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량한 말 바로잡기
(1653) 가정
난 계속해서 온갖 가정을 해 봤다
《루이제 린저/유혜자 옮김-분수의 비밀》(책과콩나무,2010) 84쪽
온갖 가정을 해 봤다
→ 온갖 생각을 해 봤다
→ 온갖 어림을 해 봤다
→ 여러모로 헤아려 봤다
→ 곰곰이 짚어 봤다
→ 하나하나 따져 봤다
…
한국말사전을 보면, “물품, 비용, 인원 따위를 정한 수 이상으로 더 늘림”을 뜻한다는 ‘가정(加定)’이나, “‘피리’를 달리 이르는 말”이라는 중국말 ‘가정(柯亭)’이나, “가혹한 정치”를 뜻한다는 ‘가정(苛政)’이나, “예전에, 집에서 부리던 남자 일꾼”을 뜻한다는 ‘가정(家丁)’ 같은 낱말이 나옵니다. 이런 한자말은 한국사람이 쓸 일이 없습니다. 마땅히 한국말사전에서 털어야 합니다.
“중국 명나라 세종 때의 연호”라는 ‘가정(嘉靖)’이나, “‘이곡’의 호”라는 ‘가정(稼亭)’이나, “가마꾼”을 가리킨다는 ‘가정(駕丁)’도 한국말사전에서 털어야 합니다. 한국말사전은 한국말을 다루는 사전이기 때문입니다.
“집안을 다스리는 일”이라는 ‘가정(家政)’과 “한 가족이 생활하는 집”이라는 ‘가정(家庭)’은 이럭저럭 쓸 만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집안을 다스리는 일은 ‘다스리다’라 하면 되기에 ‘家政하다’처럼 쓸 일은 없습니다. 집안을 다스리는 일을 놓고 ‘살림’이라는 한국말이 있으니 “살림을 꾸리다”라 하면 되기도 합니다.
독일인 가정에 초대받았다 → 독일인 집에 초대받았다
어느 시골의 가정에 태어나 → 어느 시골 집에 태어나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루다 → 혼인하여 한 집안을 이루다
가정에서는 가정대로 화목해야 합니다 → 집에서는 집대로 포근해야 합니다
‘家庭’이라는 한자말을 쓰자면 쓸 수 있지만, 한국사람은 예부터 ‘집’이나 ‘집안’이라는 낱말을 썼습니다. 때와 곳을 알맞게 살펴서 쓰면 됩니다.
이와 함께 ‘가정(假定)’이라는 한자말이 더 있습니다. 이 한자말은 “사실이 아니거나 또는 사실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임시로 인정함”을 뜻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뜻을 가리키는 한자말로 ‘어림’이 있어요.
그의 의식 속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 그 사람 마음에는 만약이라는 생각이 늘 있다
→ 그 사람은 늘 만약을 생각한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대책을 세우자
→ 최악을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자
→ 가장 나쁜 길을 헤아려 대책을 세우자
그를 범인으로 가정한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 그를 범인으로 보면 일은 더 어지럽다
→ 그를 범인으로 여기면 일은 더 어렵다
하늘에 태양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지구는 어떤 모습일까
→ 하늘에 해가 없다고 어림한다면 지구는 어떤 모습일까
→ 하늘에 해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지구는 어떤 모습일까
‘어림’이라는 낱말과 ‘생각’이라는 낱말을 넣으면 됩니다. 흐름과 자리에 따라 ‘보다’와 ‘여기다’와 ‘헤아리다’와 ‘살피다’를 넣을 수 있습니다.
한국말사전에서 살펴본 열 가지 한자말 ‘가정’ 가운데 어느 낱말을 쓸 만한지 궁금합니다. 이 한자말도 쓰고 저 한자말도 쓰겠다고 하면 써야 할 테지만, 한국말을 젖히고 이런 한자말을 굳이 한국말사전에 실어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4347.12.2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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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꾸준히 온갖 생각을 해 봤다
난 자꾸자꾸 곰곰이 짚어 봤다
‘계속(繼續)해서’는 ‘꾸준히’나 ‘자꾸자꾸’나 ‘잇달아’로 손질합니다.
가정(假定) : 사실이 아니거나 또는 사실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임시로 인정함
- 그의 의식 속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대책을 세우자 /
그를 범인으로 가정한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
하늘에 태양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지구는 어떤 모습일까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