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경제신문에 싣는 책이야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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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마당에 심는 나무
우리 집 마당에는 후박나무가 퍽 크게 섭니다. 우리 집 뒤꼍에는 감나무도 퍽 크게 섭니다. 우리 집이 깃든 마을에서 마당에 나무가 우람하게 자라도록 두는 다른 집은 없습니다. 옆마을에도 이런 집은 거의 없고, 다른 마을에서도 마당에 나무를 우람하게 키우는 집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우람하게 자라던 나무가 있어도 베에서 넘깁니다. 나무가 잘 큰다 싶어도 어느 만큼 자라면 목아지를 칩니다.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이렇게 하지만, 학교와 길거리에서도 이렇게 합니다. 이리하여,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어디를 가든 ‘아름드리 나무’를 구경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무가 우람하게 자라기 어려운 한국입니다. 마을뿐 아니라 숲에서도 이와 비슷합니다. 숲에서 조용히 씩씩하게 자라던 나무는 산림청에서 솎아내기를 한다면서 벱니다. 이웃 일본만 하더라도 즈믄 해를 넘게 살아낸 나무를 곳곳에서 만날 만하지만, 한국에서는 즈믄 해를 살아낸 나무를 찾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즈믄 해를 살아낸 절집이 몇 군데에 있다고 하지만, ‘집 한 채가 즈믄 해를 살아내’는 까닭을 제대로 읽거나 헤아려서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집 한 채가 즈믄 해를 살아내려면 ‘즈믄 해를 살아낸 나무’를 베어서 기둥으로 삼고 서까래를 올립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집 한 채가 오백 해를 살아내려면 ‘오백 해를 살아낸 나무’를 베어서 기둥으로 받치고 도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에서 짓는 집은 즈믄 해를 살거나 오백 해를 버티도록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어떤 집도 백 해조차 버티도록 짓지 않습니다. 빨리 지으려 할 뿐이고, 돈이 되도록 올리려 할 뿐입니다.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쓴 글을 갈무리한 《수집 이야기》(산처럼,2008)라는 책을 읽습니다. 이 책은 야나기 무네요시라고 하는 일본사람이 일본에서 마련한 ‘민예관’에 둔 ‘아름다운 일본 보물’을 어떻게 그러모을 수 있었나 하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사람은 ‘민예’라는 낱말을 지었습니다. “백성 예술”이라는 소리요, ‘수수한 사람이 일군 삶이 그대로 예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수집 이야기》에 나오는 ‘민예관 소장품’은 여느 시골마을에 있는 여느 시골집에서 여느 시골사람이 수수하게 쓰던 투박한 살림살이입니다.
“‘아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잘못이다. 물건을 보기 전에 지식을 움직이면,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 방해받게 된다는 사실을 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70쪽).”와 같은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참말 그렇지요. 섣부른 지식을 앞세우면 어떤 것을 보든 ‘섣부른 지식’이 가로막습니다.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도록 가로막아요. 아름다운 것을 보더라도 아름다움이 아닌 겉모습에 얽매입니다. 사랑스러운 것을 보더라도 사랑스러움이 아닌 겉치레에 휘둘립니다.
무화과나무에서 맺는 무화과알을 눈으로 보면서 먹으면 눈으로 헤아리는 맛이 더 달콤할 수 있지만, 무화과알을 낯설게 여기거나 달갑잖게 바라본다면 이 열매가 얼마나 달콤한지 알 수 없습니다. 굴이나 조개도 이와 같습니다. 고기를 먹을 적에도 이와 같아요. 눈으로 보며 더 맛나게 즐기기도 하지만, 눈으로 보기 때문에 아예 손을 안 대기도 합니다.
한편, 이름난 어느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서 아주 높은 값을 치러야 하는 작품이 있어요. 이와 달리 이름이 안 난 어느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서 아주 싸디싼 값만 내도 되는 작품이 있어요. 두 작품은 무엇이 다를까요.
“직관이 고마운 까닭은 망설임을 동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떤 명성 따위에 의지할 필요가 사라진다(152쪽).”와 같은 이야기를 되읽습니다. 사람을 마주할 적이든 물건을 마주할 적이든 늘 같습니다. 돈이 많거나 이름이 높거나 힘이 센 사람을 마주하기에 이녁을 더 섬기거나 우러러야 하지 않습니다. 돈이 없거나 이름이 낮거나 힘이 여린 사람을 마주하기에 이녁을 업신여기거나 낮보거나 깔보아야 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 같은 사람과 만나는 자리가 대수로울 일은 없습니다. 아이들과 놀거나 아이들한테 동시를 읊어 주거나 아이들한테 밥 한 그릇 차려 주는 일이 안 대수로울 수 없습니다.
어떤 책을 읽으면 내 마음을 살찌울 만할까요? 이름난 작가나 명사가 추천한 책을 읽으면 내 마음을 살찌울 만할까요? 많이 팔린 책을 읽으면 내 마음을 살찌울 만할까요? 신문이나 잡지나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크게 알리는 책을 읽으면 내 마음을 살찌울 만할까요?
어느 책을 읽든 내 마음을 살찌울 수 있습니다. 다만, 나 스스로 내 마음을 살찌우려고 생각하면서 찬찬히 살피고 고른 책을 읽을 때에만 내 마음을 살찌웁니다.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다기라고도 불리는 각발은, 발견됐을 당시만 하더라도 일반 농민 집에서 닭 모이를 담아 두는 그릇이었다고 나카니시 씨한테서 직접 그 사연을 들었다(256쪽).”와 같은 이야기를 날마다 아이들과 나눕니다.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읽어 주지는 않습니다. 그저 아이들과 이러한 마음을 함께 나눕니다. 나뭇가지 하나를 오랫동안 놀잇감으로 삼으면서 함께 놉니다. 하얀 종이에 함께 그림을 그려서 벽에 붙인 뒤 두고두고 즐깁니다. 아이들과 부대끼는 하루를 사진으로 찍어서 함께 바라보며 웃습니다. 노랫말을 아이들과 함께 지어서 우리 삶을 우리 손으로 그리는 이야기를 기쁘게 노래로 부릅니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거짓말을 가르친다면 아이도 거짓말을 하지만, 어버이가 아이한테 참말을 들려주고 보여주면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값비싼’ 수저나 밥그릇을 딱히 좋아하거나 반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내 것’으로 삼을 만하도록 마음에 드는 수저나 밥그릇이면 다 좋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사랑으로 차려서 주는 밥이면 다 맛납니다. 비싼 과자나 초콜릿이라고 해서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아요. 빙그레 웃으면서 함께 먹는 과자나 초콜릿이면 다 좋아합니다.
마당에 심는 나무는 대단해야 하지 않습니다. 몇 천만 원짜리 나무를 심거나 몇 억 원짜리 나무를 심어야 하지 않습니다. 씨앗 한 톨을 심어서 싹을 틔우고 찬찬히 가꾸어도 됩니다. 어린나무 한 그루를 삼천 원에 장만해서 심어도 됩니다. 나무 한 그루를 심어서 서른 해를 지켜보고 쉰 해를 사랑하면 됩니다. 일흔 해를 지켜보고 백 해를 아끼다가 아이들한테 나무를 물려주면 됩니다. 아이들은 또 이녁 아이한테 나무를 물려줄 테지요. 수수한 삶이 가장 빛나는 삶입니다. 4348.1.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