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도 익혀야지

 (252) 혹은 1


사람들은 작은 암선에 의지해서 현해탄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고향 땅을 밟기도 전에 병으로 쓰러지거나, 혹은 해난으로 죽어간 사람도 많았다. 원폭지옥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조선인피폭자에게는 조국으로 돌아오는 길 또한 구사일생의 길이었던 것이다

《이치바 준코/이제수 옮김-한국의 히로시마》(역사비평사,2003) 35쪽


 병으로 쓰러지거나, 혹은 해난으로 죽어간

→ 병으로 쓰러지거나, 또는 해난으로 죽어간

→ 몸져누워 쓰러지거나, 바닷물에 휩쓸려 죽어간

→ 몸져누워 쓰러지거나, 바다에 빠져 죽어간

 …



  보기글에서 ‘혹은’은 군말입니다. 덜면 됩니다. 그리고, ‘또는’이나 ‘아니면’을 넣어서 앞뒷말을 이을 수 있어요. ‘혹은(或-)’은 “(1) 그렇지 아니하면. 또는 그것이 아니라면 (2) 더러는”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아니라면’이나 ‘더러는’ 같은 한국말을 써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아들 혹은 딸

→ 아들 아니면 딸

→ 아들이거나 딸

→ 아들 또는 딸

 방 안의 사람들은 혹은 앉기도 하고, 혹은 눕기도 하였다

→ 방에 있는 사람들은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였다

→ 방에 있는 사람들은 앉거나 누웠다


  ‘혹은’뿐 아니라 ‘혹(或)’이라는 한자말도 곧잘 쓰입니다. ‘혹’은 “= 혹시. 간혹”을 뜻한다고 합니다. ‘혹시(或是)’는 “(1) 그러할 리는 없지만 만일에 (2) 어쩌다가 우연히 (3) 짐작대로 어쩌면 (4) 주저할 때 쓰는 말”을 뜻한다 하고, ‘간혹(間或)’은 “어쩌다가 띄엄띄엄”을 뜻한다고 합니다.


  뜻을 살피면 잘 알 수 잇습니다. 우리가 쓸 말은 ‘어쩌다가’나 ‘어쩌면’입니다. ‘드문드문’이나 ‘가끔’이나 ‘자칫’이나 ‘때로’나 ‘때로는’ 같은 낱말도 때와 곳에 따라 쓸 수 있어요. 4337.6.21.달/4347.11.2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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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작은 배를 타고 현해탄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고향 땅을 밟기 앞서 몸져누워 쓰러지거나, 바다에서 휩쓸려 죽어간 사람도 많았다. 원폭지옥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조선인피폭자한테는 고향나라로 돌아오는 길 또한 죽음을 무릅쓴 길이었다


‘암선’은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에 없는 낱말입니다. “작은 암선(?)에 의지(依支)해서”는 “작은 배에 기대어”나 “작은 배를 타고”로 손봅니다. ‘출발(出發)할’은 ‘떠날’로 손질하고, “밟기도 전(前)에”는 “밟기 앞서”로 손질하며, ‘해난(海難)으로’는 ‘바닷물에 휩쓸려’나 ‘바다에 빠져’로 손질합니다. “원폭지옥 속에서”는 “원폭지옥에서”로 다듬고,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는 ‘가까스로’로 다듬으며, ‘조국(祖國)’은 ‘고향나라’로 다듬습니다. “구사일생의 길이었던 것이다”는 “죽음을 무릅쓴 길이었다”로 고쳐씁니다.


..



 우리 말도 익혀야지

 (478) 혹은 2


그렇지만 인종주의자는 외국인이 열등한 인종에 속한다고 스스로 믿거나 혹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믿도록 한단다

《타하르 벤 젤룬/홍세화 옮김-인종차별 야만의 색깔들》(상형문자,2004) 30쪽


 스스로 믿거나 혹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 스스로 믿거나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 스스로 믿거나, 더러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 스스로 믿거나, 때로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 스스로 믿거나, 또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



  낱말이나 글월을 이을 적에 이음씨를 넣습니다. ‘혹은’은 이음씨 구실을 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혹은’이 무엇을 뜻하는지 헤아린다면 이러한 말마디를 이음씨로 쓸 까닭이 없습니다. 한국사람은 다른 낱말로 제 생각을 드러내어 낱말이나 글월을 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말은 때와 곳에 맞게 씁니다. 어느 한 가지 낱말이 어느 한 자리에서 이것도 뜻하거나 저것도 가리키지 않습니다. 토씨 ‘-의’가 한국 말투가 아닌 까닭은, 이러한 토씨를 붙이면 이 뜻도 저 뜻도 아닌 두루뭉술한 말씨가 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보기글에 나온 ‘혹은’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더러는’일까요? ‘때로는’일까요? ‘또는’일까요? 아니면 그냥 앞말과 뒷말을 이을 뿐일까요? 어느 쪽인지 뚜렷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가리키거나 나타내려 하는지 똑똑하지 않습니다.


  ‘더러는’이나 ‘때로는’이나 ‘또는’ 같은 말마디는, 바로 이 말마디로 가리키거나 나타내려는 뜻이 또렷합니다. 한국말인지 아닌지를 가리거나, 우리 말투인지 아닌지를 살피자면, 말마디 하나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는가를 읽으면 됩니다. 4339.1.9.달/4347.11.2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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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인종주의자는 외국사람이 덜떨어진다고 스스로 믿거나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믿도록 부추긴다


‘외국인(外國人)’은 ‘외국사람’이나 ‘다른 나라 사람’으로 다듬고, “열등(劣等)한 인종(人種)에 속(屬)한다고”는 “덜떨어지는 사람이라고”나 “덜떨어진다고”로 다듬습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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