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 조정민의 twitter facebook 잠언록 4
조정민 지음, 추덕영 그림 / 두란노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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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서 길을 찾는 삶

―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

 조정민 글

 추덕영 그림

 두란노 펴냄, 2013.11.25.



  조정민 님이 쓴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두란노,2013)이라는 책을 찬찬히 읽습니다. 조정민 님은 이 책을 쓰면서 ‘아직 예배당에 가지 않는 사람’을 ‘예배당으로 이끌 마음이 가득하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러나, 예배당이든 학교이든 시골이든 도시이든, 누가 이끈다고 해서 갈 수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갈 수 있습니다. 달콤한 말이나 멋있는 말이나 훌륭한 말을 들려준다고 해서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삶을 바꾸거나 새롭게 다스릴 적에 비로소 움직입니다.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 첫머리에는 멧기슭 이야기가 나옵니다. 맨 처음을 여는 ‘잠언’을 가만히 되새깁니다. 참말 그러한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하고, 글쎄 하고 고개를 가로젓기도 합니다.



.. 산 정상에 올라가야 숨 막히는 전경을 볼 수 있지만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일상은 대부분 산기슭의 삶입니다 ..  (13쪽)



  “숨 막히는 전경”이란 무엇일까요. 숨이 막힐 만큼 놀라운 모습을 본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도시에서 사람들은 숨이 막힐 만큼 놀라운 모습을 보고 싶어서 40층이니 50층이니 하는 주상복합 건물을 지어서 높다란 꼭대기에서 남을 내려다보고 싶을까요?


  우리는 ‘꼭대기’가 아닌 ‘기슭’에서 산다고 조정민 님이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그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집을 꼭대기에 둘 수 있습니다. 꼭대기 가까운 데에 둘 수도 있습니다. 도시나 마을하고 멀찌감치 떨어진 높은 곳에 마련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끄럽기 때문입니다. 어수선하거나 지저분하기 때문입니다.


  공장이나 짐승우리 곁에 집을 마련하면 물을 마음껏 마시지 못합니다. 들이 가까이에 있는 시골집에 집을 마련하더라도, 시골사람이 모두 들에 농약을 치고 비료를 뿌리면, 이때에도 물을 제대로 마시지 못합니다. 농약과 비료 기운이 스며든 물은 못 마십니다. 공장에서 내보내는 쓰레기가 섞인 물은 마실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도시에서는 모두 수돗물을 마셔요. 도시 언저리에서 흐르는 냇물이 있어도, 냇물을 길어 마실 수 없어요.


  기슭에서 마을을 이루며 산다고 할 때에는 어떤 하루가 될까요. 물을 싱그럽게 마시지 못한다면, 바람도 맑지 않겠지요. 그저 사람들이 많이 모인 도시나 마을에서만 보금자리를 꾸려야 할까 궁금합니다.



.. 같은 장소인데, 한 사람은 쓰레기가 넘치는 곳으로 만들고, 한 사람은 꽃이 활짝 핀 정원으로 가꿉니다. 같은 마음인데, 한 사람은 죽음의 파편들로 가득하고, 한 사람은 생명의 씨앗들로 넘칩니다 ..  (23쪽)



  쓰레기란 무엇일까요. 쓰레기는 왜 생길까요. 스스로 흙을 일구어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얻는 사람은 쓰레기를 만들지 못합니다. 쓰레기가 나올 수 없습니다. 밥과 옷과 집을 돈을 들여 사다가 쓰는 사람은 언제나 쓰레기가 나옵니다. 쓰레기가 안 나올 수 없습니다. 도시사람이 누는 똥오줌은 모두 쓰레기입니다. 거름으로 되살려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시사람이 설거지를 하며 흘리는 구정물도 쓰레기입니다. 흙으로 돌려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감을 때에 쓰는 샴푸는 쓰레기가 아닐까요. 자가용을 굴리며 내뿜는 배기가스는 쓰레기가 아닐까요. 도시에서 쓰레기 안 내보내고 살 수 있을까요. 백 해쯤 거뜬히 쓸 수 있는 냉장고나 세탁기나 텔레비전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모두 쓰레기가 됩니다. 백 해를 쓰더라도 백 해 뒤에는 쓰레기가 됩니다.



.. 담이 감옥을 만들고 철창이 감방을 만들지만 더 힘든 곳은 내 욕심이 만든 감옥이고 내 편견이 만든 감방입니다 ..  (32쪽)



  학교는 담을 세웁니다. 그래서, 담을 세운 학교는 감옥과 같습니다. 청와대와 국회의사당이나 법원 같은 데는 경찰 같은 문지기가 지키고 담도 높습니다. 그래서 청와대나 국회의사당 같은 데는 감옥하고 닮습니다.


  왜 학교는 감옥과 같은 모양새가 될까요? 왜 학교는 아이들한테 똑같은 옷을 똑같은 빛깔과 모양대로 입힐 뿐 아니라, 머리카락과 신과 속옷까지 하나하나 따질까요? 왜 다 다른 아이들을 다 다르게 살찌우면서 가르치지 못할까요? 왜 다 다른 아이들을 죄수로 바라보면서 입시지옥에 내몰기만 할까요?


  곰곰이 돌아보면, 열린 터가 아닌 닫힌 감옥과 같은 얼거리인 터라,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에서 나오는 정책이나 행정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사회와 문화가 더 열리면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길보다는, 더 닫히고 더 막히며 더 경쟁을 부채질하기만 합니다.


  예배당도 다르지 않아요. 예배당은 담이 없을까요. 담이 없이 누구나 맞아들여 밥을 나누어 주고, 돈을 널리 베푸는 예배당은 몇 군데가 될까 궁금합니다.



.. 젊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순수해서 아름다운 것이고, 늙어서 추한 것이 아니라 탐욕스러워서 추한 것입니다 ..  (48쪽)



  마음이 맑을 때에 맑습니다. 마음이 아름다울 때에 아름답습니다. 마음에 때가 묻으면 때가 묻은 삶입니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운 삶입니다.


  아주 마땅한데, 마음은 숫자로 못 따집니다. 경제성장률은 숫자로 나오고, 시험성적과 등수는 숫자로 나옵니다. 그러면,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한다고 하는 아이들은 어떤 마음일까요. 등수와 성적으로 매기는 숫자는 아이들 마음을 얼마나 잘 헤아리는 잣대가 될까요.


  시험을 없애지 않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맑지 못한 길로 내모는 셈이리라 느낍니다. 자격증을 새로 만들고, 졸업장을 보여주라 말하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아름다움과 동떨어지도록 몰아붙이는 셈이로구나 싶습니다.



..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에 눈뜨게 하고, 사랑은 뻔히 보이는 것에 눈멀게 합니다 ..  (111쪽)



  믿음이 있기에 ‘눈으로 못 보는 것을 본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기에 ‘뻔히 보이는 것을 못 본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참다운 믿음이란 사랑입니다. 참다운 사랑이란 믿음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둘로 가르지 못합니다. 내가 너를 믿기에 내가 너를 사랑해요. 네가 나를 사랑하기에 네가 나를 믿어요. 둘은 늘 같아요.


  이른바 ‘맹신’과 ‘광신’일 때에는 눈이 멉니다. 숫자와 성적에 목이 매일 때에도 눈이 멉니다. 즐겁게 벌어서 즐겁게 쓰는 돈이 아닌, 더 많이 거두어들여 마구마구 쓰려는 돈일 때에도 눈이 멀어요.



.. 내가 분노로 지은 것은 남을 분노하게 만들고, 내가 슬픔 속에 노래한 것은 남도 슬프게 하고, 내가 목말라 디자인한 것은 남까지 목마르게 합니다. 나는 세상에 반드시 투영됩니다 ..  (184쪽)



  조정민 님이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책에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사랑’이리라 생각합니다. 맑은 사랑으로 착하게 삶을 가꾸어 참다운 아름다움을 누리자는 뜻을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리라 봅니다.


  그러면, 사랑을 더 깊이 살펴서 이야기하면 좋겠어요. 조정민 님이 스스로 생각해서 지은 여러 ‘잠언’을 묶은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을 읽으면, 이것과 저것을 갈라서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틀을 세웁니다. 이쪽으로 가야 맞고 저쪽으로 가면 그르다는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흐릅니다.



..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은 문제 속에 살고, 해답을 바라보는 사람은 해답 속에 삽니다 ..  (255쪽)



  굳이 둘로 갈라야 하지 않습니다. 좋음과 나쁨으로 가를 만한 일이란 없습니다. 어떤 길이든 우리들이 스스로 걸으면서 삶을 겪습니다. 어떤 삶을 누리든 저마다 사랑을 배우고 나누면서 새롭게 눈을 뜹니다.


  길을 찾을 적에, 어떤 이는 하루만에 찾을 수 있어요. 어떤 이는 백 해는커녕 즈믄 해가 흘러도 길을 못 찾을 수 있어요. 그러면, 하루만에 길을 찾으면 훌륭하고, 즈믄 해가 걸려도 길을 못 찾으면 어리석을까요?


  이틀만에 길을 찾는 사람은 하루만에 길을 찾은 사람보다 어리석을까요? 구백 해만에 길을 찾은 사람과 구백 해하고 열흘이 걸려 길을 찾은 사람이 있으면, 누가 슬기롭고 누가 어리석을까요?


  그예 사랑을 이야기하기를 바라요. 예배당이나 예수님이나 하느님을 이야기하기보다, 스스로 나를 사랑하고 내 마음속에 깃든 푸른 숨결을 사랑하며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과 일구는 삶을 사랑하는 길을 이야기하기를 바라요. 그뿐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있을 테니까요. 사랑은 늘 우리 마음속에서 태어나니까요. 4347.9.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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