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저 Silver Spoon 12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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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429



농업은 숲을 망가뜨린다

― 은수저 12

 아라카와 히로무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4.11.25.



  시골에서 흙을 가꾸는 사람은 흙을 살립니다. 왜냐하면 ‘가꾸기’를 하니까요. 이와 달리 시골에서 농업을 하는 사람은 흙을 죽입니다. 왜냐하면 ‘농업’을 하니까요.


  흙을 가꾸는 사람은 손수 삶을 지어서 일구는 사람입니다. 손수 삶을 지어서 일구니, 흙이 언제나 기름지게 살도록 돌봅니다. 농업을 하는 사람은 땅에서 거둔 곡식과 열매를 도시로 내다 파는 사람입니다. 농업을 하는 사람은 더 많이 거두어서 돈을 더 많이 벌려고 하기에 흙을 괴롭힙니다. 비닐을 묻고 농약을 뿌리며 비료를 퍼붓지요.


  도시라는 곳이 나타나기 앞서 누구나 손수 흙을 가꾸었습니다. 도시라는 곳이 나타나면서 한쪽에서는 흙과 등지는 삶이 되고, 한쪽에서는 끝없이 흙을 파헤쳐서 곡식과 열매를 더 많이 끌어내는 삶이 됩니다.




- “자본도 없이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까 일단은 아버지한테서 돈을 빌려서.” “땅만 해도 일반인이 쉽게 살 수 있는 게 아니고.” “아니, 아주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어. 미카게네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거지.” (7쪽)

- “부모님 얘기 같은 건 신경쓰지 마! 나도 비슷한 처지였지만 일이 힘든 건 익숙해지면 되고! 한 번 쓰러져 보면 자기 한계도 알 수 있고! 게다가, 처음부터 전문가가 어딨어?” (16쪽)



  흙을 가꿀 적에는 풀벌레와 개구리와 지렁이가 흙에 잔뜩 있습니다. 흙에서 곡식과 열매를 잔뜩 뽑아내려고 하면 풀벌레도 개구리도 지렁이도 살지 못합니다. 흙을 가꾸는 사람은 흙에 온갖 숨결이 깃들도록 합니다. 흙에서 곡식과 열매를 잔뜩 뽑아내려는 농업일 적에는 다른 숨결이 흙에 깃드는 일을 바라지 않습니다. 흙이 싱그럽게 살아날 적에는 멧새가 날마다 찾아와서 노래를 합니다. 흙이 죽은 곳에는 새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이런 곳에는 기계 소리만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흙’을 생각하면서 ‘가꾸’려는 길은 새마을운동 때문에 모질게 짓밟혔습니다. 새마을운동은 시골살이를 갈기갈기 찢으면서 시골내기가 도시로 떠나서 공장 일꾼이 되도록 몰아세웠습니다.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야 한 시골내기는 공장에서 값싼 부속품 대접을 받으면서 시달려야 했습니다. 지난날에는 시골에서 어른과 아이가 모두 어우러져서 들일을 하고 숲일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가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시골에 늙은 사람만 남고 농기계만 춤추면서 어떤 노래도 이야기도 깃들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새마을운동은 농약과 비료와 비닐과 농기계로 몰려들면서 논밭에 남새 말고는 어떠한 풀도 돋지 못하도록 다그칩니다. 모든 풀은 나물이나면서 약풀이지만, 모든 풀을 잡풀로 여겨 짓밟거나 태우거나 뽑아야 한다고 여기도록 길들입니다. 지난날에는 누구나 풀을 잘 알고 다룰 줄 알았으나, 이제는 몇몇 ‘전문가’가 다른 돈벌이로 삼으면서 약풀을 잔뜩 기릅니다. 약풀이 약풀일 수 있던 까닭은 흙이 싱그러이 숨쉬면서 온갖 풀이 얼크러지기 때문이지만, 한 가지 남새나 풀만 잔뜩 심으니 이제는 약풀도 약풀다울 수 없습니다.




- “골치라니! 난 쉽게 맛난 돼지고기를 먹고 싶을 뿐인데!” “맛있는 걸 먹고 싶으면 그만한 수고는 해야죠!” “그냥 확 놓아 먹이면 어때?” “방목돼지! 그거 좋은데요!” (35쪽)

- “이상한 문장 없나?” “봐도 돼?” “…….” “같은 말이 지나치게 반복됨.” “글자 수를 조금이라도 늘려 보려고.” “우유에 물을 타서 출하하면?” “죽는 거죠. 네. 다시 쓸게요.” (51쪽)



  아라카와 히로무 님이 빚은 만화책 《은수저》(학산문화사,2014) 열두째 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만화책 《은수저》에 나오는 안경잡이는 시골일이나 들일이나 짐승치기가 무엇인지 하나도 모를 뿐 아니라 하나도 생각하지 않던 아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짧다면 짧을 두세 해 사이에 온몸으로 날마다 흙을 마주하고 짐승을 돌보면서 생각과 마음이 새롭게 깨어납니다. 손수 흙을 가꾸면서 눈을 뜹니다. 손수 풀을 만지면서 생각을 틔웁니다. 손수 짐승을 보살피면서 마음을 함께 보살핍니다.


  아마 시골로 와서 학교를 다니기 앞서까지는 밥 한 그릇을 먹으면서 밥맛이 무엇인지 헤아린 적이 없을 테지요. 이제껏 남이 차려 준 밥만 받으면서 그냥 끼니를 때울 뿐이었을 테지요. 때로는 돈을 내고 가게에서 주전부리를 사먹으면서 노닥거릴 뿐이었을 테지요.


  가게에서 먹을거리를 돈을 주고 사서 집에서 끓이고 볶고 삶고 지져서 먹어도 맛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먹을거리를 모두 손수 길러서 다시금 손수 끓이고 볶고 삶고 지져서 먹으면 어떤 맛을 낼까요. 내 몸을 살리는 가장 즐거운 맛은 무엇이고, 내 마음을 가꾸는 가장 빛나는 맛은 어디에서 샘솟을까요.




- “이걸 주마. 해체해서 마음대로 써라.” “어. 이, 이걸 어떻게 부숴요? 소중한 마구간이잖아요.” “하지만 이제 말도 없고, 그냥 두면 어쩌겠어.” (93쪽)

- “돼지는 땅을 파길 좋아하잖아? 풀뿌리를 다 헤집어 버리기 때문에 넓은 땅을 몇 구역으로 나눠서 순환식으로 방목해야 해.” “정말이네. 잔디가 모두 들떠 있어.” “이 녀석들을 출하하면 이 구역은 한동안 휴식을 시켜 줘야 해. 다음엔 저쪽 언덕에서 방목하겠지.” “이렇게 땅이 넓어도 자연과 공생하긴 어렵군요.” “농업이 원래 그래. 자연에 없는 고밀도로 인간에게 유용한 동식물을 투입하는 사업이잖아. 본질이 자연 파괴지.” (156∼157쪽)



  농업은 숲을 망가뜨립니다. ‘산업’이기 때문에 숲을 망가뜨립니다. 사람한테만 도움이 된다는 일을 하려니, 숲 얼거리나 흐름을 일그러뜨릴밖에 없습니다. 요즈음처럼 거의 모든 사람이 도시에서 살고 도시에서 안 벗어나는 때에는 사람들 스스로 못 깨달을 테지만, 싱그럽게 살아서 숨쉬는 흙은 겨울이 끝나고 봄이 되면 폴폴 김이 납니다. 김이 나는 흙에서 풍기는 내음은 무척 구수합니다. 싱그럽게 살아서 숨쉬는 흙은 얼마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싱그러운 흙은 보송보송합니다. 싱그러운 흙빛은 까무잡잡한 살빛과 같습니다.


  풀은 빈틈이 있는 아스팔트나 시멘트를 뚫고도 돋지만, 딱딱한 땅에서는 돋기 어렵습니다. 딱딱해진 땅에서는 이 땅을 부드럽게 풀어 줄 풀이 먼저 퍼집니다. 이를테면 비름이나 망초가 딱딱한 땅에서 우거집니다. 이러한 풀이 한두 해나 여러 해 나고 죽기를 되풀이하면서 딱딱한 땅이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땅에는 차츰 다른 씨앗이 깃들어 더욱 보드랍게 흙기운을 바꾸어 줍니다. 보드라우면서 기름진 흙이 될 때에 비로소 사람이 먹을 만한 남새를 심어서 거둡니다.




- “난 있지, 어릴 때 저 산을 넘어가면 큰 도시가 있을 줄 알았다? 휘황찬란하고 놀이공원도 있고! 그래서 모아 놓은 용돈을 꼭 쥐고 혼자 꼭대기까지 올라갔던 적이 있어. 당연히 산 너머엔 산밖에 없어서 실망만 하고 집에 돌아와선 엄마한테 호되게 혼났지. 그래서 이번엔 이쪽 산에 올라갔다가, 또 산 너머 산이라서 실망하고, 그 다음엔 또 저쪽 산에.” (122∼123쪽)



  땅바닥이 딱딱하면 자동차가 다니기 좋습니다. 땅바닥이 딱딱한 곳에 건물을 세웁니다. 땅바닥이 딱딱한 곳에서는 풀이나 나무가 자라지 못합니다. 땅바닥이 딱딱한 곳이 늘면 늘수록 도시가 커진다는 뜻이요, 풀과 나무는 하나조차 없이 잿빛이 퍼진다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잿빛 도시에서는 아무것도 살아서 숨쉬지 않습니다. 먹을거리도 마실거리도 없지만, 푸른 바람도 없습니다.


  밥을 안 먹으면 죽는 목숨인 사람일 뿐 아니라, 아주 살짝이라도 바람을 안 마시면 그냥 죽는 사람입니다. 흙이 살아서 온갖 풀과 나무가 흐드러져야 살 수 있는 사람일 뿐 아니라, 온갖 풀과 나무가 푸른 바람을 내뿜어야 바야흐로 목숨을 건사하는 사람입니다.


  돈이 있으면 다른 나라에서 곡식이나 열매를 사들일 만하겠지요. 그러나 푸른 바람은 다른 나라에서 사들이지 못합니다. 국가경쟁력을 내세워 무역과 경제개발을 하면 나라살림이 나아질는지 모르지만, 사람들 살림살이는 나아질 수 없습니다. 한입으로는 ‘국산’이 몸에 좋다고 하면서, 다른 한입으로는 자유무역협정이나 쌀개방 따위만 하는 나라에서는, 어떤 사람도 몸이 튼튼할 수 없습니다.


  돈을 많이 들여서 유기농 곡식이나 열매만 먹으면 될까요? 맑은 물이 아니라 수돗물을 마시고, 맑은 바람이 아닌 매캐한 바람을 마시는데, 밥만 유기농이면 될까요? 만화책 《은수저》는 이러한 실타래를 슬기롭게 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맛난 밥 한 그릇’ 얻는 길을 넌지시 보여줍니다. ‘삶을 스스로 지으려는 푸름이’가 마음으로 품는 꿈을 즐겁게 보여줍니다. 도시에서는 찾지 못한 빛과 삶과 꿈을 시골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차근차근 가꾸는 어여쁜 땀방울을 알뜰히 보여줍니다. 4347.12.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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