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 맨션 1 토성 맨션 1
이와오카 히사에 글.그림, 오지은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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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412



위에 있으니 즐겁니?

― 토성 맨션 1

 이와오카 히사에 글·그림

 오지은 옮김

 세미콜론 펴냄, 2008.7.15.



  내가 어릴 적에는 ‘우리 집’ 아닌 ‘다른 집’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내 어버이는 나를 골목동네 조그마한 집에서 낳아서 키우셨다고 하는데, 나는 골목동네 조그마한 집이 어떠했는지 아주 어렴풋하게만 그립니다.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일곱 살 즈음부터 지낸 다섯 층짜리 아파트는 여러모로 많이 떠오릅니다. 이무렵 나는 이 집이 ‘집’이라고 여겼습니다. 작은아버지 사는 집을 찾아가고, 고모님이나 이모님 댁을 찾아가고 나서야 ‘다른 집’이 있는 줄 알았고, 집마다 살림살이가 다르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우리 집하고 견줄 수 없이 커다란 집을 보았고, 우리 집보다 더 작은 집을 보았습니다. 방과 마루가 따로 없이 한 칸짜리로 이룬 그야말로 조그마한 집을 보았고, 두 층으로 지은 집을 보았어요.



- 지구를 따라 도는 상·중·하층 3개로 구분된 거대한 링 시스템 맨션. 우리들은 그 거대한 맨션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지구 전체가 자연보호구역이 되어, 내려가는 것 자체가 허가되지 않기 때문이다. (6쪽)

- ‘나는 생각한다. 언젠가 아버지가 내려선 장소를 찾고 싶다고.’ (34쪽)





  다 다른 사람이기에 다 다른 집에서 삽니다. 그런데, 왜 누구는 조그마한 집에서 옹송그리면서 살고, 왜 누구는 커다란 집에서 널널하게 살까요. 왜 누구는 햇볕이 안 드는 집에서 살고, 왜 누구는 마당이 있는 커다란 집에서 살까요.


  나를 낳은 어버이와 지내면서 우리 집과 다른 집을 가만히 헤아립니다. 나는 왜 우리 어버이한테서 태어났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웃과 동무는 왜 크고작은 집에서 태어났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집을 모릅니다. 아기는 커다란 집이든 자그마한 집이든 살피지 않습니다. 아기는 오직 어버이 사랑을 헤아립니다. 오로지 어버이 사랑을 바라봅니다.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 혼자 서고 걸음마를 익히며 뛰놀 적에도 그저 어버이 사랑을 마주합니다. 아이들은 집이나 돈이나 이름이나 힘 따위는 살피지 않습니다.



-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살고 있는 링 시스템 높이가 고도 35000미터나 되는데 그 벽을 닦는 거잖아요.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위험도 있어요. 실제로 떨어진 사람도 있고 …… 목숨 보장, 작업복 관리에 꽤 비용이 들어서, 의뢰인에게 청구하는 금액도 커지고, 그래서 언제나 의뢰하는 쪽은 정부나 상층에 사는 고소득자들뿐이에요. 누나는 창문 닦는 일을 왜 의뢰했어요? 누나는 우리랑 같은 하층 주민이잖아요?” (45∼46쪽)

- “조금 닦인 틈새로 바깥을 봤어. 얼굴 딱 붙이고 말이야. 살짝 보인 풍경이 잊혀지지 않아. 진짜 하늘과 땅. 하층이면 인공 빛밖에 없잖아. 초등학생이 돼서 중간층에 갈 수 있기 전엔, 자연광이 좋은 이유를 잘 모르지.” (47쪽)





  이와오카 히사에 님이 빚은 만화책 《토성 맨션》(세미콜론,2008) 첫째 권을 읽습니다. 지구별에서 사람들이 더는 살 수 없어 지구 바깥에 띠 같은 집을 길게 두른 뒤, ‘위·가운데·아래’ 세 층으로 나누어서 지낸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니까, 지구별 바깥으로 떠나야 한 사람들은 ‘세 계급’으로 나눈 셈입니다. 사람들은 세 가지 신분으로 갈리는 셈입니다.


  만화에만 나오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지구별에서도 똑같이 드러나는 이야기입니다. 반지하와 옥탑에서 사는 사람이 있고, 한뎃잠을 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삯이 밀려 괴로운 사람이 있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에도 벅찬 사람이 있습니다. 한 달 집삯뿐 아니라 한 해 집삯에 이르는 돈으로 하룻밤을 묵는 호텔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한 달 동안 쓰는 밥값을 어떤 사람은 한 끼니 먹는 데에 쓰기도 합니다.


  먼 앞날, 지구별이 아주 망가져서 더는 사람이 발을 붙일 수 없는 때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이곳에서 신분과 계급으로 층이 갈립니다. 위와 아래가 갈립니다. 누군가는 위와 아래에 있고, 누군가는 위로 가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 ‘나에게 지금 밝은 방 같은 건 없지만 외롭지도 않아.’ (75쪽)

- “나는 결국 날 위해서 하는 거다. 이 일이 좋아졌으니까. 일단은 좋아하게 되는 게 우선. 그 다음은 스스로 생각해라.” (184쪽)




  위에 있는 사람은 즐거울까 궁금합니다. 위에 있는 사람은 흐뭇할까 궁금합니다. 아래에 있는 사람은 슬플까 궁금합니다. 아래에 있는 사람은 사랑이 없이 메마르거나 캄캄할까 궁금합니다.


  아니, 그리 궁금하지 않습니다. 위에 있다 한들 ‘위’라는 자리는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따로 없는 ‘위’라는 자리에 있더라도, 즐겁지 않고 사랑을 모르며 갑갑한 굴레에 갇혀 쳇바퀴질을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따로 없는 ‘아래’라는 자리에 있으나, 늘 웃고 노래하면서 사랑을 꽃피우는 사람도 많아요.


  우리는 어디에서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어디에서 즐거울까요?


  스스로 노래하는 곳에서 살아야 합니다. 스스로 웃는 곳에서 즐겁습니다. 스스로 춤추고 꿈꾸는 곳에서 살아야 합니다. 스스로 어깨동무를 하고 이야기를 짓는 곳에서 즐겁습니다. ‘토성 맨션’이라는 곳에서 아래층에 있는 이들이 ‘위층 유리창’을 닦아 주지 않으면, 위층 사람은 늘 어둡고 퀴퀴하면서 차디찬 삶을 이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4347.11.1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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