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뉴욕
E. B. 화이트 지음, 권상미 옮김 / 숲속여우비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책읽기 삶읽기 159

 


작은 책에서 숨쉬는 ‘마을’
― 여기, 뉴욕
 엘윈 브룩스 화이트 글
 권상미 옮김
 숲속여우비 펴냄, 2014.3.17.

 


  봄이 되니 문을 활짝 열고 지냅니다. 겨울 끝자락까지 방문을 꼭꼭 닫으며 찬바람을 막아야 했으나, 봄부터 문을 모두 열고 햇빛을 받아들이고 햇볕을 맞이합니다. 문을 활짝 열고 지내니 낮이 한결 환할 뿐 아니라, 우리 집 둘레를 날아다니는 새들이 들려주는 노래를 한결 또렷하게 듣습니다. 꽤 멀리 떨어진 들에서 깨어난 개구리가 들려주는 봄노래도 들어요.


  따사로운 봄이기에 아이들은 하루 내내 마당에서 뛰놉니다. 마당에서 뛰놀다가 슬그머니 대문을 열고 바깥마실을 합니다. 마을 샘터를 다녀온다든지, 마을 샘터에서 물을 옴팡 뒤집어쓰면서 논다든지, 이웃집을 기웃거린다든지 하며 놀아요.


  아이들한테 우리 마을은 마을이면서 놀이터요 삶터입니다. 아이들한테 우리 집은 집이면서 마을이고 놀이터요 삶터입니다. 아이들한테 먼 이웃 고을이나 고장도 놀이터이고 삶터가 됩니다. 아이들한테 이웃 다른 나라도 이웃집이나 놀이터나 삶터가 됩니다.


.. 시골에서는 날씨의 변화나 우편물을 받는 일 정도가 고작이지, 갑자기 젊어진 기분을 느낄 일이 드물다. 하지만 뉴욕에서는 그럴 기회가 수없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패기가 넘쳐서 (고향 마을을 등지고) 뉴욕에 산다고들 생각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런 패기가 부족해서 여기에 산다. 뉴욕에서는 보호받는 느낌을, 또는 그게 아니어도 쉽게 다른 대용물을 찾을 수 있으니까 … 통근자들은 이 도시에 밀물과 썰물 같은 출퇴근의 번잡함을 주고, 본토박이들은 도시에 견고함과 연속성을 부여하지만, 정착민들은 도시에 열정을 불어넣는다 ..  (28, 29쪽)


  매화꽃이 모두 집니다. 매화꽃이 진 자리에는 꽃받침이 남습니다. 꽃받침이 천천히 시들면서 씨방이 굵겠지요. 머잖아 매화열매가 맺히리라 생각해요. 우리 집 매화나무 옆에는 감나무가 두 그루 있고, 감나무 한 그루 옆에는 무화과나무가 함께 자라며, 다른 감나무 옆에는 후박나무가 나란히 자라요. 처음부터 무화과나무와 후박나무가 감나무랑 얽히지 않았을 테지만, 새가 날라다 준 씨앗으로 마침 그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었지 싶습니다. 뒤곁 감나무와 후박나무 바로 앞에는 갯기름나물이 자랍니다. 해마다 조금씩 퍼집니다. 해마다 몇 잎만 톡톡 끊어서 먹습니다. 더 많이 퍼지면 실컷 즐기고 싶습니다.


  어제는 겨우내 마당에 쌓아 둔 쑥대와 가랑잎을 뒤꼍으로 치웁니다. 겨우내 눈비를 맞은 쑥대는 알맞게 삭은 내음이 납니다. 지난해에 뒤꼍에 심은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 곁에 쑥대를 놓습니다. 알맞게 삭아 흙이 되는 가랑잎도 나무 둘레에 흩뿌립니다. 풀잎과 나뭇잎은 한 해 사이에 이렇게 삭으며 흙이 되는구나 하고 새롭게 깨닫습니다.


  숲에 깃들면 숲내음이 좋은 까닭도 해마다 풀잎과 가랑잎이 새롭게 흙으로 태어나면서 검고 보들보들한 빛이 환하기 때문이겠지요. 사람들이 가꾸는 들도 풀잎과 나뭇잎이 스스로 삭도록 더 마음을 기울이면 한결 기름지고 좋은 흙으로 가득하면서 고소한 내음이 퍼질 테고요.


.. 열차 시간에 맞추려면 뉴욕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무언가를 우연히 만날 일이 없다. 이들은 맨해튼의 지갑을 뒤져 돈을 낚아 왔지만, 맨해튼의 숨소리를 들어 본 적도, 맨해튼의 아침을 맞이한 적도, 맨해튼을 품고 잠이 든 적도 없다. 평일 아침이면 대략 40만의 남녀가 지하철과 지하도 출입구에서 쏟아져 나와 이 섬으로 돌진한다. 이들 가운데, 트레이에 책을 쏟아내는 (옛 물레방아처럼 생긴) 도서승강기가 있는 공공도서관 열람실에서, 참나무에 둘러싸여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리는 근사한 고요 속에 나른한 오휴를 보내 본 사람은 많지 않다 … 맨해튼은 확장할 수 있는 다른 방향이 없기 때문에 하늘로 팽창할 수밖에 없었다 ..  (30, 33쪽)


  오늘 아침에 올들어 첫 거미줄을 봅니다. 나뭇가지나 전깃줄 사이로 집을 짓는 거미는 오늘 처음 보았어요. 풀거미는 한 달쯤 앞서부터 보았어요. 풀거미는 옆밭이나 마당이나 뒤꼍에서 풀을 뜯는 동안 자주 보았습니다.


  뒤꼍에 깔린 큰돌을 옮기려고 들었더니 큰돌 밑에서 개미가 와글와글 움직여요. 아차, 개미들이 큰돌 밑에 집을 지어서 살았구나 하고 느끼며 미안합니다. 그렇다고 이 큰돌을 다시 그 자리로 놓지 못합니다. 옮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개미들아, 너희들은 너희 나름대로 너희 집을 잘 건사할 수 있겠니?


  이월 끝무렵이나 삼월 첫무렵에 나비를 보았을 적에는 나비가 너무 일찍 깨어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사월 문턱에 깨어난 온갖 나비를 보면서 이 나비들은 알맞게 잘 깨어났다고 느낍니다. 겨울을 잘 견디고 씩씩하게 깨어난 나비는 새롭게 사랑을 속삭이고는 저희가 좋아하는 나무에 살며시 알을 낳겠지요. 알에서 깬 애벌레는 먼먼 옛날부터 즐기던 나뭇잎을 아삭아삭 갉아먹으면서 푸른 몸을 키울 테고, 멧새는 애벌레를 찾아 나무마다 내려앉아 여기저기 살필 테고요.


  해마다 보아도 질리지 않습니다. 해마다 보면서 새롭습니다. 날마다 마주하는 햇살도 날마다 새삼스럽습니다. 날마다 마시는 바람도 날마다 싱그럽습니다.


.. 도시 안에 도시가 있고 그 안에 또 도시가 있다. 그러므로 뉴욕 어느 곳에 살든 한두 블록 안에서 식료품점, 이발소, 신문가판대, 구두닦이점, 얼음·석탄·장작 지하저장고, 세탁소, 빨래방, 델리, 꽃집, 장의사, 영화관, 라디오수리점, 문구점, 잡화점, 양복점, 약국, 차량정비소, 찻집, 술집, 철물점, 주류판매점, 구두수선점을 찾을 수 있다 … 각 동네에는 있을 건 다 있고 소속감도 아주 커서, 많은 뉴요커들은 시골 마을보다도 더 한정된 작은 지역 안에서 일생을 보낸다. 그들은 자신이 사는 곳 모퉁이에서 두 블록만 걸어가면 모든 것이 낯설어 집에 돌아갈 때까지 불안해 할 것이다 ..  (37∼38, 39쪽)


  엘윈 브룩스 화이트 님이 쓴 짧은 수필 《여기, 뉴욕》(숲속여우비,2014)을 읽습니다. 이 책은 1949년에 미국에서 처음 나왔고, 한국말로는 2014년에 처음 선보이지 싶습니다. 엘윈 브룩스 화이트 님은 이녁이 되돌아보는 미국 뉴욕 이야기를 더 길게 쓸 수 있었을 테지만, 꼭 이만큼 조그맣게 쓸 만하기도 하겠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이녁이 바라보는 뉴욕은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뉴욕이 아니라, 큰 뉴욕에 작은 도시가 있고, 작은 도시에 또 작은 도시가 있으며, 또 작은 도시 사이에 수없이 작은 마을이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모인 삶터이거든요.


  작은 책에서 숨쉬는 ‘마을’ 이야기입니다. 작은 책으로 들려주는 ‘마을’ 노래입니다.


.. 이 도시는 관대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증오와 적의와 편견이라는 방사능 구름으로 폭발할 수도 있다 … 뉴욕이 가까워지는 웨스트사이드 도로에서 운전자는 무아지경에 빠지게 된다. 마치 물레방아에 끼어 어쩔 수 없이 돌아가는 나무조각처럼, 뒤에서 몰아대고 양쪽에서 꼼짝 못하게 해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극도의 긴장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 이전의 덜 복작거리던 시절과 비교하면 뉴욕은 불쾌하고 불편하다. 하지만 뉴요커들은 기질적으로 편안하고 편리한 것을 갈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 살 테니까 ..  (50∼51, 56, 57쪽)


  《여기, 뉴욕》과 같이 ‘여기, 서울’을 누군가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나라 골골샅샅 저마다 새로운 빛과 넋을 담아 ‘여기, 이곳’을 쓸 수 있어요. 1980년대 첫머리에 태어난 《한국의 발견》은 1980년대 눈썰미로 바라본 이 나라 이야기예요. 다만, 《한국의 발견》은 이 나라 모든 시와 군 발자취와 모습을 골고루 담으려 하면서 ‘여기, 이곳’ 이야기보다는 문화와 역사와 경제 이야기로 기울어집니다. 문화도 역사도 경제도 모두 우리 삶인 줄 헤아린다면, 우리들이 저마다 살아가는 마을 이야기를 조촐하게 적바림하면서 조그마한 책으로 꾸미면 재미있으리라 느껴요. 서울사람은 부산사람 이야기를 듣고, 밀양사람은 장흥사람 이야기를 들으며, 강릉사람은 연천사람 이야기를 들으면서, 서로서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면 아름다우리라 봅니다. 오늘 여기 이곳에서 누리는 삶을 어깨동무하면서 나눈다면 어디에서나 평화와 민주와 자유가 살가이 춤추도록 북돋울 수 있지 싶어요.


  나는 《여기, 뉴욕》을 읽으며 우리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함께 느꼈습니다. 4347.4.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문학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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