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커니 실천시선(실천문학의 시집) 182
박형권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88



겨울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

― 우두커니

 박형권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09.9.30.



  겨울바람을 듬뿍 쐬면서 자전거를 타면 얼굴이 까슬합니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맞바람을 안고 자전거를 오래 달리면 등허리가 결립니다.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마실을 다녀오고 나서 여러 시간 끙끙 앓습니다. 자리에 누워 등허리를 폅니다. 내가 자전거를 몰지 않고 자동차를 몬다면 등허리가 결릴 일이란 없을까요. 내가 자전거로 아이들을 이끌고 다니지 않고 자동차에 태우고 다닌다면 얼굴이 까슬할 일은 없을까요.



.. 겨울 상추 좀 먹어야겠다고 지푸라기를 덮어둔 산 아래 밭에 / 상추 어루만지러 어머니 가시고 / 빵 딸기우유 사서 뒤따라 어머니 밟으신 길 어루만지며 가는데 / 농부 하나 밭둑에 우두커니 서 있다 ..  (우두커니)



  자전거 타기가 고단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혼자 자전거를 타더라도 고단합니다. 자전거 타기가 즐겁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이를 둘이나 셋을 태우고 이끌더라도 즐겁습니다. 자전거 타기가 아슬아슬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곁에서 지켜 주는 사람이 여럿 있어도 아슬아슬하다고 느낍니다. 자전거 타기가 홀가분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혼자 아무리 먼 길을 돌아다녀도 걱정이나 근심이 없습니다.


  주머니에 돈이 많아야 넉넉하지 않습니다. 주머니에 만 원이 있건 백만 원이 있건 천만 원이 있건 천억 원이 있건, 마음이 안 넉넉할 때에 삶이 안 넉넉합니다. 주머니에 푼돈조차 없더라도 마음이 넉넉할 때에 삶이 넉넉합니다.



.. 그 밭에 가보아라 / 네가 먹고 무심코 버린 복숭아씨 / 산복숭아 되어 아비의 그늘을 만들어준다 ..  (산복숭아)



  자전거를 타는 내 마음이 고단하기에 겨울바람을 핑계로 삼아 얼굴이 까슬합니다. 자전거를 타는 내 삶이 고달프기에 겨울 맞바람을 핑계로 삼아 등허리가 결립니다. 왜냐하면, 나는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 마실을 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거든요. 자전거를 몰며 노래를 부를 적에 힘들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즐거우면서 홀가분합니다. 자전거를 몰면서 노래를 부르기에 숨이 가쁘지 않습니다. 숨이 안 가쁘지도 않습니다. 자전거를 몰면서 얼마든지 노래를 부를 만할 뿐입니다.


  언제나 내 생각이 내 하루를 짓습니다. 내가 생각하려는 대로 내 하루가 새롭게 태어납니다. 기쁨이나 슬픔 같은 느낌은 모두 내가 지어서 내 앞에 나타납니다. 웃음과 눈물 같은 몸짓은 모두 내가 지어서 내 앞에 드러납니다.


  겨울이니까 찬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겨울에도 곧잘 포근한 바람이 붑니다. 왜 겨울에도 찬바람과 더운바람이 갈마들까요. 그리고, 여름에도 왜 시원한 바람과 무더운 바람이 갈마들까요. 우리는 저마다 어떤 마음이 되어 하루를 짓고, 어떤 생각을 펼쳐 삶을 가꿀까요.



.. 고구마꽃은 어쩌다 한번 피는 거라서 평생 가도 못 보는 사람도 있다고 힘주어 말하는데 / 주식 자랑 새 차 자랑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고구마꽃 자랑을 쓱 까뭉개버렸다 / 돌아오면서 생각해보니 / 밭이 피우고 비가 피우고 바람이 피운 고구마꽃을 / 내가 피운 것처럼 말한 것이 부끄러웠다 ..  (고구마꽃)



  박형권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우두커니》(실천문학사,2009)를 읽습니다. 박형권 님은 ‘우두커니’ 선 흙지기를 보았다고 합니다. 흙지기는 참말 우두커니 섰을까요. 박형권 님 마음이 우두커니이지 않았을까요. 흙지기는 딱히 다른 생각이 없었으나, 박형권 님 혼자 저이는 우두커니 있네 하고 여긴 셈 아닐까요.


  우두커니 선들, 물끄러미 선들, 하염없이 선들, 부질없이 선들, 홀가분히 선들, 차분하게 선들, 고요하게 선들, 호젓하게 선들, 한갓지게 선들, 가붓하게 선들,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랑스레 서거나 믿음직히 서거나 노래하며 선대서 딱히 대수롭지 않습니다. 그저 서는 모습이고, 그저 사는 모습입니다.



.. 별빛 초롱한 밤, 잠 안 오는 밤 / 허파가 헛헛한 것이 암만 생각해도 담배 생각이다 / 가게에 갔더니 / 공터에서 집 짓던 인부들 노가리 뜯어놓고 맑은 소주 마신다 ..  (봄밤)



  내 아버지가 대통령일 때에 내 삶이 즐거우리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내 아버지가 대통령이기는 한데,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이였어도 내 삶은 즐거울 만한지 궁금합니다. 내 아버지가 시골 흙지기일 때에 내 삶이 고단하리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나무를 심고 풀을 아끼며 꽃을 사랑하면서 흙을 가꾸는 어버이가 나를 낳았으면, 나는 여러모로 일을 고단하게 하더라도 언제나 따사로운 사랑을 듬뿍 물려받거나 배울 만합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한테는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삶을 가꾸면서 걸어갈 뿐입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녁 스스로 가꾸거나 일구는 길을 나한테 보여줍니다. 아버지가 걷는 길과 어머니가 사는 길을 곰곰이 바라보면서 모든 내 길을 모두 내 손으로 짓습니다. 아버지가 저렇게 했기에 내가 저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이렇게 했으니 내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일구는 삶을 바라보면서 나는 나대로 내 삶을 일굽니다.



..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아비가 되어 서울 중랑천 옆으로 이사 온 뒤에 나와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아들을 데리고 중랑천 둑길을 걸었다 기분이 좋아 나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때 오목눈이 떼가 우리를 지나갔다 머리에 앉아서 이마를 톡톡 쪼아보고 진주 같은 똥도 떨어뜨렸다 내 어깨에 삭정이를 물고 와서 집을 지으려는 놈도 있었다 ..  (새들이 나를 나무로 볼 때)



  밤바람이 차갑습니다.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면서 오줌그릇을 비웁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나이를 더 먹으면 이제 오줌그릇을 아버지가 비울 일은 없으리라 느낍니다. 아이들이 아직 나이가 적으니 오줌그릇을 비워야 합니다. 아이들이 아직 나이가 어리니 밥을 차려서 주고, 옷을 빨아서 입히며, 몸을 구석구석 씻깁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새롭게 바라보면서 배웁니다. 어버이는 날마다 새롭게 하루를 지으면서 아이를 가르치거나 이끕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새롭게 눈을 떠서 새로운 놀이를 누리려 합니다. 어버이는 언제나 새롭게 생각을 키우고 마음을 가다듬어 새로운 일을 붙잡으려 합니다.



.. 허 참, 먹을 복은 있어서, 머리 쓱쓱 긁으며 / 나를 받치느라 약간 기우뚱해지는 배에 뛰어올라 / 내 밥숟가락 하나 받았다 ..  (배에서 점심을 먹었다)



  시가 태어나는 자리는 삶터입니다. 꼭 이러한 삶터라서 시가 태어나지 않고, 꼭 저러한 삶터이기에 시가 못 태어나지 않습니다. 옳은 시도 그른 시도 없고, 눈부신 시도 구지레한 시도 없습니다. 다만, 바닷물 같은 시라든지 나뭇잎 같은 시는 있습니다. 구름빛 같은 시라든지 꾀꼬리 노래 같은 시는 있습니다.


  박형권 님은 《우두커니》라는 시집을 어떤 숨결이 되도록 엮어서 선보인 셈일까 하고 헤아립니다. 박형권 님이 스스로 짓는 삶은 어떤 빛깔과 무늬가 되어 우리한테 이야기보따리로 건네는 싯말로 태어나는지 찬찬히 돌아봅니다. 겨울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곱씹습니다. 4347.12.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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