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42. 한국말이 흘러온 길
― 싱그러운 말과 책에 담긴 글
시인 신현림 님은 아이들과 함께 읽을 아름답고 즐거운 동시를 살피다가 어느새 스스로 동시를 씁니다. 누구보다 이녁 딸하고 함께 읽으면서 즐길 이야기요 동시이기에, 스스로 써서 나눌 때에 한결 환하며 사랑스러우리라 느낍니다. 《초코파이 자전거》(비룡소 펴냄,2007)라는 동시집을 읽습니다. 맨 처음 실린 〈초코파이 자전거〉를 보면 “초코파이 자전거를 탔더니 / 바람이 야금야금 / 다람쥐가 살금살금 / 까치가 조금조금 / 고양이가 슬금슬금 먹어서”와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봄바람〉을 읽으면 “봄바람에 / 내 머리카락 살랑살랑 / 엄마 치마 하늘하늘 // 봄바람에 / 벚꽃잎 화르르르 // 어느새 / 봄이 활짝 피었네”와 같은 이야기가 흘러요. 〈청소〉를 읽으면 “쓱쓱쓱 빗자루로 쓸고 / 싹싹싹 걸레로 닦고 / 쓱쓱싹싹 청소를 했네 // 어느새 방 안은 / 환한 보름달”과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 동시집에 실은 다른 동시를 읽어도 이처럼 낱말이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지면서 구슬처럼 또르르르 구릅니다. 시나 동시이기에 말구슬이 곱게 구른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말을 처음 배울 아이들과 나눌 사랑을 마음속으로 곱게 그렸기에, 시나 동시에 고운 말이 그득그득 깃들 수 있다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어버이와 둘레 어른한테서 말을 물려받습니다. 어버이와 둘레 어른이 여느 때에 쓰는 말이 곧 아이들이 쓰는 말이 됩니다. 어버이와 둘레 어른이 여느 때에 아름답거나 사랑스레 말을 하며 살면, 아이들이 여느 때에 쓰는 말이 아름답거나 사랑스럽습니다. 어버이와 둘레 어른이 여느 때에 깊이 살피지 않거나 널리 돌아보지 않으면서 거칠거나 뒤틀린 말을 아무렇게나 쓰며 살면, 아이들은 거칠거나 뒤틀린 말에 아무렇게나 젖어듭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거의 모두 학교를 다닙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가장 오래 보냅니다. 학교에서 교사가 들려주는 말을 가장 오래 듣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를 가장 오래 들여다봅니다. 이리하여 요즈음 아이들은 ‘교사 말투’와 ‘교과서 말투’에 젖어들어서 이러한 말투대로 저희 말투를 삼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학교에서 어른(교사)들은 어떤 말을 쓰는가를 헤아려야 합니다. 오늘날 초·중·고등학교에서 쓰는 교과서에는 어떤 말이 실렸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아이들은 이밖에 텔레비전과 인터넷에서 흐르는 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쓰는 말이 거칠거나 뒤틀렸다고 한다면, 아이들 탓이 아니라, 우리 어른들이 이룬 사회와 교육이 거칠거나 뒤틀린 탓입니다. 아이들한테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숨결을 보여주거나 들려주거나 알려주지 못한 탓이지요.
한국말이 흘러온 길을 생각합니다. 한국말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이 쓴 말입니다. 정부에서 내놓은 통계를 보면 2013년까지 도시에서 사는 사람이 92%가 넘는다고 합니다. 통계에 가려진 숫자를 본다면, 그러니까 주민등록은 시골에 두고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는 사람 숫자까지 헤아린다면 도시에서 사는 사람은 99%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시골에서는 고등학교만 마치면 거의 모두 도시 학교로 빠져나가거나 도시에 있는 회사에 일자리를 얻는데, 초·중·고등학교를 아예 도시에 자취방을 얻어 다니는 아이가 무척 많습니다.
1960년에는 시골사람이 60%였어요. 더 예전에는 시골사람이 90%를 넘었어요. 조선이나 고려 같은 예전에는 시골사람이 99%라고 할 수 있어요. 일제강점기나 개화기 무렵까지 이 나라를 이룬 거의 모든 사람은 시골사람이었습니다.
지난날 시골에서는 글을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았고 책을 읽거나 읽히지 않았습니다. 시골사람은 한자나 한문을 안 썼고, 이런 글은 알지 않았습니다. 한자나 한문을 쓴 사람은 일제강점기나 개화기 무렵까지 1%가 될까 말까 했다고 할 만합니다. 조선이나 고려 무렵이라면 한자나 한문을 알던 사람은 훨씬 적었겠지요. 그러니까,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쓴 말은 늘 ‘한국말’이었고, 집권자나 몇몇 지식 있는 사람이 쓴 말만 ‘한자하고 얽힌’ 셈입니다. 이런 모습은 중국이나 일본도 엇비슷합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시골에서 살며 흙을 만진 사람들은 ‘글(한자나 한문)’을 알지 않았고 배우지 않았습니다. 한·중·일 세 나라에서 ‘한자로 이룬 문화’를 사람들이 두루 마주한 지는 아직 백 해가 안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안 되는 집권자와 몇몇 지식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입으로 나누는 말’로 삶과 노래와 이야기와 마을을 지으며 아이를 낳아 돌보고 흙을 일구었습니다.
곰곰이 따지면,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한자 문화권’이 아닙니다. 정치 권력을 누리거나 지식 권력을 누린 몇몇 사람만 쓰던 한자나 한문은 ‘문화권’이 아닌 ‘권력’이었을 뿐입니다.
이 같은 대목을 살핀다면, 오늘날 우리가 즐겁게 쓰면서 아름답게 가꿀 ‘말’이란 무엇인지 또렷하게 깨달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싱그러운 말이란 무엇이고, 책에 담긴 글이란 무엇인지 잘 돌아보아야지 싶습니다.
말이란, 그냥 쓰는 말이 아닙니다. 말이란, 우리 생각을 담아서 이웃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음고리이자 징검돌입니다. 말이란, 집과 밥과 옷을 짓는 삶에서 밑바탕을 이룹니다. 말이란, 언제나 노래가 되고 이야기꽃으로 피어납니다. 먼먼 옛날부터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글(한자)과 책을 모르던 사람들이 스스로 노래를 짓고 모든 삶을 입말로 아이들한테 물려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 곁에서 삶을 노래로 듣고 이야기로 배우면서 ‘몸으로 익히는 삶말’을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게 익혀 새롭게 하루를 지었습니다. 풀이름 하나부터 씨앗을 심어 거두는 모든 얼거리를 몸으로 함께 일하고 놀면서 입말로 배웠어요.
흐르고 흐르는 말입니다. 냇물처럼 흐르는 말입니다. 구름이 모여 비를 뿌리고, 빗물은 숲과 들에 깃들어 골짝물이나 시냇물이나 샘물이 됩니다. 우리는 물을 즐겁게 마시면서 말도 즐겁게 가꾸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냇물이나 샘물이나 빗물이 아닌, 댐에 가둔 수돗물을 마십니다. 숲과 들하고는 동떨어진 도시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지냅니다. 사회가 바뀌었으니 말도 바뀔 만할 텐데, 그러면 한국말은 이제 어디로 어떻게 흘러야 할까 궁금합니다. 아이들한테 노래처럼 들려주는 구슬 같은 동시는, 아이와 함께 어른도 기쁘게 누릴 삶말은, 참으로 어디에 있을까요. 4347.9.2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