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찬 날 애지시선 27
표성배 지음 / 애지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말하는 시 77



쇠말뚝 나라에서

― 기찬 날

 표성배 글

 애지 펴냄, 2009.7.10.



  시외버스는 서울을 벗어납니다. 여섯 시간에 걸쳐 시외버스를 타고 또 타서 서울로 온 뒤 볼일을 마쳤습니다. 여관에서 하룻밤 묵었습니다. 서울은 아주 조그마한 방 한 칸짜리 여관삯도 제법 셉니다. 작은 땅뙈기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살아가니 비쌀밖에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습니다. 옷을 갈아입습니다. 이를 닦습니다. 가방을 멥니다. 영차 하고 소리를 내고는 걷습니다. 한참 걷다 보니 대추나무가 나옵니다. 나는 서울에서도 나무를 보고 싶기 때문에, 서울 한복판 골목을 걸어서 전철역으로 가는 길에도 대추나무를 만납니다. 살짝 걸음을 늦춥니다. 멈추지는 않고 아주 느긋하게 천천히 거닐면서 대추나무를 바라봅니다.


  아이들과 이 길을 걸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대추나무한테 한 마디 물었겠지요. 얘, 네 열매 한 톨 따서 우리 아이한테 줘도 될까?



.. 햇볕 따뜻한 봄날 토요일 오전 일 마치고 퇴근하는 길 낡은 아반떼 승용차 한 대 마산 봉암 공단 해안 길을 씽씽 달리는데, 숭어 떼가 은빛 비늘 반짝이며 장단 맞추듯 숭숭 치솟는다 ..  (기찬 날)



  빗방울이 듣습니다. 빗물은 가늘게 톡톡 내 안경과 머리와 어깨를 건드립니다. 아니, 빗물은 내 몸에 닿으면서 인사를 합니다. 여 봐, 서울마실은 잘 했나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고흥에 있는 우리 세 식구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버지를 목 빼며 기다리는 두 아이 이야기를 알려줍니다.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울기도 하다가 그림도 그리다가 마당에서 뛰놀다가 노래를 부르는 어린 두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서울을 벗어나려는 시외버스는 이 길 저 길 달립니다. 서울 한복판 골목을 거닐 적에는 대추나무 한 그루 겨우 만났는데, 서울을 벗어나려는 ‘자동차 전용도로’에는 이쪽과 저쪽으로 나무가 있습니다. 와, 사람들 걷는 자리에는 없는 나무가, 자동차만 오가는 데에 우거졌구나.



.. 이력서를 당당히 내밀던 때가 있었다 / 이때만 해도 사람이 기계를 돌렸다 // 사람이 기계를 돌릴 때만 해도 / 공장 화단에 핀 벚꽃은 / 내 마음 들뜨게 했고, // 점심시간이면 그리운 이에게 / 분홍색 편지를 쓰기도 했다 ..  (이때만 해도)



  서울 시내를 벗어나려 하던 시외버스는 한참 느릿느릿 기었습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차츰 멀어질수록 시외버스는 빨리 달립니다. 이제 서울에서 꽤 벗어났다 싶으니, 시외버스는 거침없이 달립니다.


  버스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봅니다. 서울이 되고 싶은 다른 도시들이 아파트를 새로 짓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 높지 않은 멧자락을 휘감는 아파트를 바라봅니다. 구름은 멧봉우리에 걸렸는지 아파트 꼭대기에 걸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시외버스 아재는 라디오를 틀며 버스를 몰다가 라디오를 조용히 끕니다. 그저 조용히 버스를 몹니다. 차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리고, 손전화 만지작거리는 사람들 소리가 퍼집니다. 나는 가만히 두 눈을 감고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길과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품이 얼마나 넓거나 따스한가 하고 곱씹습니다.



.. 누가 피아노를 치고 있는가 / 세상 처음 소리처럼 맑아 / 마음이 다 녹아내리는 // 누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가 /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 바람 같은 ..  (망치의 노래)



  생각해 보면,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웃는 얼굴인 이웃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모두 도시로 보낸 시골 할매와 할배는 늘 고단한 몸짓으로 농약을 치고 비닐을 씌우며 경운기를 몹니다. 둘이 시골에 남아 살림을 꾸리는 할매와 할배는 들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아이고 에고 아유 헉헉 하는 한숨과 외마디소리를 낼 뿐입니다.


  도시로 온 아이들은 무럭무럭 커서 어른이 됩니다. 이녁 짝꿍을 도시에서 사귑니다. 한국도 연변도 중국도, 아마 일본도 그러할 텐데, 시골에 눌러살면서 짝꿍을 만나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시골에는 젊은이가 남아나지 않아요. 시골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는 아이들은 왜 아직도 도시로 못 갔느냐는 눈치를 받습니다.


  그러면, 도시로 온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놀까요. 도시로 와서 어른이 되어 돈을 버는 어른들은 노래잔치를 누리면서 살림을 가꾸는가요.



.. 빗방울 소리 들으며 마음 가다듬어 보지만 / 반쯤 비우다 만 술잔에도 빗방울이 떨어진다 / 반쯤 비우다 만 밥그릇에도 빗방울이 덜어진다 / 반쯤 비우다 만 국그릇에도 빗방울이 떨어진다 ..  (빗방울이 떨어진다)



  표성배 님 시집 《기찬 날》(애지,2009)을 읽습니다. 표성배 님 삶이 묻어나고, 표성배 님 목소리가 진득한 시집을 읽습니다. 표성배 님이 시 한 줄에 담아서 우리한테 들려주고 싶은 노래를 듣습니다.


  아, 노래입니다. 예쁜 노래입니다.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들려주는 노래입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 얼굴에 주름이 살짝 잡히려는 아저씨가 가만히 들려주는 노래입니다.



.. 비 갠 하늘이 참 파랗다 // 공장 야적장 바닥 여기저기 / 발자국만 한 웅덩이에 빗물이 고여 있다 // 고인 물가에 / 잠자리 한 쌍 나란히 앉아 데이트 중이다 / 크르릉 크르릉 탱크 소리를 내며 / 트랜스포트가 지나간다 ..  (참 미안하다)



  시외버스 아재는 다시 라디오를 켭니다. 버스 창문 바깥으로 송전탑이 나옵니다. 송전탑은 멧자락을 넘습니다. 송전탑은 들을 가로지릅니다. 송전탑은 시골마을 비닐집 위로 지나갑니다. 송전탑은 시골에도 있는 아파트 옆으로 지나갑니다.


  이 나라 곳곳에 송전탑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송전탑을 더 박으려 합니다.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일입니다. 얼마 앞서까지, 꽤 많은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이 나라 골골샅샅에 때려박은 쇠말뚝을 뽑는다고 부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 사람들은 아직 쇠말뚝을 다 뽑지도 못했으면서, 더 무시무시하고 커다란 쇠말뚝인 송전탑을 끝없이 박습니다. 돈을 들여 박고, 사람을 죽이면서 박으며, 마을을 짓밟는 짓까지 서슴지 않으며 박습니다.



.. 손에 땀이 난다 // 여보! 그러고 보니 당신과 편안한 여행 한번 하지 못했소 // 얘들아! / 너희들과 숲길 한번 조용히 걸어본 적 없었구나 ..  (부치지 못한 편지)



  쇠말뚝으로 춤을 추는 이 나라에는 어떤 시가 있을까요. 쇠말뚝이 넘실거리는 이 나라에서는 누가 어떤 노래를 부를까요. 날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쇠말뚝잔치이니까, 쇠말뚝 노래를 부르면 될까요. 쇠말뚝을 기리는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면 될까요. 우리는 쇠말뚝 박는 일로 ‘청년 일자리 창출’을 하지는 않나요. 젊은이한테 쇠말뚝 박는 일을 시키면서 돈을 주고, 젊은이한테 시골 할매를 때리는 짓을 시켜서 돈을 주지는 않나요.


  시외버스를 너덧 시간 달려도, 이 나라에서 우람한 나무를 못 만납니다. 이 나라에는 아름드리로 아름다운 나무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나무를 심지 않고, 나무를 아끼지 않는 이 나라에는 어디에나 그예 쇠말뚝입니다. 그러면, 이녁은 쇠말뚝을 품에 안으면서 노래할 수 있나요? 대통령은 쇠말뚝 곁에 집을 짓고 오순도순 살 수 있나요? 4347.9.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