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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디자인
하라 켄야 지음, 민병걸 옮김 / 안그라픽스 / 2007년 2월
평점 :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75
삶을 바라보는 삶
― 디자인의 디자인
하라 켄야 글
민병걸 옮김
안그라픽스 펴냄, 2007.2.27.
도시로 마실을 나와 아이들과 움직입니다. 개구지게 뛰논 아이들이 까무룩 잠들어 가슴으로 안고 걸어다닙니다. 길을 걸어갈 적에 ‘잠든 아이를 안은 사람’이 앞에 있어도 툭 치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잠든 아이를 안은 사람’을 알아보고는 옆으로 비켜서 자리를 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처 알아채지 못해 툭 쳤다고 느껴 미안하다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툭 치고도 쳐다보지 않으면서 휘 지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낫거나 나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삶이 다르고, 삶이 다른 만큼 생각이 다르며, 생각이 다르기에 마음이 다릅니다. 대통령이나 시장·군수를 뽑는 선거에서 이쪽한테 표를 주든 저쪽한테 표를 주든, 사람으로서는 모두 같아요. 그저 어느 한쪽에 마음이 갈 뿐입니다.
도시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도시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살핍니다. 신문사와 방송사는 모두 도시에 있습니다. 출판사도 거의 모두 도시에 있습니다. 신문과 방송과 책은 으레 도시 이야기를 다룹니다. 일터도 삶터도 놀이터도 도시인 만큼, 도시와 얽힌 이야기가 아니면 다루지 않습니다. 도시가 아닌 곳 이야기를 다룰 적에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느끼지도 않습니다.
시골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시골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헤아립니다. 시골에는 책방도 드물고 텔레비전 들여다볼 일도 드물며 전철도 없고 쇼핑센터나 백화점도 극장도 없습니다. 시골사람은 흙을 밟거나 시멘트로 덮은 도랑을 보거나 숲을 보거나 하늘을 보거나 새와 풀벌레를 봅니다. 시골사람한테는 흙과 풀과 나무와 냇물과 빗물과 햇볕이 대수롭습니다. 늘 곁에 있는 것을 사귀면서 돌아봅니다.
.. 디자인이란 물건을 만들거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생생하게 인식하는 것이며, 뛰어난 인식이나 발견은 생명을 지니고 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으로서의 기쁨과 긍지를 갖게 해 준다 … 일본의 산업 디자인을 자세히 살펴보면 생활문화 쪽이 아니라 경제라는 목표를 향하고 있다 … 기묘한 것을 만들어 내는 것만이 창조성이 아니다. 익숙한 것을 미지의 것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 감성 또한 똑같은 창조성이다 .. (10, 20, 33쪽)
예부터 누구나 ‘흐르는 물’을 마셨습니다. 흐르는 물을 받아 밥을 짓습니다. 흐르는 물에 옷을 담가서 빨래를 합니다. 흐르는 물에 뛰어들어 몸을 씻습니다. 예부터 ‘흐르는 물’을 누리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옛날부터 누구나 ‘흐르는 바람’을 들이켰습니다. 흐르는 바람으로 목숨을 건사하고, 흐르는 바람을 쐬며 시원하다고 느꼈으며, 흐르는 바람을 따라 날씨와 철을 살폈습니다. 옛날부터 누구나 바람을 눈여겨보았습니다.
오늘날 도시에서는 흐르는 물도 흐르는 바람도 누리지 않습니다. 아니, 도시라는 곳에서는 흐르는 물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좁은 곳에 몰려들다 보니, 흐르는 물로는 목이 말라 죽을는지 모릅니다. 도시라는 작은 곳에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왁자지껄 부산스러우니, 흐르는 바람으로는 숨이 막혀 죽을는지 모릅니다.
어떤 삶을 누리는 하루일까요. 어떤 삶을 누리려고 돈을 벌거나 학교에 다닐까요. 이웃과 나는 어떤 삶을 누리면서 생각을 밝힐까요. 우리 식구는 저마다 어떤 삶을 누리고픈 꿈을 키울까요.
.. 별것 아닌 작은 한마디에도 커뮤니케이션의 씨앗이 숨어 있다 … 말하자면, 정보를 다음 글줄로 연결하는 차원이 아니라, 정보를 소중히 하겠다는 관점에서 책의 매력을 의식하고 있다 … 노동력이 싼 나라에서 만들어 비싼 나라에서 팔자는 발상에는 영속성이 없다 … 일본의 미의식은 주변에 있으면서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예지가 만들어 낸 것이다 .. (50, 110, 119, 172쪽)
지난날에는 시골살이를 하며 쓰레기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시골에서 쓰레기가 나올 일은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시골살이를 하더라도 쓰레기가 많습니다. 비닐과 농약과 비료를 잔뜩 쓰니까, 비닐쓰레기가 해마다 넘치고, 빈 농약병과 빈 비료푸대가 널브러집니다.
예나 이제나 도시에서는 쓰레기가 나옵니다. 도시에서는 쓰레기를 건사할 길이 없습니다. 공장에서 만드는 물건은 모두 쓰레기가 됩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 적에 늘 쓰레기가 뒤따릅니다. 공장은 물과 바람과 흙을 더럽힙니다. 공장은 물과 바람과 흙을 더럽히면서 돈을 법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돈을 버는 모든 일은 쓰레기를 내놓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쓰레기가 될 것을 만들면서 돈을 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을 벌려고 하지 않을 때에는 쓰레기를 내놓지 않습니다. 돈과 쓰레기는 언제나 함께 있는 셈입니다. 시골에서 비닐과 농약과 비료를 왜 쓰느냐 하면, 돈을 벌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공장과 고속도로와 발전소를 왜 만들까요. 돈을 벌려고 만들지요. 경제개발은 왜 할까요. 돈을 벌려고 하지요. 아이들을 왜 대학교에 넣으려고 하나요. 돈을 벌라고 그러지요.
삶을 일굴 적에는 쓰레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삶을 지을 적에는 쓰레기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삶을 가꿀 적에는 우리 삶터와 일터와 쉼터 모두 아름답게 빛나고 푸르게 우거집니다. 그러니까, 삶을 일구지 않고 돈을 일구면 쓰레기와 가깝습니다. 삶을 일구는 사람은 사랑을 일구고, 사랑을 일구면서 생각과 마음을 일구며, 생각과 마음을 일구기에 삶이 빛날 수 있습니다.
.. 감각이 뒤떨어진 나라에서 정밀한 마케팅을 한다면 감각적으로 뒤떨어진 상품이 만들어지지만 그 나라에서는 잘 팔린다. 감각이 좋은 나라에서 정밀한 마케팅을 하면 감각적으로 뛰어난 상품이 만들어지고 그 나라에서도 잘 팔린다 … 자연과 만난다는 것은 ‘기다림’이며, 기다림에 의해서 어느새 자연의 풍요가 주변에 충만해진다 … 미래의 비전을 마련하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흥행’을 계획한다는 발상은 이제 그만 버리는 편이 좋다. ‘마을 부흥’ 같은 단어가 한때 유행했던 적이 있지만, 그렇게 해서 ‘부흥된’ 마을은 무참하다. 마을은 부흥시키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매력은 오로지 풍경과 정감에 달려 있다.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요와 성숙에 진심으로 어울려 그것이 성취된 후에도 ‘홍보’ 등에 연연하지 않고 깊은 숲이나 더운 김 저편에 몰래 숨겨 놓으면 된다. 뛰어난 것은 반드시 발견된다 .. (149∼150, 179, 190쪽)
하라 켄야 님이 쓰고 민병걸 님이 옮긴 《디자인의 디자인》(안그라픽스,2007)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디자인을 디자인한달는지, 디자인을 디자인으로 바라본달는지, 디자인을 생각하는 디자인이랄는지, 디자인을 꿈꾸는 디자인이라 할 만하달는지, ‘디자인’으로 삶을 바라보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 고속도로는 땅속 깊숙한 곳까지 파 내려가 교각을 건설하기 때문에 토지의 지하 수계를 확실하게 분리시킨다 … 환경에 주는 충격이 약한 이벤트는, 공공사업 즉 커다란 토건 공사를 기대하는 지역 경제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 디자이너가 할 일은 정보의 핵심을 누구나 섭취하기 쉬운 상태로 친절하게 정리 정돈해 주는 것이다 …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말을 과거의 것으로 돌리지 말고 그 내용을 진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 (215, 216, 227, 236쪽)
하라 켄야 님은 디자인을 하는 사람인데, 고속도로가 어떤 곳인지 읽을 줄 압니다. 토목건설이 어떤 일인지 살필 줄 압니다. 삶과 숲과 도시와 시골을 읽을 줄 압니다.
한국에서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군수가 되는 이들은 고속도로가 어떤 곳인지 읽을 줄 알까 궁금합니다. 삶과 숲과 도시와 시골을 읽을 줄 아는 정치 우두머리는 몇이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사랑을 읽거나 마음을 읽는 지식인이나 학자는 얼마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돈을 읽는대서 나쁘다고 느끼지 않아요. 돈을 읽으니 돈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삶을 읽으면서 삶으로 나아갑니다. 사랑을 읽을 적에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숲을 읽는 사람은 숲으로 나아가고, 빛을 읽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갑니다. 졸업장이나 자격증을 읽으려 한다면 졸업장이나 자격증으로 나아가려 하겠지요.
마음밭에 품는 씨앗에 따라 삶이 다르게 흐릅니다. 마음밭에 심는 씨앗에 따라 삶이 다르게 자랍니다. 마음밭에 건사하는 씨앗에 따라 삶이 다르게 이루어집니다.
어느 길을 가든 내가 스스로 가는 길입니다. 어느 쪽으로 나아가든 내가 스스로 다스리는 하루입니다. 해가 나면서 아침이 밝고, 바람이 불면서 상큼하며, 구름이 흐르면서 그늘이 생깁니다. 비가 내리면서 숲이 노래하고, 비가 그치면서 꽃송이가 벌어지면서 벌과 나비가 날아다닙니다. 지구별 이웃이 서로 아끼면서 오순도순 사랑을 나누는 길로 나아가리라 믿습니다. 4347.7.1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