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문화재단에서 펴내는 잡지에 싣는 글입니다. 지난 여름호에 실은 글인데 이제서야 걸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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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34. 새롭게 태어나는 말
― 함께 살리며 아끼는 말


  까치가 지은 둥지는 ‘까치집’이라 합니다. 한국말사전을 보면 ‘까치집’은 올림말입니다. 새가 지은 둥지는 ‘새집’이라 해요. 이 낱말도 한국말사전에 나와요. 제비가 지은 ‘제비집’과 딱새가 지은 ‘딱새집’은 한국말사전에 나오지 않습니다. 한국말사전에 ‘-집’을 뒷가지로 올린다면, ‘제비집’이나 ‘딱새집’이나 ‘할미새집’ 이나 ‘해오라기집’같은 낱말을 따로 올림말로 싣지 않아도 돼요. 그렇지만, 아직 한국말사전은 한국말을 넓고 깊으며 슬기롭게 갈고닦는 밑틀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늘날 맞춤법으로는 ‘제비 집’이나 ‘참새 집’처럼 띄어서 적어야 하는데, 굳이 이렇게 띄어서 적어야 할까 궁금해요. 이 새가 지은 집은 붙여서 적고, 저 새가 지은 집은 띄어서 적어야 할 까닭은 없어요.

  러시아사람 코르네이 추콥스키 님이 쓰고 한국사람 홍한별 님이 옮긴 《두 살에서 다섯 살까지》(양철북,2006)라는 책을 읽다가 125쪽에서 “준비, 땅!”이라는 말마디를 봅니다. 저도 어릴 적에는 이런 말을 익히 썼습니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이런 말을 으레 썼거든요. 어느 교사는 “요이, 땅!”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교사(어른)가 읊는 말투를 받아들여 “요이, 땅!”이라 했어요. “요이, 땅(ようい,どん)!”이 일본말인 줄 알아차린 때는 한참 뒤였어요.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1990년대 첫머리까지 이 말마디가 일본말이라고 알려준 어른(교사)이 없었어요.

  그러면 한국말은 무엇일까요. 한국사람이 예부터 즐겁게 쓰던 한국말은 무엇일까요. 학교에서 한국말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우리들은 한국말을 어디에서 제대로 배울 만할까요.

  총을 쏘는 소리를 두고, 한국사람은 ‘탕’으로 적습니다. 일본사람은 총을 쏘는 소리를 ‘땅(どん)’으로 적어요. 그러면 ‘요이(ようい用意)’는 무엇일까요. 이 일본말은 ‘준비(準備)’를 뜻한다 하고, 이 말뜻을 좇아 “요이, 땅!”을 “준비, 탕!”으로 고쳐서 쓰자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이쯤까지는 요즈음 들어 이럭저럭 둘레에서 들을 수 있고 밝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쯤에서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일본말을 한국말로 고쳐서 바르게 적는 길’만 헤아리느라, 막상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로 삼기 앞서, 한겨레가 수천 수만 해에 걸쳐 어떤 말을 썼는지 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겨레는 남달리 ‘셋’이라는 숫자를 좋아합니다. 왜 좋아할까요? 아무래도 오랜 숨결과 이야기가 깃들었을 테고,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움직이면서 좋아하겠지요. 수많은 사람들 손과 입을 거쳐 ‘셋’이라는 숫자를 마음으로 깊이 받아들이거나 삶으로 넉넉히 맞아들였겠지요.

  어떤 일을 여럿이 함께 하면서 겨루는 자리에서 “하나, 둘, 셋!” 하고 외치는 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요이, 땅!”이라는 일본말이 뻗치더라도 “하나, 둘, 셋!” 하고 말하던 분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나, 둘, 셋!”을 외쳤을까요? 지식으로? 학문으로? ‘국어순화’를 하려고? 아마 모두 아니지 싶어요. 그저 먼먼 옛날부터 몸에 익고 마음에 익숙한 대로 “하나, 둘, 셋!”을 입으로 터뜨렸으리라 느껴요. 한국말로 바르게 쓰자면 “하나, 둘, 셋!”입니다.

  소설을 쓰던 이문구 님이 2003년에 숨을 거두기 앞서 동시를 그러모아 《산에는 산새 물에는 물새》(창비,2003)라는 책을 선보였습니다. 이문구 님은 이녁 딸아들한테 읽히려고 1988년에 처음 동시집을 냈고, 이녁 딸아들이 자라 새롭게 아이를 낳으니 손자한테 읽히려고 다시 동시를 썼어요. 이문구 님이 어린 나날 충청도 시골에서 늘 보고 겪으며 마주했던 이야기를 손자한테 들려주는 동시로 엮었습니다.

  〈맷돌〉이라는 동시를 읽으면 “이가 닳아서 덜 먹으면 / 매죄료 장수가 정으로 쪼아서 / 언제나 살갑게 돌아갔는데” 하고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 동시에는 ‘매죄료장수’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매죄료장수는 매통이나 맷돌이 이가 닳으면 정으로 쪼아서 날카롭게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요. 요즈음은 매통도 맷돌도 보기 어려우니 매죄료장수는 더더욱 볼 수 없어요.

  〈굴뚝새는 굴뚝새〉라는 동시를 읽으면 “김장을 담그고 / 고사떡을 도르고 / 동지 팥죽을 쑤니까 / 낮에도 어둑한 굴뚝에 / 굴뚝새가 왔네요” 하고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 동시에는 ‘도르다’라는 낱말이 나와요. ‘도르다’라는 낱말에는 다섯 가지 말뜻이 있는데, 다섯째 뜻이 “몫을 갈라서 따로따로 나누다”입니다. 그리고, ‘도르리’라는 낱말은 “(1) 여러 사람이 먹을거리를 차례로 돌려 가며 내어 함께 먹음 (2) 똑같이 나누어 주거나 골고루 돌라 줌”을 뜻해요. 시골에서 두레와 품앗이와 울력이 사라지면서 ‘도르리(도르다)’라는 낱말도 시나브로 사라졌는데, 1980년대 끝무렵이었는지 1990년대 첫무렵이었는지 ‘도르리’라는 이름이 붙은 과자가 나온 적 있어요. 그무렵 방송광고에서 ‘도르리’라는 과자를 알리면서 말뜻을 곁달아서 얘기했어요.

  생각해 보면, 요즈음은 두레라든지 도르리를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제는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지난날 ‘두레’나 ‘도르리’하고는 사뭇 다르지만, 새로운 삶에 걸맞게 ‘새로운 두레’와 ‘새로운 도르리’를 해요.

  도시에서 곧잘 나타나는 생활협동조합은 ‘새로운 두레’입니다. 뜻 맞는 이들이 여럿 모여 밥집에서 즐겁게 밥을 먹으면서 밥값을 나누어 내는 일은 ‘새로운 도르리’라 할 만합니다.

  삶을 새롭게 가꾸면서 말을 새롭게 가꿉니다. 삶을 알뜰히 일구면서 말을 알뜰히 일구어요. 한국말사전에서 예쁜 토박이말을 캐내는 일은 나쁘지 않으나, 우리가 오늘 이곳에서 예쁘게 쓸 새말을 생각하면서 나누는 일은 무척 좋습니다. 아이들한테 어떤 말을 물려주고 싶은지 헤아려 보셔요. 아이들한테 물려주기 앞서, 어른인 우리 스스로 서로서로 어떤 말을 주고받을 적에 사랑스럽거나 아름다울는지 곱씹어 보셔요. 삶을 사랑할 때에 말이 사랑스럽습니다. 4347.6.1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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