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29) 존재 129 : 필름 안에 존재합니다


바라보는 동안의 내 마음이 배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필름 안에 존재합니다

《박태희 옮김-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안목,2009) 42쪽


 필름 안에 존재합니다

→ 필름에 있습니다

→ 필름에 깃듭니다

→ 필름에 담깁니다

→ 필름에 스밉니다

→ 필름에 녹아듭다

→ 필름에 갈무리됩니다

 …


  우리 나라에는 크게 두 가지 말이 있다고 느낍니다. 하나는 책이나 학교에서 배우지 않거나 책이나 학교에서는 적게 배운 사람들이 쓰는 말입니다. 둘은 책이나 학교에서 배운 사람들이 쓰는 말입니다.


  책이나 학교에서 적게 배운 사람들은 글을 쓰는 일이 드뭅니다. 책이나 학교에서 많이 배운 사람들은 으레 글을 씁니다. 이 땅에 쏟아지는 거의 모든 책들은 책이나 학교에서 많이 배운 사람들이 쓴 글이 모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적게 배운 사람들은 적게 배운 깜냥껏 말뭉치를 이루어 저마다 생각과 삶과 마음을 주고받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은 많이 배운 깜냥껏 말뭉치를 마련해 저희끼리 생각과 삶과 마음을 나눕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두 갈래 말뭉치가 하나로 모두어지는 일이 없다 할 만합니다. 이러면서 많이 배운 사람들 말뭉치가 적게 배운 사람들 말뭉치를 내리누르거나 밀어내려고 합니다. 적게 배운 사람들 말뭉치는 아이들 말뭉치하고 엇비슷하며 눈높이가 나란하지만, 많이 배운 사람들 말뭉치는 아이들 말뭉치하고 사뭇 다를 뿐 아니라, 아이들을 많이 배운 사람들 말뭉치로 데려가려고 합니다.


  두 갈래 말뭉치 가운데 어느 한쪽이 더 훌륭하거나 더 좋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두 갈래 말뭉치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만 가야 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만, 서로 다른 말뭉치이지만, 두 쪽으로 나누어 선 우리들은 맞은편 말뭉치로 이루어지는 말마디를 어느 만큼은 ‘알아듣’습니다. 서로 모르지 않습니다. ‘앞뒤가 다르다’와 ‘어긋나다’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도 ‘모순’을 알아듣습니다. ‘모순’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도 ‘앞뒤가 다르다’와 ‘어긋나다’를 알아듣습니다. 그렇지만 ‘모순’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뜻은 알아들어도 ‘모순’하고 ‘앞뒤가 다르다’와 ‘어긋나다’는 아주 달라, ‘모순’으로 나타내려고 한 이녁 뜻을 나타낼 수 없다고 여깁니다. “진지 자셨어요?”와 “밥은 먹었니?”라 말하는 사람들도 “식사하셨습니까?”와 “식사는 했니?”라는 말을 알아듣습니다. 거꾸로 보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식사’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진지’와 ‘밥’이라는 낱말로는 이녁 마음과 넋을 담아낼 수 없다고 여깁니다. ‘책’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서적’이라는 말까지는 알아들으나 ‘冊’이나 ‘書’는 잘 못 알아듣습니다. 다 같은 말입니다만, ‘冊’이나 ‘書’나 ‘書籍’은 바깥말입니다. 그런데, 많이 배운 사람들은 ‘冊’이나 ‘書’나 ‘書籍’이라고 적어야 비로소 이녁 얼을 보여줄 수 있다고 여깁니다. ‘책’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도서’와 ‘서적’이라는 말마디도 이런 흐름 때문에 자꾸 쓰입니다.


  이리하여, 이제는 ‘冊’을 넘어 ‘북’과 ‘book’까지 이야기하며, ‘책잔치’라는 말은 아예 안 쓸 뿐 아니라, ‘북페스티벌’과 ‘북쇼’ 같은 새 바깥말을 끌어들입니다. 모두 배운 사람들이 끌어들입니다.


 모든 이야기가 필름에 서립니다

 모든 생각을 필름에 새깁니다

 모든 삶이 필름으로 남습니다

 모든 삶자락을 필름으로 보여줍니다

 …


  우리 삶에 ‘존재’라는 한자말이, 아니 ‘존재’라는 바깥말이 스며든 지는 백 해가 채 되지 않았습니다. 백 해 앞서는 우리 깜냥껏 ‘있다’를 비롯해 수없이 많은 말마디로 우리 넋과 얼을 보여주었습니다.


  지난날 우리들이 쓰던 ‘있다’는 숱한 쓰임새가 있으며 숱한 느낌을 나타냈습니다. 바깥말 ‘존재’는 ‘있다’로 나타내는 숱한 쓰임새 가운데 하나를 또렷하게 나타낸다고 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로서는 ‘있다’ 한 마디로는 두루뭉술하다고 여겼고, 적게 배운 사람들하고 다른 말뭉치를 일구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존재’라는 말마디 쓰임새가 아주 넓어지면서 지난날 ‘있다’를 두루뭉술하게 여겼듯, ‘존재’가 더없이 두루뭉술한 낱말이 됩니다. 이 말마디를 쓰면, 이 자리에서는 이런 뜻과 느낌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뜻과 느낌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제는 ‘있다’라는 낱말은 “테두리가 넓고 쓰임새가 많은” 낱말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쓰는 테두리가 좁고 느낌을 담는 그릇이 작은 낱말이라고 여깁니다.


  아무래도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옳게 배운 적이 없기도 하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들은 하나같이 배운 사람들인 까닭에 이 나라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배운 말에 길들거나 익숙해지는” 흐름을 어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배운 사람들이 교과서를 엮고 교육과정을 꾸립니다. 배운 사람들이 신문을 내고 방송을 찍습니다. 배운 사람들이 인터넷을 휘젓고 배운 사람들이 책을 쏟아냅니다. 토론자리이든 강연자리이든 언제나 배운 사람들 말마디만 쏟아집니다. 동화를 읽는 어른들 모임에서도 배운 사람들이 적게 배운 사람을 가르칩니다. 책을 가르치고 이야기를 가르치고 삶을 가르칩니다. 적게 배웠어도 착하고 바르고 맑게 살아온 사람들 땀방울과 매무새와 발자국을 ‘돌아보거나 헤아리거나 되짚거나 보듬으면서 내 말과 삶과 넋을 알뜰히 추스르는’ 일이란 없습니다.


 내 마음이 뱁니다. 모두 다 필름에 뱁니다

 내 마음이 뱁니다. 모두 다 필름에 들어갑니다

 내 마음에 뱁니다. 모두 필름에 아로새깁니다

 내 마음에 뱁니다. 모두 필름에 짙게 뱁니다

 …


  바깥말 ‘존재’를 쓰는 일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릇된 노릇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엉터리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존재’는 한국말이 아닌 바깥말일 뿐입니다. 낱낱이 따지자면 한자로 이루어진 바깥말입니다.


  우리한테는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바깥말과 한자로 이루어진 바깥말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한국말과 한자로 이루어진 한국말이 있습니다. 한자라서 쓰지 말아야 하거나 알파벳으로 짰기에 나쁘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삶을 얼마나 잘 담아내고, 이 나라 사람들이 누구나 스스럼없이 나누면서 즐겁게 넋과 얼을 가꿀 수 있느냐에 따라서 알맞거나 알맞지 않거나를 헤아립니다.


  어떠한 말이든, 삶으로 받아들이는 낱말이라 한다면, 밑말을 밝히지 않습니다. 밑말을 밝힐 때에는 한국말이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이를테면, ‘버스’는 한국말이지만 ‘bus’는 한국말이 아닙니다. 어차피 같은 소리값이요 같은 말이라지만, ‘버스’일 때에만 우리 말입니다.


  ‘학교’는 한국말이지만 ‘學校’는 한국말이 아닙니다. 다 같은 소리값이라지만, ‘학교’일 때에만 한국말입니다. 이는 ‘신문’과 ‘新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텔레비전’과 ‘TV’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스스로 지식을 자랑할 생각이 아니라면 구태여 “한국말이 아닌 바깥말을 바깥나라 글자를 빌어서 적을”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이면 ‘사진’입니다. 한글로 ‘포토’라 적어도 한국말이 아니며, 알파벳으로 ‘photo’라 적으면 더더구나 한국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바깥말은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합니다.


  나 혼자 적바림하는 일기장이라면 쓰든 말든 내 마음입니다. 그러나 일기장이 아닌 공공기관과 공공매체라면, 또 책이나 신문이라면, 또 학교나 도서관이나 기차역이나 백화점이라면,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이웃들이 ‘어느 말뭉치로 살아가든’ 즐겁고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을 써야 합니다. 마땅한 노릇입니다. 더없이 마땅한 노릇인데, 많이 배운 사람들은 조금도 마땅히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조금도 깊이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예 당신들 많이 배운 그대로 이런 바깥말 저런 찌꺼기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습니다. 스스로 ‘내 말을 죽이는 줄’을 깨닫지 않습니다.


  ‘존재’라는 말 한 마디 쓰고 싶다면, 이 낱말 하나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흘러왔으며 어떻게 스며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알고 배워야 합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한테는 마땅한 몫입니다. 4342.12.30.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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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는 동안 내 마음이 뱁니다. 모든 것이 필름에 깃듭니다


 “바라보는 동안의 내 마음이”는 “바라보는 동안 내 마음이”나 “바라보는 동안 움직인 내 마음이”나 “바라보는 동안 달라진 내 마음이”나 “바라보는 동안 이루어진 내 마음이”로 다듬어 봅니다. “모든 것이”는 “모두”나 “모두 다”나 “모든 이야기가”나 “모든 생각이”나 “모든 삶이”로 손질해 줍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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