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값과 배움삯



  2만 원짜리 책이 한 권 있습니다. 2만 원짜리 책을 한 권 사서 읽으면, 나는 2만 원어치를 배웁니다. 아주 마땅한 일입니다. 100만 원이 드는 강의가 있습니다. 100만 원짜리 강의를 챙기려고 찾아가서 들으면, 나는 100만 원어치를 배웁니다. 참으로 마땅한 일입니다.


  2만 원짜리 책을 사서 읽지만 100만 원어치에 이르는 삶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100만 원짜리 강의를 챙겨 듣지만 2만 원어치에 머무는 삶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가누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책으로 배우려 한다면, 2만 원짜리를 사든 2천 원짜리를 사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책으로는 2만 원이어도 헌책으로는 2천 원일 수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웃이나 동무가 책을 선물할 수 있어요. 책값은 0원이 들어도 얼마든지 ‘책으로 배울 수 있는 만큼 책으로 배운다’고 할 만합니다.


  이제 이 땅에 없는 시인 가운데 김남주와 고정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내요 하나는 가시내인데, 두 사람은 모두 전남 해남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전남 해남에서 깊디깊은 두멧시골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이제 이 땅에 없는 시인 가운데 둘인데, 이녁이 쓴 시를 그러모은 책을 사서 읽으면, 두 사람이 ‘우리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전남 해남 고장말로 구수하게 읊는 목소리를 헤아리면서 이야기를 읽을 수는 없습니다.


  책으로 읽는 지식은 ‘책에서 얻을 수 있는 만큼 얻는 지식’일 뿐입니다. 책으로 얻는 지식은 ‘삶으로 얻는 지식’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나무도감을 백 권쯤 사서 읽는다고 쳐 보지요. 나무도감을 백 권쯤 사서 읽는 이 가운데 ‘나무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무를 안다’고 말하려면,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철에 따라 다른 모습뿐 아니라, 열두 달에 따라 다른 모습에다가, 삼백예순닷새에 따라 다른 모습을 비롯해서, 백 해 즈믄 해에 걸쳐 다른 모습까지 알아야 합니다. 이를 알지 못하고서 이름을 익히거나 한살이를 익히거나 꽃이나 열매를 익혔대서 ‘나무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나무도감도 ‘나무 한 그루’ 이야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합니다. 나무 한 그루 이야기만 다루려 하더라도 100만 쪽이 넘는 두툼한 도감으로 엮어도 다 담아내지 못합니다.


  어떤 배움 한 가지를 놓고, 100만 원을 써야 하는 강의와 2만 원을 들이면 되는 책이 있습니다. 이때에 어떤 길로 가겠습니까? 100만 원을 들여서 강의를 들을까요, 2만 원을 들여서 책을 읽을까요?


  나는 대학교를 다섯 학기 다닌 뒤 그만두었습니다. 왜 그만두었느냐 하면, 오늘날 한국에서 대학교 강의는 ‘비싼 등록금과 견주어 가르치는 알맹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대학교 강의는 ‘굳이 비싼 등록금을 물어서 한 주에 한두 시간 겨우 듣는 이야기’일 뿐인데, ‘대학교재를 한 권 사서 한 시간 동안 읽느’니만 못할 만큼 알맹이가 허술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 강의는 ‘한 해 천만 원’을 들여서 다닐 만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깊이 배우고 싶다면, ‘백만 원을 들여서 책을 사서 읽’고, 남은 ‘구백만 원으로는 한 해 동안 여행을 다니고 온갖 일을 몸소 겪으면서 배울’ 때에 깊이 배울 수 있다고 느낍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대학 강의는 이와 같습니다만, 삶을 밝히는 길을 여는 슬기로운 강의가 있다면, 이러한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자리에 가려고 100만 원을 모을 만하다고, 아니 모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삶을 밝히는 길을 여는 슬기로운 강의라면, 2만 원짜리 책을 사서 읽을 적하고 사뭇 다르면서 넓고 깊게 이끄는 숨결이 흐를 테니까요. 다시 말하자면, 김남주 시인이나 고정희 시인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보며 숨결을 함께 느낄 만한 ‘시 낭송회’에 가는 데에 드는 돈이 100만 원이라면 기꺼이 100만 원을 치를 만하다는 뜻입니다. 시집을 2만 원어치 사서 ‘시인 목소리와 숨결과 얼굴도 모르는 채 읽기’보다 100만 원을 어떻게든 모아서 시인을 몸소 만나서 두 귀로 들을 때에 가슴 깊이 노래가 흐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배우려는 사람은 움직입니다. 배워서 알려고 하는 사람은 움직입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배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하루 내내 쉬지 않으면서 뛰고 구르고 엎어지고 깨지고 부딪히고 웃고 울고 노래하면서 삶과 사랑과 꿈을 배웁니다. 우리 어른들은 무엇을 하면서 배운다고 할까요? 책상맡에 앉아서 책을 몇 쪽 읽고 나서 ‘나 좀 안단 말이야!’ 하고 우쭐거리지 않나요? 흙 한 줌 만지지 않고서 나무나 꽃이나 풀을 안다고, 흙 한 줌 만진 적이 없으면서 ‘채식을 한다’고 밝히지 않나요?


  때와 곳에 따라서는 2만 원짜리 책을 사서 읽어도 얼마든지 깊고 넓고 아름답고 사랑스레 배웁니다. 그런데, 눈앞에 아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100만 원짜리 강의가 있는데 ‘오늘 내 주머니에 돈이 없어서 못 듣겠어’라든지 ‘무슨 강의가 저렇게 비싸나’ 하고 푸념을 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못 배웁니다.


  예부터 어른들은 아이들이 배운다고 할 적에 땅도 팔고 집까지 팔면서 가르쳤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어른인 우리’들은 참말 땅과 집을 팔아서 배우겠다고 하는 마음이 될 때에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른이니까요. 땅과 집을 팔아서 배운 뒤에는 어떻게 될까요? 슬기롭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럽게 배운 사람은, 땅과 집을 팔아서 배운 뒤, 한결 너르며 기름진 땅을 장만할 수 있고, 한결 포근하며 아름다운 집을 장만할 수 있습니다.


  배움이란 이와 같고, 삶이란 이와 같습니다. 책값과 배움삯을 아끼려는 사람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4347.11.2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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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2014-11-27 08:21   좋아요 0 | URL
아침에 이 글을 읽고 다시금 저의 독서에 대해 생각하게 됐네요 ^^

숲노래 2014-11-27 08:28   좋아요 0 | URL
우리가 책을 장만하거나 무엇을 배운다고 할 적에는
그야말로 아낌없이 다가서서 배워야 하는구나 싶어요.

`돈`을 따지면 제대로 못 배우는구나 싶어요.
사람아사람아 님 마음에 즐거운 이야기로 스며들었기를 빌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