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 일기 58] 뒤꼍에서 만난 실잠자리
― 풀숲놀이
네 식구가 함께 먹을 풀물을 짜려고 풀을 뜯습니다. 풀물을 짜려면 들풀이나 숲풀을 뜯어야 합니다. 농약이나 비료 같은 기운을 아주 조금이라도 받지 않은 풀을 뜯어야 합니다. 풀이 스스로 꽃을 피워서 씨앗을 맺은 뒤 스스로 퍼뜨려서 자라난 풀을 뜯어야 합니다.
지난날에는 시골사람 누구나 풀죽을 쑤어 먹었습니다. 먹을거리가 없어서 풀죽을 쑤어 먹었다 말하는데, 나는 이 말을 달리 느낍니다. 다른 어느 것보다 풀죽이 맛나면서 좋기 때문에 풀죽을 쑤어 먹기도 했다고 느껴요.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풀이 언제나 이웃이요 삶벗입니다. 흙일을 괴롭히는 풀이란 없습니다. 사람 곁에 있는 풀은 언제나 세 갈래예요. 첫째, 사람이 입으로 먹는 풀입니다. 둘째, 사람이 몸에 걸칠 옷을 짜도록 실을 얻는 풀입니다. 셋째, 사람이 그릇이나 바구니로 엮도록 쓰는 풀입니다.
예부터 시골에서는 쓰레기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옛날 시골사람 삶에는 ‘쓰레기’라는 낱말조차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버릴 것이 없던 옛날 시골살이요, 버릴 것이 없던 옛날 시골살이라 할 만하기에, 옛날 시골은 아주 아름답고 깨끗합니다.
세 해 동안 즐겁게 묵힌 뒤꼍 일흔 평 풀숲을 천천히 누빕니다. 스무 가지 즈음 되는 풀을 뜯습니다. 온갖 풀이 저마다 얼크러져 자라니, 온갖 딱정벌레가 우리 집 뒤꼍 풀숲에서 자랍니다. 나는 온갖 풀을 기쁘게 얻으며 풀물을 짭니다. 이런 풀 저런 풀 기쁘게 뜯어 바구니에 담아서 부엌으로 가려는데, 실잠자리 한 마리 살랑살랑 바람 타고 날아서 내 앞에 앉습니다. 하늘빛 몸통과 꼬리로 춤추는 실잠자리입니다.
걸음을 멈춥니다. 숨을 고릅니다. 이 아이는 제 고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나타났구나 싶습니다. 싱그러운 풀숲에서 노닐며 누린 맑은 빛을 알려주고 싶어서 나왔구나 싶습니다. 학술이름으로는 ‘푸른아시아실잠자리’라 하는데, 내 눈앞에 나타난 이 실잠자리 몸빛은 ‘하늘빛’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 뒤꼍에서 만난 실잠자리한테 ‘하늘실잠자리’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풀숲에서 풀을 뜯으며 놉니다. 딱정벌레하고 놀다가 실잠자리하고 놉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놀고, 해마다 보송보송 살아나는 흙땅을 밟으며 놉니다. 4347.6.1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고흥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