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경제신문에 싣는 책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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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내 동무는 어디에 있나



  우리 집 두 아이가 마당에서 놉니다. 우리 집은 시골집이기에 마당이 제법 있습니다. 그리 넓지는 않으나 두 아이가 놀기에는 이럭저럭 알맞습니다. 자전거를 탈 수 있고, 공을 찰 수 있으며, 잡기놀이를 할 수 있습니다. 마당 한쪽에 놓은 큰 고무대야에 큰아이와 작은아이가 나란히 들어갑니다. 여느 때에는 물을 받아서 물놀이를 했는데, 물이 없는 빈 고무대야에 두 아이가 쏙 들어갑니다. 이 모습을 보고는 옳거니 재미난 놀이가 하나 떠오릅니다. 고무대야에 앉은 두 아이 뒤로 살그마니 다가가서, 고무대야를 두 손으로 턱 집고는 슬슬 흔듭니다.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흔들 때마다 아이들이 웃으면서 소리를 칩니다.


  내 어릴 적을 돌아봅니다. 1980년대 첫무렵에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교실에서 걸상으로 말을 타듯이 놀았습니다. 동무들도 걸상으로 말타기를 했어요. 나무걸상에 거꾸로 앉아서 등받이를 손잡이로 삼아서 앞뒤로 흔들며 앞으로 똑딱똑딱 나아갑니다. 이러다가 어른한테 들키면 된통 꾸지람을 들을 뿐 아니라, 걸상을 머리 위로 치켜들면서 팔이 빠져라 땀을 빼야 합니다. 그렇지만 ‘나무걸상 말타기’는 더없이 재미난 놀이입니다.


  옛날부터 우리 겨레는 집집마다 마당을 두었습니다. 마당이 없는 집이란 없었습니다. 오늘날 도시는 사람이 너무 많아 땅밑에까지 방을 두고 옥탑에까지 집을 두어요. 사람이 알맞게 모여서 살기에는 어려우니 자꾸자꾸 땅밑으로 파고들거나 하늘로 높입니다. 땅밑에서 사는 사람은 햇볕을 쬐기 어렵고, 하늘 높이 올라가는 사람은 여름 땡볕과 겨울 찬바람에 고달픕니다. 게다가, 땅밑이건 하늘 높은 곳이건 마당을 못 누려요. 아니, 옥탑집이라면 옥상마당이 조금 있겠지요. 1층도 2층도 3층도 마당이란 없는 집이 되는 도시 얼거리입니다. 흙을 밟기 어렵고, 맨 땅바닥을 두 발로 디디기 어렵습니다.


  마당이 사라진 도시에서는 마당을 잊습니다. 마당이 있는 집은 아이들이 뛰노는 집이요, 어른들이 평상에 앉거나 돗자리를 깔아 어우러지는 집이었습니다. 마당 가장자리에는 텃밭과 꽃밭을 둡니다. 텃밭과 꽃밭 사이에는 나무를 심어 돌봅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나무를 심었고, 아이라면 누구나 ‘내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런 흐름을 모두 잊지요. 마당을 잊으며 텃밭과 꽃밭을 잊고, 나무를 잊으며, ‘내 나무’뿐 아니라 ‘이웃집 나무’와 ‘동무네 나무’를 모두 잊어요.


  어린이책 《내 친구 비차》(사계절,1993)를 읽습니다. 니콜라이 노소프라는 분이 쓴 러시아 어린이문학입니다. 러시아에서는 1951년에 처음 나왔다고 하는군요. 참으로 오래된 작품이라 할 만한데, 오늘날 한국 아이들한테 읽혀도 재미있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험 문제를 풀다가 “괜히 복잡하게 써서 헷갈리게 해 놓고는, 깊이 생각을 하지 않아서 문제를 풀지 못한다고 트집을 잡다니(128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아이가 문제를 못 풀어서 이렇게 말했을 수 있고, 참말 아이한테 너무 어려웠을 수 있습니다. 아이가 문제를 못 풀었다면, 아이가 더 깊이 생각했다면 풀 수 있는 문제였다는 뜻입니다. 아이한테 너무 어려웠다면, 학교는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치는 곳인가 하고 되새길 노릇입니다.


  어린이책 《내 친구 비차》에 나오는 ‘비차’라는 아이는 꾀병을 부리면서 학교를 빠지는 동무한테 어느 날 “나는 오늘 너랑 마지막으로 얘기하러 온 거야. 만일 내일도 학교에 안 오면 올가 선생님한테 네가 여태까지 꾀병을 부렸다고 모두 말씀드릴 거야(209쪽).” 하고 말합니다. 동무네 어버이도, 두 아이를 맡은 담임 교사도, 다른 어른뿐 아니라 동무들도, 비차와 동무인 아이가 왜 꾀병을 부리는지 모르고, 얼마나 오래 꾀병을 부리면서 학교를 빠지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모를까요. 왜 알려고 하지 않을까요. 왜 깊이 살피지 않으며, 왜 더 가까이 다가가서 ‘꾀병을 부릴 만큼 마음앓이 하는 아이’를 살가이 안지 못할까요.


  오늘날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서로 어떻게 사귈는지 궁금합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동무가 제대로 모르는 대목이 있으면 차분하면서 따뜻하게 잘 알려주는 아이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엇나가는 동무를 따뜻한 말로 타이르거나 너그러운 말로 감싸려고 하는 아이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집집마다 마당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마당이 사라져서 집집마다 아이들이 풀도 꽃도 나무도 못 보기 때문입니다. 마당이 사라진 집에서 아이들은 놀이를 잊고, 마당뿐 아니라 골목을 빼앗긴 아이들은 놀이를 못 합니다. 함께 어울려 놀지 못하는 아이들은 동무를 얼마나 아끼거나 돌볼 수 있을까요? 같이 어우러져 노는 하루를 못 누리는 아이들은 동무를 얼마나 사랑하거나 헤아릴 수 있을까요?


  어릴 적에 으레 나무타기를 하면서 놀던 아이는 나무를 아끼는 마음을 키웁니다. 어릴 적에 으레 풀을 베고 나물을 뜯어서 먹던 아이는 풀이 자라는 들과 숲을 아끼는 사랑을 키웁니다.


  내 동무는 어디에 있는가요. 내 동무는 누구인가요. 학교에서 옆자리에 앉은 아이는 동무인가요, 아니면 ‘시험성적을 겨루는 맞수’인가요. 옆자리에 앉은 아이뿐 아니라 같은 교실에 있는 다른 아이들은 살가운 동무인가요, 아니면 ‘내 시험성적을 높이려면 밟고 올라서야 할 맞수’인가요.


  예부터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이리 얼크러지고 저리 섞이면서 놀았습니다. 들을 달리고 숲을 가르며 냇물에 뛰어들고 모래밭에서 뒹굴었습니다. 씩씩하게 놀며 자란 아이들은 ‘어릴 적에 놀던 이야기’를 하나하나 싱그럽게 떠올립니다. 이와 달리, 어릴 적에 시험공부만 죽어라 하던 아이들은 어떤 시험문제를 풀었는지 도무지 떠올리지 못합니다. 시험공부는 시험을 치르면 모두 사라집니다. 시험성적도 시험을 치르면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지지요. 합격이나 불합격이라는 도장은 찍을 테지만, 이런 도장이 삶을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무럭무럭 자라서 어른이 된 우리 모습을 돌아보셔요. 아이를 낳은 어버이가 된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셔요. 어른인 우리가 아이들한테 “얘들아, 너희 어머니(아버지)가 어릴 적에 이렇게 시험을 잘 봤단다!” 하면서 성적표를 보여줘 보셔요. 아이들 눈망울이 어떠할까요? 그리고, 어른인 우리가 아이들한테 “얘들아, 너희 아버지(어머니)가 어릴 적에 이런 놀이를 하며 하루를 길게 보냈단다!” 하면서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놀아 보셔요. 두 가지 모습을 아이들한테 보여주면, 아이들은 어느 때에 따분해 하고, 어느 때에 눈망울을 빛내면서 까르르 웃을까요? 아이들은 어느 때에 어른들 말을 귀여겨들으면서 마음을 살찌울까요? 4347.9.2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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