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 - 양장 합본 개정판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자크 로브.뱅자맹 르그랑 글, 장 마르크 로셰트 그림, 이세진 옮김 / 세미콜론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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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470



쳇바퀴에서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

― 설국열차

 장마르크 로세트 그림

 자크 로브·뱅자맹 르그랑 글

 이세진 옮김

 세미콜론 펴냄, 2013.7.29.



  빗소리 사이사이 멧새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따스한 비가 내리니 멧새도 이 비를 맞으면서 마실을 다닐까요. 가만히 귀를 기울여 멧새가 어떤 마음으로 노래를 들려주는지 헤아립니다. 우리 집 마당과 뒤꼍을 오가는 수많은 멧새는 어떤 날갯짓을 하면서 비를 긋거나 먹이를 찾는지 살펴봅니다.


  설날이 지나갑니다. 남녘 시골자락은 겨우내 얼음이 안 얼기도 했지만, 설날이 지나며 내리는 비는 아주 포근한 봄비로구나 싶습니다. 아직 이월이니까 겨울이라 할 텐데, 이 겨울 끝자락에 내리는 빗줄기는 봄이 바로 코앞에 있다고 알리는 비요, 따스한 기운이 골고루 퍼지면서 씨앗이 깨어나도록 북돋우는 숨결이라고 느낍니다.



- “이봐요, 진실을 외쳐야죠! 당신들을 억압하고 바퀴 달린 수용지에 가둬 놓은 자들에 맞서 당당히 부르짖어야지요!” “?” “일단은 당신의 석방을 촉구하겠어요. 이런 감금은 용납할 수 없어요. 중위를 만나서 해명을 들어야겠어요!” (17쪽)

- “당신은 그곳 생활을 잘 알잖아? 왜 말을 안 해? 그들도 수용지에서 나오고 싶어 하잖아. 왜 그들을 옹호하거나 도우려 하지 않는 거야?” “입 다물어.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55쪽)





  오늘은 다른 날보다 흙이 더 폭신합니다. 아침 낮 저녁으로 뒤꼍으로 가서 우리 집 나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온몸으로 느낍니다. 참말 폭신한 이 뒤꼍을 괭이로 갈 날이 곧 다가오겠다고 느낍니다. 올해에 우리 집 아이들과 즐겁게 뿌릴 씨앗을 생각하면서 설렙니다.


  흙에서 나무가 자라고, 흙에서 풀이 돋습니다. 흙에서 자라는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흙에서 돋는 풀이 꽃을 피워 고운 열매, 이른바 풀알, 다른 이름으로는 곡식을 맺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무열매와 풀열매를 먹습니다. 나무열매와 풀열매를 바로 먹지 않더라도 짐승이나 물고기를 거쳐서 먹습니다. 바다도 그냥 바다만 있어서는 바다가 싱그러울 수 없어요. 비바람을 타고 숲에서 흙이 끊임없이 바다로 흘러들기 때문에 바다에도 새로운 숨결이 피어나서 모든 물고기와 바닷말이 살아서 숨쉴 수 있습니다.



- 칸막이로 나뉘고 꽉 막힌 이 세상에서 부자나 가난뱅이나 객차의 벽만 보고 살기는 마찬가지. (66쪽)

- “꼬리칸에서 죽어 간 사람들은 왜 죽었는지 알아? 배가 고파서? 추워서? 병으로? 아니. 그들은 살해당한 거야!” (81쪽)





  자크 로브·뱅자맹 르그랑 님이 글을 쓰고, 장마르크 로세트 님이 그림을 그린 《설국열차》(세미콜론,2013)를 읽습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 만화책을 읽을 무렵이든, 이 만화책을 바탕으로 찍은 영화가 극장에 걸쳤을 때이든, 나는 만화책이나 영화에 눈길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 만화책은 그리 깊거나 넓게 이야기를 건드리지 못했으리라 어렴풋하게 느꼈거든요. 아직 읽지도 않은 만화책을 어떻게 느꼈느냐고요? 알고 보니, 이 만화책은 예전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세미콜론에서 나온 만화책은 ‘다시 펴낸 책’입니다. 그러니, 나는 현실문화창조에서 처음 펴낸 만화책으로 《설국열차》를 한참 앞서 읽었고, 예전에 이 만화책을 읽으면서 좀 어설프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사회도 정치도 교육도 문화도 예술도 과학도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면서 어수룩하게 건드리다가 어영부영 끝을 맺는구나 하고 느꼈기에, 이런 어설픈 만화책이 다 있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 “왜 그래요? 조금 전부터 통 말이 없군요. 무슨 문제라도?” “왜냐고요? 모르겠소? 우린 여기서 한가롭게 식탁에 앉아 지배인이 가져오는 고급 요리와 포도주 비슷한 혼합 음료를 마시고 있잖소. 감미로운 배경 음악까지 깔고. 젠장, 여긴 도대체 어떤 세상이지? 지금이 언제요? 내가 꿈을 꾸는 거요? 시간을 벗어나 버린 기분이요!” (71쪽)

- “섹스와 강간, 상상할 수 있는 체위와 방식은 모두 다 동원됩니다! 불안과 권태를 이기는 데에는 그게 최고니까. 섹스도 일종의 마약이죠. 대마초나 비프시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73쪽)





  만화책 《설국열차》를 보면, ‘앞칸 사람’이든 ‘뒷칸 사람’이든, 하나같이 ‘살섞기(섹스)’에 빠져듭니다. 앞칸이든 뒷칸이든, 사람들 스스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몸에 따라 움직입니다. 마음에 생각을 짓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몸이 바라는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인류 멸종’을 앞두고 기차에 허둥지둥 오르기만 했을 뿐이요, 삶을 어떻게 짓거나 가꾸어야 하는가를 하나도 헤아리지 않아요.


  설국열차에 오른 사람은 지구별이 모두 꽁꽁 얼어붙었으리라 여깁니다. 그럴밖에 없어요. 이들이 다닐 수 있는 길은 오직 기찻길뿐이거든요. 기찻길 너머로는 어느 누구도 가 보지 못하고, 가 볼 엄두를 못 냅니다. 설국열차에 탄 이들은, 기찻길이 난 도시와 도시 사이를 달리기만 합니다. 스스로 도시를 벗어나서 숲으로 갈 생각을 조금도 안 합니다.



- “톰, 브래디. 헛수고를 했군요. 살아 있는 사람은 없어요. 자동 시스템이에요. 막막하군요.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지요, 퓌그?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진실을 말해야지, 브래디. 진실. 여기까지 와서 노래밖에 못 건졌다고.” (250쪽)



  숲에도 겨울이 있습니다. 그러나, 숲에 겨울이 있어도 숲은 꽁꽁 얼어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땅에서 샘솟는 물은 겨울에도 얼지 않습니다. 아무리 추워도 샘물은 안 업니다. 졸졸졸 골짝물과 시냇물이 흐릅니다. 이 물기운을 받아 숲이 겨울에도 살아서 움직입니다. 이 물기운이 있기에 겨울잠을 안 자는 숲짐승이 겨우살이를 합니다.


  전쟁무기 때문에 ‘인류문명’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설국열차만 남습니다. 그래요, 문명과 물질은 모두 사라졌어요. 그러면, 문명과 물질이 모두 사라졌으니 인류가 끝났을까요? 아니지요. 문명과 물질에 기댄 사람들만 사라졌습니다. 설국열차에 탄 사람들은 저희를 기차 바깥으로 꺼내줄 만한 ‘다른 문명이나 물질’을 바랍니다. 이러다가 모두 굶어죽거나 얼어죽지요.


  스스로 삶을 지으려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문명과 물질을 내다 버리고, 맨몸으로 숲을 짓거나 가꾸면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면서 그저 살섞기에 매달립니다. 이런 사람들이 뭘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죽을 테지요. 그뿐입니다. 만화책도 영화도 그저 그뿐입니다. 삶을 그리지 못하는 사람한테는 꿈이 없고, 삶을 그리지 않는 사람한테는 사랑이 안 보입니다. 4348.2.21.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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