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31 이승에서 저승으로



  우리가 있는 이곳은 ‘이곳’이면서 ‘이승’입니다. ‘이 삶’입니다. 우리가 가는 저곳은 ‘저곳’이면서 ‘저승’입니다. ‘저 삶’입니다. 이 삶을 마치면 저 삶으로 가는데, 알아보기 좋도록 ‘삶’과 ‘죽음’으로 가르곤 합니다. 삶을 마치면 죽음이 되는 셈인데,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다른 삶’입니다. 죽음은 다르면서 ‘새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이승·저승’ 두 가지 말을 씁니다.


  이곳이 있기에 저곳이 있습니다. 이곳이 없다면 저곳은 없습니다. 아주 마땅합니다. ‘이곳’이라고 이 한 자리를 밝혀서 말하기 때문에, ‘이 한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는 ‘저곳’입니다. 그리고, 이 한 자리가 ‘이곳’이 되기에, 이곳은 모든 것이 처음 태어나는 자리요, ‘바탕’이자 ‘뿌리’이고 ‘밑’입니다. 이곳에서 비롯하는 ‘저곳’이니, 저곳은 ‘다른 곳’이면서 ‘새로운 곳’이요 ‘나아가는 곳’입니다.


  왜 우리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갈까요? 왜 우리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갈까요? 왜 우리는 삶에서 죽음으로 갈까요? ‘다른 이야기’를 누리려는 뜻입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지으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곳에 가만히 있으면 저곳이 태어나거나 깨어나거나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그대로 있으면 아무것도 안 태어나고 안 깨어나며 안 생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곳에 얌전히 있으면 ‘우리 목숨’조차 안 태어나고 안 깨어나며 안 생깁니다. 우리가 이곳(이승)에서 비로소 걸음을 처음으로 내딛기에 저곳(저승)이 생기면서 ‘모든 이야기’가 태어나고 깨어나며 생깁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첫발을 내디디니 ‘새 목숨’이 태어나서 ‘내’가 됩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려는 까닭은 오직 하나, ‘이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누리려고 이 땅(이곳, 이승)에 태어납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새롭게 지으려고 이곳(이승, 이 땅)에서 삶을 이룹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기쁘게 나누려고 이승(이 땅, 이곳)에서 사랑을 길어올립니다. 바로 내가 ‘삶’이자 ‘목숨’이고 ‘숨결’이기에 ‘바람’이며 ‘넋’입니다. 바로 나는 삶·목숨·숨결·바람·넋을 한껏 누리면서 숱한 이야기를 지어서 갈무리한 뒤, ‘죽음’이자 ‘빛’이자 ‘어둠’이자 ‘씨앗’으로서 ‘온누리’가 됩니다. 첫걸음을 내딛어서 새걸음으로 나아갈 적에, 이승에서 저승으로 갈 적에, 삶에서 죽음으로 옮길 적에, 바로 나는 죽음·빛·어둠·씨앗·온누리입니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가 나오듯이, 이승에서 저승이 나옵니다. 이러면서 둘은 늘 하나입니다. 이승 따로 저승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이승과 저승은 하나이면서 다른 하나이고 새로운 하나입니다.


  삶이 두렵거나 무섭지 않듯이 죽음이 두렵거나 무섭지 않습니다. 그저 새로운 길이기에 ‘낯설’ 뿐입니다. 낯설기에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나고 깨어나며 생깁니다.


  돌고 돌지 않습니다. 새롭게 이야기를 짓습니다.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새롭게 이야기를 엮습니다. 똑같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새롭게 이야기를 가꿉니다. 4348.2.27.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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