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를 하는 마음



  노는 아이가 예쁘다고 한다면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어야 합니다. 책을 읽는 아이가 예쁘다고 한다면 아이들이 온갖 책을 마음껏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우리 어른은 아이를 어떤 눈길로 바라보는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아이가 예쁘다고 여기는 어른은 어디에 있을까요. 아이가 어느 때에 예쁘다고 여길까요. 아이가 예쁘게 자라도록 이끌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나라에서는 무상보육이나 무상급식과 같은 것을 내세우면서 교육과 복지를 외치지만, 정작 이러한 일은 교육이나 복지가 못 되기 일쑤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책에는 ‘아이가 예쁘게 웃고 뛰놀면서 자라는 터전’을 헤아리는 마음이 안 깃들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에 들기 앞서까지 나라에서 돈을 대준다고는 하지만, 유아원이나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에서는 무엇을 하나요. 이런 곳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하면서 놀 수 있는가요. 어른들이 회사에 오래도록 붙들려야 하기 때문에 억지로 아이들을 밀어놓는 데가 아닐는지요.


  초등학교는 어떤 ‘초등 교육’을 하고, 중·고등학교는 어떤 ‘중등·고등 교육’을 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열두 해에 걸쳐 우리 아이들은 어느 곳에서나 언제나 입시교육에 얽매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고부터 놀이를 빼앗기고 놀이를 잃으며 놀이를 잊습니다.


  학교에 가는 아이들은 놀 틈이 거의 없습니다. 50분 동안 꼼짝없이 좁은 책걸상에 앉아서 교과서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작 10분 쉰다지만 뒷간에 가거나 엉덩이를 쉴 조그마한 틈입니다. 낮밥을 먹을 적에도 놀지 못합니다. 무상급식을 하니 아이들은 스텐밥판을 들고 급식실에 줄을 서야 합니다. 줄을 서서 자리에 앉더라도 이내 다른 아이들이 자리에 앉아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빨리 밥그릇을 비우고 일어서야 합니다. 허울은 ‘무상’이고 ‘급식’이지만, 아이들은 밥을 먹으면서 놀지 못하고, 밥을 먹는 동안 느긋하게 수다를 떨며 놀 수 없습니다.


  도시락을 싸서 학교를 다니던 예전 아이들은 교실에서도 도시락을 풀고, 운동장 한쪽이나 나무그늘이나 풀밭에서도 도시락을 풀었습니다. 적어도 교실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었고, 마음 맞는 동무하고 바깥바람을 쐬거나 나무바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급식실에서 얼른 밥그릇 비우고 일어서야 할 까닭이 없이, 도시락을 삼십 분이고 오십 분이고 느긋하게 비워도 되었습니다.


  놀이는 교과서로 가르치지 못합니다. 놀이는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가르치지 못합니다. 놀이는 텔레비전이나 책이 가르치지 못합니다. 놀이는 오직 너른 터와 넉넉한 겨를과 느긋한 마음이 어우러져야 태어납니다. 강당이나 체육관이 있어야 아이들이 놀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는 교과서나 수업이나 건물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신나게 뛰고 달리고 구르면서 땀을 흘릴 빈터가 있어야 합니다. 학교는 건물을 늘리지 말고 빈터와 나무그늘을 늘려야 합니다. 마을은 시멘트길이나 아스팔트길이나 주차장을 늘리지 말고 풀밭과 숲정이를 늘려야 합니다. 집에는 마당이 있어야 하고, 마당 둘레에는 텃밭과 나무가 어우러져야 합니다.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곳이 어른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이고, 아이와 어른이 함께 살림을 지을 수 있는 곳입니다. 4347.12.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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