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반 레인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29
미하엘 보케뮐 지음, 김병화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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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93



그림에 흐르는 빛과 숨결

― 렘브란트 반 레인

 미하엘 보케뮐 글

 김병화 옮김

 마로니에북스 펴냄, 2006.4.25.



  가랑잎을 떨구는 나무는 겨울눈을 맺습니다. 겨우내 조그마한 눈이 추위를 견디면서 봄을 기다립니다. 겨울눈을 아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보들보들 싱그러운 잎이 단단하게 뭉친 모습이 참 야무지구나 싶습니다. 언제 찬바람이 그치고 언제 따스한 볕이 드리울까 하고 기다리면서 살짝살짝 바깥을 엿보는구나 싶어요.


  아주 조그마한 씨앗을 곳곳에 퍼뜨리는 들풀은 겨울에도 여러 날 포근한 볕이 드리우면 어느새 싹이 틉니다. 다시 찬바람이 불고 꽁꽁 얼어붙어서 그만 어린 싹이 시들어 죽어도, 풀씨는 겨울에도 곧잘 싹을 틔웁니다.


  나는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겨울눈이랑 풀싹을 눈여겨봅니다. 아니, 내 눈에는 겨울눈과 풀싹이 아주 잘 보입니다. 도시에 나들이를 가서 시내버스를 타고 움직이는 길에도 언뜻선뜻 스치는 길나무 겨울눈을 알아채고는 빙그레 웃습니다. 사람들이 손전화를 켜고 수다를 떠느라 시끄러워도, 시내버스 닫힌 창문 바깥에서 흐르는 풀벌레 노랫소리를 알아채면서 방긋방긋 웃습니다.


  내 숨을 살리는 나무와 풀은 내 동무입니다. 내 넋을 깨우는 나무와 풀은 내 이웃입니다.





.. 렘브란트의 작품은 불완전함에서 완전함으로, 대략적인 것에서 정확한 것으로, 밑그림에서 완성작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또 그 반대도 아니다. 상징과 서사, 인물, 공간적 차원, 빛, 심지어 시간적인 사건과 같은 그림 속에 포함된 모든 것이 관찰하는 현실을 향한다. 요컨대, 이해하는 것 자체가 보는 행위로 바뀌는 것이다 ..  (11쪽)



  아침이 밝으면 언제나 마당으로 내려서서 아이들 오줌그릇을 비웁니다. 이러고 나서 우리 집 나무를 하나하나 바라보며 말을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뒤꼍으로 올라가서 뒤꼍 나무한테 말을 겁니다. 나무를 둘러싼 흙을 밟고, 우리 집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을 누리고, 우리 집 나무 우듬지에 앉아 노래하는 멧새를 바라봅니다. 마당과 뒤꼍을 천천히 거닐면서 멧새를 바라보면, 멧새는 우듬지에 앉아서 나를 빤히 쳐다봅니다. 서로 마주보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습니다.


  날마다 나무를 바라보면, 겨울에도 날마다 달라지는 모습을 느낍니다. 날마다 나무를 쳐다보면, 여름에도 잎이 날마다 바뀌는 모습을 느낍니다. 한 해 삼백예순닷새를 놓고 보면, 나무 한 그루는 늘 다른 빛깔이요 모양이며 무늬이고 결입니다. 나무를 그리려 한다면 삼백예순다섯 장을 그릴 만하고, 나무 한 그루를 삼백예순닷새에 걸쳐 날마다 한 장씩 그려서 ‘나무도감’으로 묶을 만하구나 싶습니다. 아직 이런 도감을 선보이거나 이런 그림을 그린 이는 없지 싶은데, 이렇게 해야 제대로 된 ‘나무도감’이 되리라 느껴요.





.. 이런 초상화들은 모든 측면에서 극도로 정확하고 치밀하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실제로 이 젊은 화가에게 저명인사들의 작품 의뢰가 갈수록 많이 몰려든 이유는 바로 완벽한 묘사 때문이었다 … 렘브란트는 그저 의뢰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작품 몇 점을 완성한 뒤, 그는 관례적인 표현 방법을 포기하고, 역사화를 그릴 때 구사했던 방식으로 초상화를 구성했다 ..  (39쪽)



  미하엘 보케뮐 님이 글을 써서 엮은 《렘브란트 반 레인》(마로니에북스,2006)을 읽습니다. 타셴에서 펴낸 멋진 ‘그림 이야기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렘브란트 반 레인이라는 분이 지난날 일군 그림에 어떤 넋과 숨과 빛과 사랑과 노래와 꿈이 깃들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찬찬히 짚으며 들려주는 책입니다.


  《렘브란트 반 레인》에 실린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미하엘 보케뮐 님이 붙인 글을 읽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렘브란트라는 분이 우리한테 남긴 그림에 서린 이야기는 바로 ‘우리 스스로 읽’어야 합니다. 이 책을 쓴 미하엘 보케뮐 님조차 우리한테 ‘그림읽기’를 해 줄 수 없습니다. 미하엘 보케뮐 님은 미하엘 보케뮐 님 나름대로 읽은 이야기를 이 책에 담을 수 있을 뿐입니다.





.. 렘브란트의 작품을 돌이켜 살펴보면 그가 초심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역사화, 초상화, 몇 안 되는 풍경화까지도 모두 사건이나 행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이라는 것의 성격이 변해 그것 자체가 설명적인 것이 된다 … 멀리서 보면 색채는 얼룩덜룩하고 불분명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편견 없이 바라보면 그것이 순수하고 따뜻한, 내면에서 빛이 비치는 듯한 붉은 색조임을 감지하게 된다 ..  (77, 87쪽)



  그림에 흐르는 빛과 숨결을 읽습니다. 삶에 흐르는 빛과 숨결을 읽습니다. 노래에 흐르는 빛과 숨결을 읽습니다. 글과 책에 흐르는 빛과 숨결을 읽습니다. 밥 한 그릇에 흐르는 빛과 숨결을 읽습니다.


  언제나 내가 스스로 읽습니다. ‘잘 읽’거나 ‘못 읽’는다는 틀을 가를 수 없습니다. 제대로 읽는다거나 엉터리로 읽는다고 틀을 나눌 수 없습니다. 저마다 이녁 나름대로 읽습니다. 저마다 읽을 만큼 읽습니다.


  장미나 튤립을 보면서 마냥 ‘이쁘다’ 하고만 읽는 사람이 있고, 장미나 튤립을 어떻게든 집에서 키우려고 생각하면서 읽는 사람이 있으며, 어릴 적부터 이쁘게 바라본 장미와 튤립을 마음으로 그리면서 오늘 마주하는 장미와 튤립이 어떻게 얼마나 이쁜가를 돌아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땅 풀꽃과 장미랑 튤립을 나란히 놓으면서 서로 어떻게 이쁜가를 헤아리는 사람도 있을 테고요.


  렘브란트 그림이 대단하려면, 렘브란트 그림을 읽는 사람이 대단해야 합니다. 그림읽기를 누리려는 사람 스스로 대단한 눈썰미와 대단한 마음가짐과 대단한 사랑으로 마주해야 비로소 렘브란트 그림이 대단합니다.


  잘 헤아려 보셔요. 렘브란트 그림이든 말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이게 뭐야? 종이로구나. 불쏘시개로 쓰면 딱 좋겠네.’ 하고 여기면, 렘브란트 그림이라 하더라도 불쏘시개일 뿐입니다.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 눈높이 그대로 그림‘값’이 달라집니다.


  아주 훌륭하거나 멋진 책이 있어도, 이 책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야 훌륭하거나 멋집니다. 잘 팔리는 책이기에 훌륭하거나 멋진 책이 아닙니다. 훌륭히 알아보는 사람 손을 타면서 훌륭한 책이 됩니다. 멋지게 알아차려서 멋진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사람 손길을 받을 적에 멋진 책이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잘 팔리는 책은 ‘잘 팔리는 책’이 될 뿐입니다. 아름다운 책은 ‘아름다운 책’이 되지요. 사랑스러운 책은 ‘사랑스러운 책’으로 거듭나요.





.. 오로지 감상자가 자신이 가진 감상력과 이성의 힘을 동원해 예술작품이 제공하는 가능성 게임에 참여할 때만 비로소 색채와 형태의 주목할 만한 효과가 나타난다. 그렇게 하려면 그는 예술작품의 개별적 요소와 전체성 양쪽을 모두 파악해야 하며, 그림이 부여하는 원칙에 따라 그것들을 결합해야 한다 … 렘브란트는 자신만의 화면구성으로 감상자에게 특별한 역할을 맡겼다. 후기에 그린 〈포목상인조합의 임원들〉에서는 감상자가 장면의 맥락을 이해할 때 그림에 묘사된 과정에 자신이 개입돠어 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이는 그림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림 안에 보이는 것에도 해당한다. 렘브란트의 그림 양식을 통해 감상자는 구성자의 역할을 배정받았다 ..  (90쪽)



  우리는 모두 시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노래꾼입니다. 우리는 모두 살림지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림쟁이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웃이요 동무입니다. 우리는 모두 따사로운 사랑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내 삶을 담아서 내 숨결을 노래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화가’라는 사람만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삶을 사랑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림을 그립니다.


  렘브란트라는 분이 그림을 그려서 우리한테 남긴 까닭을 돌아봅니다. 렘브란트라는 분은 이녁 스스로 이녁 삶을 짓고 싶은 꿈으로 그림을 그렸으리라 느낍니다. 그러면, 나는 렘브란트 그림을 왜 읽을까요? 나는 렘브란트 그림을 읽으면서 내 삶을 살찌우고 북돋우면서 아름답게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4347.12.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사람 인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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