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언어 정책과 자국어 보호 정책의 만남
피터 로드니 외 지음 / 피어나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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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80



쉽게 안 쓰면 말이 아니다

― 쉬운 언어 정책과 자국어 보호 정책의 만남

 피터 로드니·에바 올롭손·베네딕트 마디니에

 이건범·이상규·김슬옹·김혜정·이현주·김영명

 피어나 펴냄, 2013.12.16.



  쉽게 쓰는 말이 말입니다. 쉽게 안 쓰는 말은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쉽게 안 쓰는 말도 그냥 말이라 할 수 없는 까닭이 있을까요?


  쉽게 안 쓰는 말은 폭력이나 권력입니다. 쉽게 안 쓰는 말은 이웃이나 동무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말을 어렵게 쓸 일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어렵게 비비 꼬아서 못 알아듣도록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랑을 담는 노래를 내 이웃이 곧바로 느끼고 알아차릴 수 있도록 부르지, 아무도 못 알아듣도록 사랑노래를 부를 일이 없습니다.


  동무를 해코지하거나 따돌리려 하기에 어렵게 말을 합니다. 지식으로 권력을 쌓기에 어렵게 말을 합니다. 한편, 어렵게 쓰는 말은 폭력일 뿐입니다. 한자를 부려서 쓰든 영어를 섞어서 쓰든, 한자나 영어를 모르는 사람한테 한자나 영어를 함부로 쓰는 말은 그저 폭력입니다. 왜냐하면, 한자나 영어를 모르는 사람한테 이런 말을 자꾸 쓰는 일은 사랑이 아니니까요.



.. 한국의 근대 지식인들은 일본을 거쳐 번역된 서양의 근대 학문을 받아들였으므로 일상생활 용어와 전문용어는 전통적인 한자어 낱말과도 달랐다. 일본식 한자어 낱말이 지식과 정보의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 이 한자어 낱말이 일상의 삶과 동떨어진 어려운 말이었기에 지식인층과 일반 국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한자를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아직까지 기세를 떨치고 있다 ..  (8∼9쪽)



  아직 한국 사회에서 공문서가 무척 어렵습니다. 정치꾼은 언제나 ‘서민’을 읊지만, ‘서민’이란 낱말부터 흐리멍덩합니다. ‘서민인 사람’이 ‘서민’이라는 한자말을 알까요? ‘서민이 아닌 사람’이 ‘서민’이라는 한자말을 쓰면서 자꾸자꾸 더 울타리를 높게 쌓지 않는가요?


  동사무소나 면사무소에 가서 등본을 하나 뗄 적에 써야 하는 문서를 보아도, 무척 딱딱하고 까다롭습니다. 출생신고서나 혼인신고서 서식은 아직도 많이 어렵습니다. ‘차상위계층인 사람’이 ‘차상위계층’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있을까요? ‘기초생활수급자인 사람’이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이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만할까요? 기초연금이든 복지기금이든 신청할 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어서 쉽게 서류를 낼 수 있도록 쉬운 글로 서식이 있는지 무척 궁금해요.


  공무원들은 ‘비수급 빈곤층’이라는 말을 쓰고, 지식인은 ‘하우스 푸어’라는 말을 쓰는데, 이런 말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면서 쓰는 말인지 궁금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얼마나 헤아리기에 이런 말을 지을까요. ‘집 없는 이웃’을 얼마나 생각하기에 이런 말을 지을까요. ‘시각 장애인’이나 ‘청각 장애인’ 같은 낱말은 어떤 지식인이나 공무원이 어떤 마음으로 지었을는지 무척 궁금하기도 해요. 왜 이렇게밖에 말을 쓸 줄 모를는지 참으로 궁금한 노릇입니다.



.. 1970년대 영국에서는 공공정보를 전달받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져 갔다 … 이들 기관이 보내는 정보는 무척 중요했으나 읽어도 무슨 뜻인지 불분명하기 일쑤였다 … 국민에게 전해져야 하는 정보 대부분은 애매한 말과 전문용어 범벅이었고 관료적 표현 천지였다 많은 사람이 이런 상황을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가 단념하고 말았다. 정부와 대기업에게 국민과 소통하는 방법을 바꾸라고 설득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뼈저리게 느끼고서 물러섰던 것이다 … 법률 문서는 수백 년 동안 전통이라는 미명 하에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낡은 문체를 하나도 손대지 않고 유지해 왔다 … 법률가에게 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특정 법률용어를 고집하는가라고 캐물으면 법정에서 ‘무수히 사용되었고 검증되었다’는 변명을 듣게 된다. 달리 말해, 판사는 너무나 오랫동안 특정 법률용어에 특정 의미가 담겼다고 믿어 왔기에 거기서 벗어나는 용어는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  (17, 18, 19, 37, 46쪽)



  말은 언제나 내 삶에 따라 흐릅니다. 내 삶이 포근하거나 따사롭다면 내 말은 포근하거나 따사롭습니다. 내 삶이 고단하거나 힘들다면 내 말은 고단하거나 힘듭니다. 나 스스로 삶을 넓고 깊게 바라본다면 내 말은 넓고 깊을 테지요. 내 삶이 쳇바퀴 돌듯이 얽매인 굴레라 한다면 내 말도 쳇바퀴 돌듯이 얽매인 굴레입니다.


  오늘날 초등학교 교과서를 살피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쓰는 낱말하고 거의 비슷합니다. 1990년대로 접어들기 앞서까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쓰는 낱말은 되도록 ‘쉽고 바르며 아름답게’ 손보려고 했다고 느낍니다. 다만, 이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많이 모자라거나 아쉬웠지만, 적어도 초등학교 교과서만큼은 이 나라 아이들이 쉬우면서 바르고 아름답게 한국말을 익히도록 이끌려고 했어요.


  이제 오늘날 초등학교 교과서는 아이들한테 한국말을 제대로 가르치거나 보여주지 않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한자 지식을 외우도록 내몰 즈음부터 한국말은 그야말로 뒤죽박죽 엉터리로 지나칩니다. 한국말이 어떤 말인지 보여주지 못하고, 한국 말법과 말투와 말씨와 말결이 어떠한가를 슬기롭게 밝히지 않습니다. 대학입시지옥인 중·고등학교와 발을 맞추려는 초등학교 교육입니다. 쉬운 말도 바른 말도 아름다운 말도 아닌, 오직 시험문제와 얽힌 지식으로 가득한 얼거리에 갇히는 교과서요 학교이며 교육이고 문화입니다.



.. 스웨덴 정부가 언어학자와 협력하여 이 캠페인을 이끌었다. 이 캠페인이 추구한 분명하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는 당시에 한창 진행 중이던 민주화 과정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 자국어의 포기는 비영어권 국가들의 교육의 질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할 뿐 아니라 별도의 매개 수단이 없이는 과학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일반 대중들의 지식 접근을 차단하는 결과를 낳는다 ..  (125, 185쪽)



  《쉬운 언어 정책과 자국어 보호 정책의 만남》(피어나,2013)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한글문화연대에서 무척 힘을 써서 뜻있는 모임자리를 한국에서 마련했고, 영국와 스웨덴과 프랑스에서 뜻있는 이들이 찾아와서 뜻있는 이야기를 이녁 나라 말로 들려주었습니다.


  나라에서 말을 쉽게 쓰려고 할 때에 비로소 민주와 평화와 복지가 살아난다는 대목을 읽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말을 쉽게 쓰도록 북돋우고 애쓰면서 어깨동무를 할 때에 비로소 평등과 사랑과 두레가 이루어진다는 대목을 엿봅니다.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나라에서 어려운 말을 쓰면 어찌 될까요? 나라에서 일제강점기 찌꺼기 한자말을 자꾸 쓰면 어찌 될까요? 공공기관과 여느 회사와 학교에서 올바르지 않고 알맞지 않으며 아름답지 않은데다가 슬기롭지도 않은 말을 자꾸 쓰면 어찌 될까요?


  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은 생각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생각을 담아낼 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말을 슬기롭게 가꾸지 못하는 사람은 삶을 슬기롭게 가꾸지 못합니다. 말과 넋과 삶이 서로 맞물리지 못하면서 엇갈리는데, 어느 하나 제대로 엮지 못합니다.


  그러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요. 예전에 국립국어원 원장으로 있던 이상규 님은 스스로 국립국어원을 나무라는 말을 합니다.



.. 첫째, 《표준국어대사전》은 매우 조급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기존에 나온 많은 사전들의 올림말과 뜻풀이를 수작업으로 조합한 사전이다. 따라서 기존의 개인이나 출판사에서 만든 사전 대부분이 일본 사전을 대거로 베껴 온 것이 그대로 《표준국어대사전》으로 이어진 악순환을 극복하지 못했다. 특히 전문용어는 일본의 《광사원》을 아무런 여과 없이 그대로 베껴 온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니다. 혹평을 하자면 ‘표절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 (348쪽)



  이러한 이야기는 이상규 님이 국립국어원에서 원장을 맡기 앞서 여러 사람들이 꾸준히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날 국립국어원(국립국어연구원)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하나도 안 받아들였습니다. 게다가 아직도 꽤 많은 한국사람은 한국에서 나온 적잖은 ‘국어사전(한국말사전이 아닌 ‘국어’사전)’이 ‘일본사전’을 베낀 줄 모를 뿐 아니라, 일본사전을 베낀 탓에 ‘한국사람이 안 쓰는 한자말이 잔뜩 실려’서 ‘마치 한국말은 얼마 없고 한자말이 많은’ 줄 여기기까지 합니다.


  일본에서 조금 공부를 했다거나 일본책을 조금 살폈다면 알리라 생각합니다. ‘콘사이스’라는 이름을 붙인 사전은 일본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에는 ‘콘사이스’ 사전이 있어요. 한국말 가운데 한자말이 2/3라느니 몇 퍼센트라느니 하는 통계는 모두 거짓이요 엉터리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사전을 베끼거나 훔쳐서 ‘국어’사전을 만들었으니 한자말이 엄청나게 많이 실릴 수밖에 없었거든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현대 사회로 접어든 뒤 한국사람은 아직 한국말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제대로 배운’ 적도 없으나 ‘배운’ 적조차 없습니다. 학교에서 ‘국어 교육’은 하지만 ‘한국말을 가르치거나 배우’지는 않습니다. 입시 과목 가운데 하나로 ‘국어’만 다룰 뿐입니다. 거의 모든 한국사람은 한국말이 아닌 ‘국어’를 시험 과목으로 외운 채 이야기(의사소통)를 나누고 글을 쓰고 말을 합니다. 이리하여 온갖 일본 말투와 일본 한자말과 번역 말투와 영어가 어지럽게 뒤섞입니다. 이렇게 어지럽게 뒤섞인 어설픈 말이 어지러운 줄 모르고 어설픈 줄 깨닫지 않으면서, 그냥저냥 ‘의사소통’을 합니다. 그냥저냥 문학을 하고 그냥저냥 기사를 쓰고 책을 내며 그냥저냥 학문을 하고 과학을 합니다.



.. 이들이 낸 소원의 핵심 내용은 공문서 작성에서 한글을 전용토록 한 국어기본법이 한자 문화를 누릴 수 있는 행복 추구권을 침해하고 있으며, 교과용 도서에 한자를 싣지 못하게 함으로써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의 학습권과 부모의 자녀교육권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원 청구인들 가운데 시장에서 배추를 팔고 어물전에 생선을 파는 이웃 사람이나 시골 농촌에서 열심히 일하는 평범한 분들의 이름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들 이름 깨나 알려진 인사들이다. 소송 제기를 한 분들은 모두 자기의 눈높이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분들이 아닐까? 아직 입시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한 초·중·고 학교 아이들이 영어, 수학 등 과도한 학습 분량에 시달리고 있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자 교육을 부활함으로써 부과될 학습량은 얼마나 늘어날까? 학생들을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지난 조선조 선비들은 평행을 한문 공부를 해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한문 원전을 조금이라도 읽어 본 분이라면 한자 몇 자 가르친다고 세상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 알 수 있는데 말이다 ..  (323쪽)



  이 나라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자라면서 어떤 사람이 될 때에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나라 아이들이 앞으로 입시지옥에 사로잡혀서 시름시름 앓다가 취업전쟁에 휘둘리면서 거듭 시름시름 앓아야 하겠습니까. 이 나라 아이들이 스스로 아름다운 꿈을 사랑스럽게 품으면서 환하게 웃고 노래할 수 있는 터를 이루어야 하겠습니까.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말을 쉽게 써야 합니다. 어른인 나 스스로를 사랑한다면 말을 날마다 새롭게 익히면서 삶을 새롭게 사랑하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어려운 말로는 모든 일이 그저 어려울 뿐이고 가로막힙니다. 쉬운 말로는 모든 일이 술술 풀리듯이 쉬우면서 활짝 열립니다. 마음을 열고 말을 살찌우면 됩니다. 가슴을 열어젖히면서 말꽃이 피어나게 북돋우면 됩니다. 4347.8.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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