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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좀 안 될까요 3
아소우 미코토 지음 / 시리얼(학산문화사)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472
아기와 사랑에 얽힌 실타래
― 어떻게 좀 안 될까요 3
아소우 미코토 글·그림
최윤정 옮김
시리얼 펴냄, 2011.3.25.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떻게 좀 안 될까요’라고 하는 말은 ‘안 될 만한 일’을 바랄 적에 합니다. 안 되니까 안 된다고 하는 일을 슬그머니 하고 싶은 마음에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더 생각해 보면 ‘안 될 일’이란 없습니다. 그냥 하면 됩니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뉘우치면 되고, 올바르지 않다 싶은 일은 올바르게 되도록 바꾸면 됩니다. ‘법대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삶에 맞게 가다듬거나 추슬러서 새롭게 고치면 되는 일입니다.
- ‘어둡다고 불평하기보다는 스스로 나아가 불을 밝히자.’ (13쪽)
- “아카보시는 입은 거칠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 동정도 하지 않고.” (18쪽)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달립니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뒤로 달릴 수 있어요. 꼭 앞으로만 가라는 법은 없습니다. 나들이를 가다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어요. 집에서도 얼마든지 나들이를 누릴 수 있습니다. 밥과 국을 따로 먹을 수 있고, 밥과 국을 섞어서 먹을 수 있습니다. 꼭 어떻게 해야 하는 법은 없습니다. 즐겁게 누리면서 이루는 삶이면 됩니다.
누워서 피리를 불 수 있습니다. 엎드려서 하모니카를 불 수 있습니다. 한손으로 피아노를 칠 수 있습니다. 발가락으로 기타를 뜯을 수 있습니다. 손으로 붓글씨를 쓰는 사람이 있지만, 발로 붓글씨를 쓰는 사람이 있고, 입으로 붓글씨를 쓰는 사람이 있어요. 저마다 제 몸과 삶에 맞추어서 하나하나 누립니다.
책을 빨리 읽을 수 있고, 노래를 오래도록 부를 수 있습니다. 밥을 여러 그릇 비울 수 있고, 밥술을 조금만 뜰 수 있어요. 틀에 박힌 삶은 없습니다. 틀에 맞추어야 하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할 대목은 언제나 오직 하나예요. 즐겁고 아름다운 사랑이 피어나는 삶인가 하는 대목을 생각하면 됩니다.
- “(개) 콜리가 일어섰다는 이유만으로 노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진다. 요컨대 그만큼 주인에게는 동물을 관리할 책임이 요구되는 겁니다.” (56쪽)
- “쇼지 군, 즐거워 보이는군.” “아,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 자네가 소리내 웃는 게 신선해서 그래.” “그런가요?” (62쪽)
- “나도 모르게 몸이 굳어버린단 말이야. 개를 보거나 소리만 들어도. 아무리 애를 써도 그 공포를 잊을 수가 없어. 게다가 내가 겁먹은 걸 아는지 유난히 개들이 꼬여서,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럼 저희 집 주소를 아셨던 건.” “부근에 개를 키우는 집은 전부 파악해 두고 있거든. 무서우니까.” “저야말로 부끄럽습니다. 개가 너무 좋은 나머지 ‘싫다’는 마음에 ‘무섭다’가 포함되어 있다는 건 상상도 못하고, 정말 죄송합니다.” (83쪽)
아소우 미코토 님이 빚은 만화책 《어떻게 좀 안 될까요》(시리얼,2011) 셋째 권을 읽습니다. 셋째 권을 보면, 아기와 얽힌 이야기가 꾸준히 흐릅니다. 아기를 낳는 사람과 아기를 돌보는 사람 이야기가 가만히 흐릅니다. 아기를 사랑하려는 사람과 아기한테서 등을 돌린 사람 이야기가 찬찬히 흐릅니다.
아기는 왜 태어날까요? 사내와 가시내가 살을 섞었으니 아기가 태어날까요? 서로 사랑으로 만났기에 아기가 태어날까요? 사내와 가시내는 서로 살을 섞을 때에 사랑일까요?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살을 섞지 않고 서로 마주앉아 따스히 바라보기만 해도 기쁘지 않을까요? 살을 섞는 몸짓이 되어야 비로소 사랑이라고 여긴다면, 사랑이란 참말 무엇일까요?
- “정 힘들면 무리하지 말고 병원에 가요. 당신 몸은 지금, 두 사람 몫이니까요.” (96∼97쪽)
- “이건 사카가미 씨에겐 별 거 아닐지 모르겠지만, 만일 재판 결과 인지된다면, ‘인지 재판 확정일’이 기재됩니다. 아이의 호적에.” “엑?” “언젠가 아이가 자신의 호적을 보고, 친부가 자신의 인지를 거부했다는 사실을, 자신이 친부가 원치 않은 아이였다는 걸 알게 되겠죠.” (109∼110쪽)
학교에서는 아이한테 사랑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나라나 사회나 정치도 사람들한테 사랑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사랑을 다루는 일은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허울을 씌운 연속극’은 있어도, 참사랑을 보여주는 연속극은 없다고 할 만합니다.
학교에서는 입시교육만 합니다. 교과서도 대학입시와 얽힌 지식만 다룹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서로 아끼고 돌보면서 이루는 사랑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성교육은 하지만 사랑교육은 하지 않는 학교입니다. 학교와 동네와 사회뿐 아니라, 집에서도 어버이와 아이가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아름다운 하루를 짓는 모습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저마다 사랑을 배우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느끼지 못하니, 이러한 사회에서는 ‘허울뿐인 거짓사랑’만 넘칠는지 모릅니다. 온통 허울뿐인 사회요 학교이며 동네이니,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참모습하고는 동떨어진 삶으로 나아갈는지 모릅니다.
- “교육과 학대의 경계는 대체 어디일까요.” “사랑이요!” (148쪽)
‘교육’과 ‘학대’ 사이를 맺고 끊는 금은 ‘사랑’입니다. 가르침이 되려면 사랑이어야 하고, 배움이 되려면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이는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못합니다. 일과 놀이에서도 똑같아요. 사랑이 있을 때에 일이고 놀이입니다. 사랑이 없이 하는 일과 놀이라면 재미없기도 하지만 힘들고 괴롭습니다. 사랑이 없이 쓰는 글이나 읽는 책이라면, 이 또한 얼마나 고되면서 지겨울까요.
밥 한 그릇을 사랑으로 짓습니다. 빨래 한 점을 사랑으로 합니다. 말 한 마디를 사랑으로 들려줍니다. 눈짓 한 번을 사랑으로 보냅니다. 모두 사랑입니다. 모두 사랑일 때에 비로소 울타리도 허물도 껍데기도 거짓도 없이 즐거운 삶입니다. 4348.3.6.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