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44. 말은 흐르지만 사회는 갇혀서

― ‘한국말’은 어디에서 있는가



  일본사람 사노 요코 님이 쓴 글을 윤성원 님이 한국말로 옮긴 《나의 엄마 시즈코상》(이레,2010)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106쪽에서 “남동생은 상처받은 마음을 동물을 통해 치유하려 했다. 사랑새를 애지중지하며 정성껏 돌보았다.” 같은 글월을 봅니다. 이 글월에서 ‘사랑새’라는 이름을 보고 살짝 놀랍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잉꼬(いんこ)’라는 일본말을 쓸 뿐, ‘사랑새’라는 한국말을 모르기 일쑤입니다. ‘잉꼬’라 말하면서, 이 이름이 일본말인 줄 알아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일본사람이 가리키는 이름 말고 한국말로 예부터 가리키던 이름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한국사람이 예부터 가리키던 한국말을 배우거나 들은 사람은 어느 만큼 될까요?


  그런데, ‘사랑새’라는 이름을 잘 살려서 옮긴 책은 “우리 엄마 시즈코”가 아닌 “나의 엄마 시즈코상”입니다. 일본사람은 일본말로 ‘私の’로 적었을 테지만, 이를 한국말로 제대로 옮기자면 “내 엄마”라 하든 “우리 어머니”라 해야 올바릅니다. 왜냐하면, ‘나의’는 한국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내’와 ‘너·네’가 한국말입니다. ‘나의·너의’는 모두 잘못 쓰는 말입니다. “동물을 통(通)해 치유(治癒)하려 했다”도 한국말이 아닙니다. 겉모양은 한글이지만 알맹이는 일본 말투입니다. 한국말로 제대로 적자면 “동물로 다스리려 했다”나 “짐승을 곁에 두어 달래려 했다”로 고쳐써야 합니다. “애지중지(愛之重之)하며 정성(精誠)껏 돌보았다”는 겹말입니다. ‘애지중지’와 ‘정성껏’은 같은 뜻입니다. 무엇보다 ‘애지중지’이든 ‘정성껏’이든 한국말로 다시 옮기면 ‘살뜰히’나 ‘알뜰히’입니다. 두 가지 말을 함께 쓰고 싶다면, “사랑새를 알뜰살뜰 돌보았다”처럼 한국말로 제대로 적으면 됩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어떻게 배울까요. 학교에서는 한국말을 어떻게 가르칠까요. 집에서는 어버이가 아이한테 말을 어떻게 알려주거나 물려줄까요.


  학교는 ‘배우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학교는 교과서 지식만 배우는 곳이 되기 일쑤입니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으면 배울 수 없기 일쑤입니다. 더욱이, 교과서는 대학입시에 얽매여 대학입시 지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학교를 다니면서 배운다고 한다면 ‘대학입시 지식을 배우’는 셈입니다. 삶을 배우거나 사랑을 배우거나 꿈을 배우지 않습니다. 교과서 지식을 배울 뿐이니,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거나 슬기롭게 배우지 못합니다.


  얼마 앞서 전남 고흥 도화면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글쓰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학교 2학년 푸름이가 쓴 글에 “타인을 배려하라” 같은 말마디가 있어서, 이 말마디를 칠판에 적고 다른 푸름이한테 “타인을 배려하라”가 무슨 뜻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시금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가 무슨 뜻인가 하고 물으니, 아무도 아무 말을 못합니다.


  왜 푸름이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가 무슨 뜻인지 아무 말을 못할까요? 아주 마땅합니다만,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 같은 말은 이 말을 듣는 자리에서 곧바로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다섯 살 어린이도 알아들을 말이요, 학교 문턱을 못 밟은 사람도 모두 알 수 있는 말입니다. 이와 달리 “타인을 배려하라” 같은 말마디는 ‘한국말로 다시 풀어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교장선생님 훈화라든지 지식인이 쓰는 글에 ‘타인’이나 ‘배려’ 같은 말마디가 흔히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곧바로 느끼거나 알 만한 말이 아닌 셈입니다. ‘다른 한국말’로 옮기거나 ‘한국말로 제대로’ 거듭 풀어야 하는 말인 셈입니다.


  한자말은 한자말일 뿐, 한국말이 아닙니다. 영어는 영어일 뿐, 한국말이 아닙니다. 일본말은 일본말일 뿐, 한국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사람은 한국말이 무엇인지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하고 배우지도 못하면서 지냅니다. 이러면서 한자말과 영어와 일본말이 뒤죽박죽 파고듭니다.


  한국사람이면서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얼거리가 퍽 오랫동안 뿌리를 내립니다. 일제강점기가 있었고 해방을 지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거의 백 해 동안 ‘시름시름 앓는 한국말’입니다. 이리하여 이제는 ‘잘못 쓰는 낱말이나 말투’가 아주 많은 사람들 입과 손에 들러붙습니다. 틀림없이 잘못 쓰는 말이지만, ‘잘못인 줄 못 느끼’기도 하고, ‘잘못이라고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매무새가 없’기도 합니다. 잘못 깃든 버릇대로 내처 달립니다. 잘못 물든 버릇을 바로잡아서 슬기롭고 똑똑하며 아름답게 거듭나려는 매무새를 찾아보기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오덕 님은 지난날 《우리 글 바로쓰기》 같은 책을 선보였습니다. 이 책은 ‘이대로만 써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못 쓰는 말이 이렇게 많이 있다’고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러니, 하나하나 찬찬히 짚으면서 우리 스스로 한국말을 제대로 바라보아서 제대로 깨닫고 제대로 다스릴 줄 알아야 ‘말과 넋과 삶이 함께 살아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사람은 이녁 말마디를 하나부터 열까지 하루아침에 모두 뜯어고치거나 바로잡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녁 말마디를 날마다 한 가지씩 가다듬어서 찬찬히 바로잡거나 고칩니다. 어떤 사람은 이녁 말마디를 하나도 안 고치고 하나도 안 다듬습니다.


  말은 흐릅니다. 말은 흐르니 말은 언제나 새롭게 거듭납니다. 고인 말이란 없습니다. 갇힌 말도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 사회는 얼마나 잘 흐르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학교와 사회와 정치와 문화는 부드럽게 잘 흐르는가요?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게 흐르는가요? 말은 사회를 고스란히 담습니다. 한국말이 한국말다움을 잃는다면, 한국 사회가 ‘한국 사회다움’을 잃기 때문입니다. 한국말이 ‘한자말과 영어와 일본말이 어지럽게 뒤섞인 채 시름시름 앓는다’면 한국 사회가 제자리를 못 찾고 이러저리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말은 어디에 있을까요? 4347.1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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