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4년 9월 21일에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열리는 '책방은 도시를 가꾸는 숲'이라는 좌담회에서 쓸 발표글입니다. 다음달에 쓸 발표글이지만, 나 스스로 이 글을 띄워 놓아야 그때에 안 잊고 챙길 수 있으리라 여겨, 걸쳐 놓습니다. 다음달 9월 21일에 부산 헌책방골목으로 나들이를 오실 수 있는 분들은, 즐겁게 찾아와서 좌담회에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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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은 도시를 가꾸는 숲


  책방이 한 곳 있는 마을과 책방이 한 곳도 없는 마을은 사뭇 다릅니다. 도시라면 자동차를 몰거나 버스라든지 전철을 타고 제법 멀리까지 책방마실을 할 텐데, 시골에서는 가까이 드나들 책방이 없습니다. 시골에서는 아름다운 숲과 들과 멧골과 바다와 냇물을 누리면 된다고 할 만하니, 책이나 책방이 없어도 괜찮다고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도시는 어떠할까요. 도시에는 극장과 찻집과 술집과 옷집과 백화점과 갖가지 맛집이 있으면 될까요. 책방 하나 없는 도시를 세우고, 책방 하나 없이 아파트와 큰 건물을 줄줄이 세우면 될까요.

  나라에서는 고속도로를 닦거나 발전소를 짓거나 새로운 도시를 만든다며 아파트를 올리는 데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들입니다. 그러나, 책방 한 곳 건사하려고 들이는 돈은 아예 없습니다. 다만, 공공도서관은 꾸준히 늘립니다.

  도서관에서 모든 책을 다 빌려서 읽을 수 있어도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굳이 집에 책을 두기보다는, 가까운 도서관에 모든 책이 다 있어서 언제라도 넉넉히 책을 빌려서 읽을 수 있어도 아름답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에 있는 도서관은 사진책이나 그림책(어른이 보는 그림책과 어린이가 보는 그림책 모두)이나 만화책은 갖추지 않습니다. 한국에 있는 도서관은 문학책과 인문책을 살펴서 갖춥니다. 어린이책은 따로 어린이책 도서관에 가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새벽 일찍 열거나 밤 늦게 여는 도서관이 없습니다. 도서관 일꾼을 넉넉히 두어 스물네 시간 불을 밝히는 도서관이 없지요.

  책방은 책을 사고파는 구실만 하지 않습니다. 책방이 있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갖추지 않는 책’을 만납니다. 책방이 있기 때문에 ‘새로 나오는 책’을 더 빠르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책방이 있기 때문에 ‘틈나는 대로 자주 빌려서 볼 만한 책’을 즐겁게 장만해서 언제나 집에 갖출 수 있습니다.

  우리가 책을 장만해서 읽는다고 할 때에는 ‘한 번 읽은 뒤 다시는 안 펼칠 책’을 장만하거나 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번 읽은 책을 다시는 안 볼’는지 몰라요. 한 번 읽었으니 다 되었다고 여겨 헌책방에 내놓을 수 있어요.

  한 번 읽고 그칠 책이라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도 됩니다. 그러나 더 헤아려 본다면, 한 번 읽고 그칠 책을 도서관에서 꼭 갖춰야 하는가 하고 궁금해 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도서관은 ‘대여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서관은 책을 오래도록 건사하면서 지키려는 곳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우리가 책방마실을 하면서 책을 장만한다고 할 때에는, 두고두고 되읽을 책을 산다는 뜻이요, 아이들한테 물려주고 싶은 아름다운 빛을 만난다는 뜻입니다.

  책방이 한 곳이라도 있는 마을과 책방이 한 곳조차 없는 마을은 아주 다릅니다. 책방이 조그맣다 하더라도 한 곳이라도 있다면, 이 마을은 ‘아이들한테 물려줄 선물이 될 책’을 갖춘 쉼터나 만남터나 모임터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책방이 한 곳조차 없다면? 말 그대로입니다.

  책방이 한 곳이라도 있는 마을이란, 책뿐 아니라 다른 슬기로운 빛을 아이들한테 물려주려는 어른들이 씩씩하고 힘차게 마을살림을 가꾼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그러니까, 마을빛을 가꾸면서 마을살림을 북돋우려 한다면, 마을에는 아주 조그마한 책방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한 곳은 있어야 합니다.

  책이란 무엇일까요? 한 번 읽고 나서 다시 안 읽는 종이꾸러미도 ‘겉보기로는 책’입니다만, 참된 이름으로 ‘책’을 말해 본다면, 책이란 사람이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동안 가장 아름답고 환하게 밝힌 슬기로운 빛을 담은 이야기꾸러미입니다. 숲에서 자라는 나무를 베어 종이를 빚은 뒤, ‘나무에서 탈바꿈한 종이’에 이야기를 적바림할 때에 책이 됩니다.

  마을에 책방이 한 곳이라도 있다고 할 적에는, 마을살림을 가꾸고 마을빛을 밝히는 슬기를 더욱 북돋우거나 살찌울 밑거름이 되는 ‘책’이 있다는 뜻입니다. 마을사람 스스로 책을 장만해서 읽으면서 스스로 새롭게 거듭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을사람 스스로 아름다운 책을 함께 장만해서 읽으며 늘 즐겁게 새로운 빛을 배우고 나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책방은 왜 도시를 가꾸는 숲이 될까요? 책방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름다운 책을 알아볼 뿐 아니라, 아름다운 책을 펴낸 작가와 출판사한테 힘을 보태어 줄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책을 한 권 장만하면, 이 아름다운 책을 쓴 사람과 펴낸 사람은 기쁘게 일삯을 벌어요. 아름다운 눈길로 알아본 책 하나는, 아름다운 손길로 이어지고, 아름다운 마음길로 서로 다리를 놓는 사이, 어느새 마을과 마을이 어깨동무하면서 지구별이 사랑스럽게 빛날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나 새 찻길을 닦아야 하더라도, 공사비 가운데 1/1000쯤은 ‘마을에 책방 한 곳 지키도록 하는 돈’으로 쓸 수 있기를 빕니다. 공장을 짓건 발전소를 짓건 골프장을 짓건 백화점을 짓건 무엇을 하건, 중앙정부와 지역정부 모두 공사비 가운데 1/1000쯤은 ‘마을 헌책방’과 ‘마을 새책방’이 함께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돕는 돈으로 쓸 수 있기를 빕니다. 마을마다 책방이 싱그럽게 살아나야 마을이 스스로 살아날 수 있습니다. 4347.8.1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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