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문화재단에서 두 달에 한 차례 내는 문화잡지 2015년 1~2월호에 싣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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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5. ‘눈결’에 깃든 이야기를 읽는다

― 함께 놀며 지은 말을 물려준다



  시를 쓰던 김남주 님이 있습니다. 1994년에 숨을 거두었는데, 시골에서 흙을 일구면서 살고 싶다는 꿈을 키우다가 몸이 너무 나빠서 쉰 살이 안 되어 죽었습니다. 이녁 동생은 시인이 나고 자란 전남 해남에서 조용히 흙을 일구면서 산다 하고, 《식량 주권 빼앗겨도 좋은가?》(철수와영희,2014)라는 조그마한 책에 이녁 동생 목소리가 전남 해남 고장말로 찬찬히 흐릅니다. 25쪽을 보니 “우리 논 옆으로 조그마한 똘(실개천)이 항시 흘러요.” 같은 말마디가 나옵니다.


  책에서는 묶음표를 치고 ‘실개천’이라 덧붙입니다. ‘실개천’과 같은 뜻이라는 소리일 테지요. 한국말사전을 보면 ‘개천(-川)’은 “개골창 물이 흘러 나가도록 길게 판 내”라 하고, ‘개골창’은 “수챗물이 흐르는 작은 도랑”이라 해요. 그러니, ‘개천’은 “수챗물이 흐르는 도랑이 이어지도록 판 물줄기” 를 가리켜요. 요즈음은 도시가 커지면서 개천이나 개골창을 보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이밖에 다른 물줄기를 구경하기도 퍽 어려워요. 이를테면, 시내와 내와 도랑과 개울과 가람과 개를 보기란 아주 어렵지요.


  ‘시내’는 “조그마한 내”를 가리킵니다. ‘내’는 “‘시내’보다 크지만 ‘가람(강)’보다는 작은 물줄기”를 가리킵니다. ‘가람(강)’은 “넓고 크게 흐르는 물줄기”를 가리키고, ‘개’는 “가람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가리켜요. ‘도랑’은 “매우 작고 좁은 개울”을 가리키고, ‘개울’은 “골짜기나 들에 흐르는 작은 물줄기”를 가리키지요.


  도랑은 시내가 되고, 시내는 내가 되며, 내는 가람이 됩니다. 가람은 개를 거쳐 바다로 갑니다. 물줄기는 흐릅니다. 골골샅샅 다른 물줄기가 흐릅니다. 예부터 물을 아주 알뜰히 여기고 고이 건사했기에 물줄기를 가리키는 이름이 여러 가지입니다. 조그마한 개울은 ‘실개울’이고, 논에는 ‘논도랑’이 있습니다.


  겨울에는 냇물이 꽁꽁 얼어요. 실개울도 개울도 도랑도 얼어붙습니다. 겨울논에 물을 대면 논에는 얼음판이 널찍하게 생깁니다. 추운 고장에서는 겨울볕에도 ‘논얼음판’이 꺼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얼음이 언 곳을 찾아서 발을 지치느라 부산합니다. 신발 바닥에 쇳날을 박지 않아도 얼음을 슬슬 지치면서 즐겁습니다. 솜씨 좋은 언니나 오빠가 있으면 나무를 만져서 썰매를 만듭니다. 썰매에는 한 사람이 탈 수 있고 둘이 탈 수 있습니다. 서로 갈마들면서 놀 수 있습니다.


  도시에는 논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개울도 실개울도 시냇물도 냇물도 없습니다. 사람이 헤엄치기 어려운 ‘가람(강)’이 흐르기는 하지만, 겨울에 이곳에서 얼음을 지치며 놀기에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도시에서도 아이들이 골목 한쪽을 놀이터로 삼아서 비료 푸대를 타든 맨몸으로든 눈놀이를 했어요. 눈을 뭉쳐 눈싸움을 하고, 눈을 굴려 눈사람을 빚으며, 눈길을 타며 눈썰매 놀이를 즐깁니다. 그런데, 이제는 ‘눈놀이’가 아니에요. 요새는 도시에서 따로 시설을 지은 ‘눈썰매장(-場)’이라든지 ‘스노우파크(snowpark)’를 찾아간다고 합니다. 노는 곳이기에 ‘놀이터’이듯 눈썰매를 탄다면 ‘눈썰매터’여야 할 텐데, 이처럼 이름을 짓지 못합니다. 겨울에 눈놀이를 즐기는 곳이라면 ‘눈놀이터’여야 할 테지만, 이렇게 이름을 짓지 않고 ‘스노우파크’가 되어요. 그러고 보면, 도시에 있는 시골에서는 여름에 ‘여름놀이’나 ‘물놀이’라 하지 않고 ‘워터파크(waterpark)’라 해요.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포이에마,2014)라는 책을 읽으니, 33쪽에 “아이들에게는 긴장을 풀고 숨을 쉴 여유가 필요하다. 놀 시간이 필요하다.”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참말 아이들은 놀 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쉴 틈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마음껏 뛰놀 틈이 있어야 하고, 어른들은 마음껏 쉴 틈이 있어야 합니다. 따로 돈을 내고 들어가야 하는 시설에서가 아니라, 집이나 일터나 학교 둘레에서 넉넉히 뛰놀거나 쉴 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을 돌아보면, 마을이나 동네마다 있던 커다란 나무그늘이 여름날 놀이터요 쉼터입니다. 시내와 개울과 도랑도 놀이터이면서 쉼터입니다. 어른은 시내와 개울과 도랑에서 물을 긷거나 빨래를 하면서 일하지만, 일하면서도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고, 아이들은 어버이 곁을 졸랑졸랑 따라다니면서 물놀이를 하고 까르르 웃습니다.


  요즈음에는 어른도 아이도 ‘개울’이라는 낱말이나 ‘눈싸움’이라는 낱말이나 ‘시냇물’이라는 낱말이나 ‘눈사람’이라는 낱말을 입에 굴리기 어렵습니다. 사진이나 영상이나 그림으로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으나, 막상 맨눈으로는 삶자리 둘레에서 못 보거든요.


  우리가 늘 쓰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터에서 늘 마주하고 만나며 부대끼는 말입니다. 책으로만 읽은 말은 머리에 안 남습니다. 살면서 몸으로 겪는 말이 머리에 남습니다. 책에서만 본 꽃은 냄새나 빛깔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들이나 숲이나 밭에서 만나는 꽃을 살그마니 쓰다듬을 적에 꽃내음과 꽃빛을 제대로 압니다. 맨눈으로 보고 맨손으로 만지며 맨몸으로 마주하는 꽃은 오래도록 이름을 떠올려요. 개울을 집 둘레에서 못 보고 사전이나 도감에서만 본다면, 동네에서 골목을 자동차한테 빼앗겨 동무들과 눈싸움을 하지 못하고, 동무들 모두 학원에 다니느라 바빠 어쩌다가 스노우파크에 나들이를 간다면, 겨울과 눈과 썰매와 고드름을 제대로 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얼굴이나 손바닥으로 받으면 차가운 느낌이 상큼할 뿐 아니라, 눈이 녹아서 물방울이 되기 앞서 어여쁜 무늬(결정)를 볼 수 있습니다. 먼먼 옛날부터 내려온 ‘눈결’이나 ‘눈무늬’라 할 텐데, 지난날에도 오늘날에도 앞날에도 이 눈결이나 눈무늬는 이어가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먼 옛날부터 수많은 어버이와 아이가 어우러지면서 지은 낱말입니다. 우리는 옛 어버이와 아이한테서 ‘개울’과 ‘썰매’와 ‘놀이터’라는 낱말을 물려받았는데, 앞으로 어떤 낱말을 뒷사람한테 물려줄 수 있을까요. 4347.12.1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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