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와 어둠 저 너머 시 문학과지성 시인선 91
한택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6월
평점 :
절판


시를 말하는 시 80



시와 한국말

― 폭우와 어둠 저 너머 시

 한택수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1990.6.15.



  어머니는 나를 낳으며 새로운 몸을 나한테 주었습니다. 나는 어머니한테서 몸을 받고는, 이 몸에 걸맞게 새로운 말을 물려받습니다. 어머니는 나한테 새로운 몸을 선물로 주면서, 이 몸을 마음껏 쓰도록 새로운 말을 하나둘 가르쳤습니다. 나는 어머니한테서 받은 몸에 새로운 말을 가득 담아서 내 삶을 새롭게 짓습니다.


  이윽고 나는 몸뚱이가 자라고 자라서 나와 함께 새로운 길을 걸어갈 짝꿍을 만나고, 나와 짝꿍은 새로운 몸을 짓도록 사랑을 이루고, 사랑으로 이루어진 씨앗은 차츰 싹이 트고 자라서, 나도 어느새 새로운 몸을 얻은 새로운 아이한테 새로운 말을 물려줍니다.



.. 이제 나의 삶은 시를 쓸 만한 때가 되었으리라. 나는 이제 삶을 노래할 수 있다! // 삶, 삶이란…… 한낮의 졸음인가, 흐린 구름인가, 서울 거리의 나무들인가, 삶은 ..  (李箱의 庭苑 2)



  말이 흐릅니다. 흐르는 말은 다시 흐릅니다. 자꾸자꾸 흐르는 말은 끝없이 흐르고, 이 말은 어느새 새롭게 흐릅니다. 말 한 마디는 두 마디로 자랍니다. 두 마디로 자란 말은 네 마디로 자랍니다. 네 마디로 자란 말은 여덟 마디로 자라고, 열여섯 마디로, 서른두 마디로 또 자라고 자꾸 자라지요.


  말이 흐르면서 생각이 흐릅니다. 말이 자라면서 마음이 자랍니다. 흐르는 말을 나누면서 생각을 서로 나누고, 자라는 말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새롭게 키울 말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우리는 저마다 어떤 삶을 가꾸려는 마음으로 말을 나눌까요. 우리는 저마다 어떤 사랑을 피우려는 넋으로 말을 지을까요. 우리는 서로서로 어떤 하루를 열려는 마음으로 말을 새롭게 생각할까요. 우리는 서로서로 어떤 꿈을 이루려는 넋으로 말로 이야기를 엮을까요.



.. 어머니, 집을 옮겼어요. 28坪 아파트로 이사했어요. 어머니 계실 때도 이사를 많이 다녔었지요. 그리고 아주 작은 방에서 病을 얻으셨었지요 ..  (무덤 앞에서 4)



  한택수 님 시집 《폭우와 어둠 저 너머 시》(문학과지성사,1990)를 읽습니다.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말로 지은 노래를 읽습니다. 이 노래는 오직 한택수 님이 지을 수 있는 노래이고, 이 노래는 바로 한택수 님이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노래일 뿐 아니라, 한택수 님이 낳은 아이한테 물려주는 노래입니다.


  어머니가 지은 사랑이 말에 깃들어 흐르고, 어머니가 지은 사랑을 받아 태어난 아이가 말에 새로운 사랑을 심으며, 아이는 아이대로 새롭게 자라서 새로운 사랑을 말에 담뿍 담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곳에서 쓰는 말은 아주 기나긴 날에 걸쳐서 수많은 사람이 너른 사랑으로 지은 말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곳에서 쓰면서 앞으로 물려줄 말은 앞으로 이곳을 새롭게 가꾸면서 살아갈 사람한테 기쁘게 물려줄 새로운 사랑입니다.



.. 나는 한국어로 시를 쓴다. 한국어는 내 어머니에게서 전해받은 말이다. 그러므로 한국어는 나를 버릴 수 없다. 나의 시는 나를 버릴 수 없다 ..  (白石의 마을 17)



  별이 돋습니다. 별이 돋는 밤입니다. 별은 낮에도 있지만, 밤에 한결 눈부시게 돋습니다. 해가 뜹니다. 해는 밤에도 있으나, 낮에 한결 환하게 맞이합니다.


  지구별은 늘 돌고 돌기에, 지구 한쪽에서는 낮에만 해를 보고 밤에는 해를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쪽 지구에서 해를 볼 적에 저쪽 지구에서는 고이 잡니다. 저쪽 지구에서 해를 보면 이쪽 지구는 고이 자지요. 서로 낮과 밤을 되풀이합니다. 사람은 삶과 죽음을 잇습니다. 말이 자라고, 생각이 흐르면서, 이야기가 피어납니다. 새로운 삶을 지어서 하루를 열면, 이 하루는 다시금 기쁨과 노래로 자랍니다.



.. 노래는 강처럼 흐르는 것 / 노래는 바다처럼 쓰러지는 것 / 노래는 하늘처럼 무한한 것 / 노래는 땅처럼 익숙한 것 ..  (4行詩, 딸애에게 들려주는 노래)



  한국에서 나고 자라며 삶을 이루는 사람들이 쓰는 말은 모두 한국말입니다. 그러나, 같은 한국말이면서도 다른 한국말입니다. 고장마다 쓰는 말이 다릅니다. 마을마다 쓰는 말이 다릅니다. 사람마다 쓰는 말이 다릅니다. 대학교를 다닌 사람과 시골에서 조용히 사는 사람이 쓰는 말이 다릅니다. 도시와 시골에서 쓰는 말이 다릅니다. 책 많이 읽거나 글깨나 쓰는 사람이 쓰는 말하고 몸으로 일하는 사람이 쓰는 말이 다릅니다. 교수와 교사가 쓰는 말이 다르며, 아기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가 쓰는 말이 다릅니다. 아이와 어른이 쓰는 말이 다르고, 학자와 학자 아닌 사람이 쓰는 말이 다릅니다. 다른 나라에서 여러 해 살던 사람하고 이 나라에서 내처 사는 사람이 쓰는 말이 다릅니다.


  다 다르면서 다 같은 한국말일 텐데, 이 말에 우리는 어떤 숨결을 넣으려 할까요. 다 같으면서 다 다른 한국말일 텐데, 이 말을 우리는 어떤 노래로 부르려 할까요.


  봄에는 봄비가 오고, 겨울에는 겨울비가 옵니다. 바람은 거칠게 불다가 조용히 잠듭니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밝고, 낮이 스러지면서 저녁이 찾아옵니다. 따스한 손길이 되어 따스한 말이 흐르고, 차디찬 마음이 되어 차디찬 말이 퍼집니다.


  내가 부르는 노래는 내 어버이가 부르던 노래일까요? 내가 부르는 노래는 내 아이가 물려받아 부를까요? 시집을 덮고 내 말을 돌아봅니다. 내가 우리 아이들과 시골집에서 늘 쓰는 말에는 어떤 꿈과 사랑이 흐르는지 가만히 되새깁니다. 4348.2.25.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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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2-25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좋네요..ㅎㅎㅎ.

숲노래 2015-02-26 05:52   좋아요 1 | URL
마음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으면
누구나 시를 좋아할 수 있으리라 느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