지 않고 낮이 뒤에 설까요.


  밤은 낮을 이끕니다. 낮은 밤에서 태어납니다. 밤에서 낮이 비롯합니다. 낮은 밤을 따라서 찾아옵니다. 모든 씨앗은 밤에서 비롯하여 천천히 자라면서 태어납니다. 온갖 씨앗은 밤에서 깨어나서 씩씩하게 기지개를 켭니다.


  밤은 ‘흙 품’이면서 ‘어머니 품’입니다. 풀씨는 흙 품에 깃들고, 사람씨는 어머니 품에 깃듭니다. 다른 모든 벌레와 짐승과 목숨은 어미 품에 깃듭니다. 어미, 곧 어머니, 그러니까 가시내는 ‘밤’입니다. 밤은 모든 목숨을 품에 고요하게 품고 포근하게 보듬으면서 새로운 길로 우리를 이끌어 새로운 숨결이 되도록 합니다. 이리하여, 밤이 있기에 낮이 있습니다. 밤에서 모든 목숨을 틔워서 낮으로 보내기에, 낮에 눈부신 무지개가 뜨고 노래와 웃음이 퍼져서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아비, 곧 아버지, 그러니까 사내는 ‘낮’입니다. 낮은 어떤 목숨도 품에 안지 않습니다. 낮은 갖은 목숨이 저마다 싱그럽게 뛰놀면서 자라도록 북돋웁니다. 밤은 모두 고요히 품어서 새로운 꿈을 꾸도록 이끌고, 낮은 모두 신나게 뛰놀도록 너른 터를 내주면서 사랑을 짓도록 이끕니다.


  밤에 꿈을 꿉니다. 낮에 사랑을 짓습니다. 밤에 고요히 쉽니다. 낮에 신나게 일하거나 놀이를 누립니다. 이리하여, ‘밤낮’입니다. 밤이 있기에 낮이 있고, 낮이 있어서 밤이 있습니다. 밤이 낮을 부르고, 낮이 밤을 부릅니다. 밤이 낮을 낳기에, 낮은 다시 밤을 낳을 수 있습니다. 둘은 늘 함께 있고, 함께 태어나며, 함께 눈을 뜹니다.


  ‘보이드(void)’란 밤이 낮으로 되는 곳입니다. 밤이 낮으로 되는 곳은 밤과 낮이 함께 있으면서 함께 태어나고 함께 눈을 뜨는 곳입니다. 밤낮이 고요히 흐르면서도 신나게 춤추는 곳입니다. 밤낮이 포근하게 뛰놀면서도 새근새근 잠자는 곳입니다. 곧, ‘보이드’는 “밤낮이 있는 누리”이기에, ‘밤낮누리’입니다. 밤이면서 밤이 아니고, 낮이 아니면서 낮인 누리인 밤낮누리입니다. 밤이 낳는 낮이고, 낮에서 새로 깨어나는 밤인 밤낮누리입니다.


  우리는 빛으로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둠으로도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밝은 낮으로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두운 밤으로도 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은 ‘밤낮누리’입니다.


  예부터 밤과 낮은 따로 ‘밝음’도 ‘어두움’도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밤과 낮은 어두움이나 밝음이 아닙니다. 그저 밤이고 낮입니다. 왜냐하면, 밤은 지구별에 해님이라는 별이 뒤로 숨은 때, 또는 지구라는 별이 해님이라는 별하고 살그마니 등을 돌린 때입니다. 낮은 지구별에 해님이라는 별이 고개를 방긋 내민 때, 또는 지구라는 별이 해님을 마주보려고 살짝 몸을 돌린 때입니다.


  밤에도 낮에도 해는 똑같이 있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해는 똑같이 비춥니다. 그래서 밤이라 하더라도 밝고, 낮이라 하더라도 어둡습니다. “밝은 밤·어두운 밤”이 있으며, “밝은 낮·어두운 낮”이 있습니다. 밤은 ‘어두움’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낮은 ‘밝음’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밤은 ‘어미 품’이요, 낮은 ‘아비 가슴’입니다.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려면 아비 가슴이 아닌 어미 품으로 가야 합니다. 아비는 우리가 신나게 뛰놀면서 사랑을 짓는 마당을 여는 사람입니다. 어미는 우리가 새롭게 꿈을 꾸면서 삶을 일구는 밭을 여는 사람입니다. 4348.2.28.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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