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바지 입는 작은아이

 


  칭얼쟁이 꾀쟁이 떼쟁이 같은 이름으로 부르면 참말 아이가 이대로 간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가만히 지켜본다. 어버이로서 골을 부릴 때가 있고, 조용히 눈을 감을 때가 있다. 작은아이가 울고불고 하더라도 바지를 안 입혀 주기도 한다. 아이 스스로 바지를 챙겨 입는 때가 지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냥 입혀 주어도 되지만, 부러 안 입히고 바지를 내밀곤 한다. 똥을 눈 아이 밑을 씻긴 뒤 바지를 스스로 올리도록 한다. 바지를 안 올려 주면 울면서 앙앙거리지만 못 본 척한다. 이럴 때에 으레 큰아이가 달려와서 “왜, 아버지가 바지 안 입혀 줘? 괜찮아, 누나가 입혀 줄게.” 하고 말한다. 벼리야, 네 동생이 스스로 바지를 입도록 하려고 부러 안 입혔는데, 네가 짠하고 나타나서 입히면 네 동생은 앞으로도 혼자 바지를 안 입는단다. 한두 번 큰아이를 타이르지만 그대로 지나치기도 하고, 큰아이더러 동생 옷 입히지 말라고, 동생이 잘 입으니까 지켜보기만 하라고 이르기도 한다.


  네 살 작은아이는 혼자 얼마든지 신을 꿸 수 있다. 그런데 뭔가 귀여움을 받고 싶다든지 마음이 바쁘면 자꾸 신을 신겨 달라 한다. 귀여움과 사랑을 세 사람한테서 받으니 이런 마음이 들까. 막내 자리란 더 귀여움과 사랑을 받는 자리인 터라, 스스로 씩씩하게 서기까지 한결 오랜 나날이 드는 셈일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도움 받는 일이 무슨 대수일까 싶다. 몸이 아픈 사람은 몸이 아프니 쉰다. 쉬면서 밥상을 받는다. 쉬면서 빨래를 쉰다. 아파서 몸져누운 사람더러 일어나서 밥을 차리라 할 수 없다. 몹시 아파 뒷간에 가지 못하고 기저귀를 차야 하는 사람더러 걸레질을 하거나 비질을 하라고 시킬 수 없다. 작은아이는 작은아이대로 더 따순 손길을 받아야 할는지 모른다. 굳이 ‘벌써’ 스스로 바지를 입으라 하지 않아도 될 수 있다. 큰아이가 돌쟁이 무렵에 스스로 바지를 입고 신을 꿰며 단추를 풀고 잠근 모습을 떠올리면 ‘두 아이를 견주는 셈’이 된다.


  아무튼, 작은아이가 제 바지를 사흘에 걸쳐 스스로 입는 모습을 지켜본다.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앞으로도 이처럼 스스로 즐겁게 옷을 입고 뛰놀 수 있기를 빈다. 4347.4.1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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