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경제신문'에 싣는 책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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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어머니와 살기



  아이들은 누구나 어머니와 삽니다. 왜냐하면 아이로 태어나려면 먼저 열 달 동안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을 보내지 않고서 태어나는 아이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서 천천히 자라고 난 뒤 이 땅에 태어납니다.


  어머니는 씨앗 한 톨을 사랑스럽게 품어 오롯한 사람으로 키웁니다. 젖만 물 수 있는 갓난쟁이를 포근하고 부드럽게 가슴으로 안아서 젖을 물립니다. 어머니한테서 젖을 받아먹으며 자라는 갓난쟁이는 차츰 손과 발에 힘이 붙고, 팔과 다리가 야뭅니다. 아이 스스로 씩씩하게 서서 걷거나 뛰거나 달립니다.


  혼자 걷거나 뛰거나 달릴 수 있는 아이를 지켜보는 어머니는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아이가 제 마음을 오롯이 드러낼 수 있게끔 또렷하게 한 마디씩 가르칩니다. 어머니는 학문이나 지식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말을 가르칩니다. 사람과 사물을 가리키는 이름을 아이한테 가르칩니다. 어머니는 아이한테 ‘삶이 고스란히 묻은 사랑이 어린 말’을 아이한테 가르칩니다.


  어머니한테서 몸을 받고 말을 물려받은 아이는 차근차근 놀이를 즐깁니다. 어머니가 가르치는 놀이를 즐기기도 하지만, 아이가 손수 놀이를 지어 즐기기도 합니다. 손수 흙과 돌과 모래를 만집니다. 손수 나무와 풀과 꽃을 쓰다듬습니다. 스스로 바람을 마시고, 스스로 빗물을 받으며, 스스로 밥을 씹습니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어머니는 바지런히 실을 잣고 천을 짜서 옷을 깁습니다. 나날이 자라는 아이 몸에 맞게 새로운 옷을 입힙니다. 몸 구석구석 알뜰히 씻기면서 나중에 아이가 스스로 몸을 잘 씻도록 이끕니다.


  아이는 언제나 어머니 곁에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한테 하늘과 같습니다. 포근하게 어루만지고 따사롭게 품습니다. 밥과 옷과 집을 주는 어머니는 말과 마음과 사랑을 함께 줍니다. 아이는 어머니한테서 삶을 물려받는 한편, 사랑이 그득한 씨앗을 이어받습니다.


  그림책 작가로 이름이 높은 사노 요코 님이 쓴 《나의 엄마 시즈코상》(이레,2010)이라는 수필책이 있습니다. 사노 요코 님은 이녁 어머니와 얽힌 이야기를 글로 풀어냅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하고 부대낀 이야기를 꾸밈없이 드러내고, 나이가 든 뒤로 어머니하고 부딪힌 이야기를 낱낱이 밝힙니다. “비록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라고 해도 나도 들어가기 싫은 곳에 있게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29쪽).” 하고 스스럼없이 말합니다. 네, 사노 요코 님을 낳은 어머니는 양로원에 들어갑니다. 사노 요코 님은 그림책을 빚어서 얻은 돈을 ‘어머니 양로원 시설에 쏟아붓’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그림책을 빚어서 얻은 돈으로 양로원에 대지 말고, ‘그림책을 안 그리면서 어머니와 함께 지낼’ 만하지 않을까 하고요. 그러나, 사노 요코 님은 어릴 적부터 어머니하고 수없이 부딪혔다고 해요. 어머니가 더없이 못마땅했고, 어머니와 떨어져 살기를 바랐다고 해요. 이녁을 낳은 어머니가 몹시 포근하면서 따사로웠으면 어떠했을까요? 이때에는 아마 사노 요코 님이 어머니하고 떨어져 살 생각을 안 했겠지요. 어머니와 늘 함께 지내면서 조용히 지낼 만하겠지요. 그러면, 사랑스러운 어머니와 함께 살며 빚을 그림책에는 어떤 이야기가 깃들 만할까요? 사랑스럽지 못한 어머니와 멀리 떨어진 채 양로원에 돈을 대는 삶으로 빚는 그림책에는 어떤 이야기가 흐를까요?


  사랑은 늘 사랑이라고 느낍니다. 사랑이 아프게 다가올 수 있고 기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만, 사랑은 늘 사랑이라고 느낍니다. 사랑이 늦게 다가온다고 여길 수 있고 사랑이 언제나 감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만, 사랑은 늘 사랑이지 싶어요.


  사노 요코 님을 낳은 분은 “서른두 살의 나이에 여섯 아이를 낳고 한 명을 떠나보낸 다섯 아이의 엄마였다(40쪽).”고 합니다. 제국주의 일본이 전쟁에서 질 무렵 ‘다섯 아이 어머니인 서른두 살 여자’는 어떤 삶을 일구어야 했을까 헤아리면서, 이와 비슷한 무렵에 ‘일제강점기에서 겨우 벗어났다 싶더니 한국전쟁 불길에 휩쓸리면서 다섯 아이 어머니인 서른두 살 여자’는 한국에서 어떤 삶을 일굴 수 있었을까 헤아립니다.


  나라가 다르고, 사회와 경제와 정치가 다릅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라는 이름은 같습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어머니는 언제나 어머니입니다. “가난은 괴로운 일이었지만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35엔짜리 라면을 반씩 나눠 먹기도 했다. 나는 그보다 맛있는 라면을 지금껏 먹어 본 적이 없다(113쪽).”는 말처럼, 우리 곁에는 이웃이 있고 동무가 있습니다. 가난해도 함께 가난하고, 넉넉해도 함께 넉넉합니다. 기쁠 적에는 기쁨을 나누는 이웃이요, 슬플 적에는 슬픔을 나누는 이웃이에요.


  그러면 요즈음 우리는 어떤 어머니나 아버지로 살아가는지 궁금합니다.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주는 어머니나 아버지입니까. 아이와 함께 사랑을 꽃피우려는 어머니나 아버지입니까. 아이한테 가장 아름다운 말을 물려주는 어버이입니까. 아이한테 가장 즐거운 노래를 들려주는 어버이입니까. 아이한테 가장 따스한 밥 한 그릇 내주면서 가장 반가운 옷 한 벌 마련하는 어버이입니까.


  아이들은 학교에 다녀야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맨 먼저 집에서 배웁니다. 아이들은 교과서와 책으로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누구보다 어버이한테서 배웁니다. 학교가 바로서야 아이들이 슬기롭게 배울 수 있기도 하지만, 학교에 앞서 여느 살림집이 바로서야 하고, 여느 마을이 바로서야 합니다. 정치나 경제나 문화나 복지에 앞서, 여느 사람들 보금자리가 바로서야 합니다. 여느 마을에 있는 여느 집에서 여느 어버이가 여느 아이를 따사롭게 돌보면서 즐겁게 삶을 지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아이들이 씩씩하게 자랍니다.


  교육부 장관이나 교육감이나 대통령이나 지자체 일꾼도 잘 뽑아야 할 테지만, 이에 앞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곧은 마음으로 착한 꿈을 키워 따순 사랑을 건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 아이들이 아버지와 함께 삶을 짓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학교에 붙들려도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자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회사를 다니더라도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쉬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집밥을 먹고, 집살림을 익히며, 집숲을 가꿀 수 있기를 빌어요. 아이들이 집터부터 튼튼히 세워서 삶터와 일터와 놀이터와 꿈터와 사랑터를 모두 슬기롭게 지을 수 있기를 빌어요. 4347.11.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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