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393
유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말하는 시 58



시와 우산

― 오늘 아침 단어

 유희경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1.6.6.



  일산마실을 하면서 송전탑을 봅니다. 곁님 어버이가 지내는 경기도 일산에 있는 조그마한 집 코앞에는 아주 커다란 송전탑이 있습니다. 이 송전탑은 일산 바깥쪽에 있는 논 한복판에 버티고 섭니다. 얼마나 높고 큰지 고개를 위로 한참 쳐들어야 꼭대기를 볼 만합니다. 요즈막에 한전에서 경남 밀양에 박으려 하는 송전탑도 이만큼 클까 하고 헤아려 보곤 합니다.


  전기를 쓸 사람이 많으니 발전소를 짓고 송전탑을 박습니다. 큰도시에 커다란 아파트를 잔뜩 지을 뿐 아니라 온갖 건물이 많으니 발전소도 송전탑도 많아야 합니다. 게다가, 큰도시는 땅값이 비쌀 뿐 아니라 사람들한테 안 좋다고 하니까 시골이나 숲에 발전소를 지으려 하겠지요.


  우리 사회에서 전기를 안 쓴다면 모르되, 전기를 꼭 써야 한다면, 집집마다 전기를 스스로 만들어서 쓸 수 있는 길을 찾아야지 싶습니다. 우리들 누구나 밥을 안 먹는다면 모르되, 누구나 밥을 꼭 먹어야 한다면, 우리 스스로 손수 밥을 지어서(그러니까 씨앗을 뿌리고 보살피며 거두어서) 먹는 길을 찾아야지 싶습니다.



.. 비밀은 비밀이어야 한다고 / 나는 돌멩이처럼 말했다 / 내 말이 굴러가는 소리, / 물이 흔들리는 소리 ..  (深情)



  평화를 바라지 않으니 전쟁을 일으킵니다. 어깨동무를 바라지 않으니 전쟁무기를 만듭니다. 사랑을 키우거나 꿈을 보듬고 싶지 않으니 싸웁니다.


  전쟁으로 이루는 평화는 없습니다. 전쟁무기를 내세우는 어깨동무는 없습니다. 싸우면서 자라는 사랑이나 꿈은 없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이루려면 삶을 어떻게 지어야 할까요. 우리가 전쟁무기를 없애면서 서로 돕고 아끼는 어깨동무를 이루자면 삶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요. 우리가 날마다 즐겁게 사랑하거나 꿈꾸자면 삶을 어떻게 가꾸어야 할까요.



.. 노래는 끝나고 그들이 떠난 뒤 / 술집은 단단히 문을 잠글 테지만 / 끝은 끝내 알 수 없는 것 ..  (어쩔 수 없는 일)



  아침 낮 저녁으로 늘 생각합니다. 내 마음을 살찌울 이야기를 언제나 생각합니다. 내 마음에 심고 내 몸에 담을 낱말을 늘 되새깁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하고 돌아봅니다.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생각하고 ‘사랑’이라는 낱말을 마음에 심습니다. 글 한 줄을 쓰건 아침저녁으로 밥을 짓건, 언제나 사랑이 되도록 하자고 여깁니다.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 나들이를 다닐 적에도 사랑을 떠올립니다. 아이들과 하얀 종이를 펼쳐 그림을 그릴 때에도 사랑을 슥슥 그립니다. 빨래를 해서 마당에 널 적에도 사랑을 헤아립니다. 옷가지를 개고, 아이들 머리카락을 쓸어넘길 적에도 사랑을 품습니다.


  읽을 책을 책방에서 고르면서 사랑을 생각하고, 기쁘게 장만한 책을 손에 쥐어 펼칠 적에도 사랑을 생각합니다.



.. 우산에 대해서라면 오래오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검은빛이고 나는 펼쳐진 시간을 사랑한다 ..  (우산의 과정)



  유희경 님이 내놓은 시집 《오늘 아침 단어》(문학과지성사,2011)를 전철에서 읽습니다. 고흥을 떠난 시외버스가 서울에 닿고, 서울에서 내린 뒤 아이들과 함께 해바라기를 하며 숨을 고르고 나서 전철로 갈아타서 일산으로 가는 길에 시집을 읽습니다. 아이들은 해바라기를 하는 동안 신나게 뛰놉니다. 전철을 탄 뒤에도 이곳저곳 뛰어다니고 싶습니다. 아마 아이들 눈높이로 보자면, 전철에서 멀뚱멀뚱 서서 아무것도 안 하는 어른이 재미없지 싶습니다. 전철에서든 버스에서든 사람들이 가만히 앉거나 서면 따분하지 싶습니다. 노래해야지요. 뛰놀아야지요. 춤을 춰야지요.


  개구진 아이들을 타이르다가 문득문득 생각이 스칩니다. 그래, 전철에서 다 같이 뛰놀면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시외버스이든 시내버스이든, 버스 일꾼과 손님이 저마다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춤을 출 수 있다면, 삶은 얼마나 빛나면서 놀라울까요.


  어른이라는 이들은 왜 양복을 빼입고 회사에 가서 돈을 버는 ‘일’만 할까요. 민소매에 반바지 차림으로 일을 할 수 있을 텐데요. 신분과 계급과 재산을 가르지 말고 서로 즐겁게 얼크러지면서 평화와 평등과 자유와 민주를 누리면 그야말로 기쁠 텐데요.



.. 이곳은 쓸쓸합니다 나를 알아보는 이가 없기 때문이죠 사실 혼자 있고 싶었어요 발바닥을 밟고 걸어가는 것처럼 문득 돌아보아도 여전히 나는 있는 것처럼 이곳에도 들판은 없어요 ..  (보내지 못한 개봉 엽서)



  유희경 님은 ‘우산 이야기라면 오래오래 할’ 수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산의 과정〉이라는 시를 씁니다. 유희경 님은 유희경 님 나름대로 이녁 삶을 빛낼 만한 낱말을 골라서 시집 《오늘 아침 단어》를 선보입니다.


  스스로 빛나기에 삶이 빛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노래하기에 삶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사랑하기에 삶이 사랑스러울 수 있습니다.


  거꾸로, 스스로 골을 내기에 언제나 골부림입니다. 스스로 주먹다짐이기에 이곳저곳에서 싸움과 다툼이 판칩니다. 스스로 쇠밥그릇을 붙잡는다면 이 사회에는 전쟁이 자꾸 불거질 테지요.


  아침에 품은 낱말을 저녁에 거둡니다. 아침에 뿌린 ‘말 씨앗’을 저녁에 갈무리합니다. 아침에 건넨 사랑을 저녁에 받습니다. 아침에 노래한 빛이 저녁에 곱게 퍼집니다. 4347.6.1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