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새로 내놓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을 놓고 느낌글을 써 준 분이 있다. 알라딘서재에 올라온 글에서, 한 가지 바로잡을 대목을 보았고, 다른 대목은 더 붙임말을 적어야겠다고 느낀다. 바로잡을 대목을 알려주셔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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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쪽에서는 사람이 밭에 씨앗을 심어 배추나 무나 양파나 상추 따위를 얻은 것을 "푸성귀"라 하고, 나물과 푸성귀를 아울러 "남새"라 한다고 설명해 놓고, 201쪽과 202쪽에서는 밭에 심어서 거두는 풀을 "남새"라 하고, 사람이 가꾼 남새와 들과 숲에서 난 나물을 아울러 "푸성귀"라고 설명하고 있으니 어느 한 쪽은 틀렸음이 분명하다. 어린이가 읽을 책을 이렇게 엉터리로 기술하는 건 용서받기 어렵다.
→ 139쪽에서 잘못 썼습니다. 139쪽 5∼7줄에 나오는 글은 “사람들이 따로 밭에 씨앗을 심어 배추나 무나 양파나 파나 상추를 얻을 때에는 이들 풀을 가리켜 ‘남새’라 해요. 그리고 나물과 남새를 아울러 ‘푸성귀’라 하지요.”로 바로잡아야 올바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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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도시 문명이 시골살이를 누르면서 이루어지는 오늘날 모습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한국말’은 ‘한자말(중국 한자말 + 일본 한자말)’과 ‘서양말(영어를 비롯한 유럽말)’에 짓눌려서 ‘죽었다’고 할 만합니다. 해방 뒤 한동안 ‘일본말에 짓밟히던 한국말’을 되찾자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찌꺼기말을 몰아내자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스며든 온갖 일본말과 ‘일본 말투’와 ‘일본 한자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글을 배운 지식인과 학자가 일본말과 일본 말투와 일본 한자말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회 곳곳에서 일본말을 ‘전문 용어’처럼 삼아서 씁니다. 공공기관에서는 요즈음까지 일본말과 일본 말투와 일본 한자말을 털어내려고 몹시 애씁니다. 공공기관은 ‘국어 순화 자료집’을 꾸준히 만들어서 공무원 스스로 배우도록 해요. 이와 달리, 다른 곳에서는 거의 애쓰지 않습니다. 그동안 길든 말투를 그대로 써요. ‘-의’하고 ‘-적’과 얽힌 말썽을 바로잡지 못하는 모습을 대표로 꼽을 만합니다.


ㄴ.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에 나오는 이야기는 다른 소설이나 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낱말로 엮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에 나오는 이야기를 엮은 낱말은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이 살아가며 쓰는 가장 밑바탕이 되는 말로 엮었고, 차츰 쓰임새가 잊히거나 사라지는 낱말을 모두려고 했습니다. 글(책)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이라든지 예부터 한겨레가 쓰던 말이라든지, 이런 말은 여느 소설이나 책에서도 얼마든지 나올 만합니다.


ㄷ.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을 쓴 사람이 ‘새롭게 지은 낱말’은 제법 많습니다. 그러나, 글쓴이 스스로 새롭게 지은 낱말을 애써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다만, 글쓴이가 새롭게 지은 낱말은 책 뒤쪽에 붙인 ‘낱말풀이’ 자리에서 하나하나 짚으면서 보여주었습니다. 누구나 낱말을 새로 지을 수 있도록 돕는 틀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한국말을 살리는 길이란 ‘낱말 새롭게 짓기’로만 할 수 있지 않아요. 잃어버린 쓰임새를 되찾도록, 밑바탕이 되는 말을 가꾸도록 돕는 일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동안 봉건 사회와 일제강점기와 현대문명 도시사회에 짓눌려 앓던 말을 다루어야 하는 만큼, ‘죽었다’고 할 만한 한국말에 새롭게 기운을 북돋우고 싶다는 뜻으로 ‘살려내’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도시를 살리려면 시골이 살아야 하는 만큼, 말이 살려면 시골(숲, 자연)말이 살아야 한다는 뜻에서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입니다.


ㄹ. 오늘날 사람들은 ‘시시콜콜하고 수수한 여느 말’을 제대로 살피지 않습니다. 가장 밑바탕(기본)이 될 낱말을 제대로 살펴서 쓰지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가장 밑바탕이 될 말부터 제대로 깨닫고 살피면서, 이러한 말에서 삶과 넋과 이야기를 살리는 한국말로 나아가야 한다고 느껴요. 이를 이루지 못한다면, 한국말이 살아날 길이 없겠지요.


ㅁ. “오늘과 오늘이 얼크러져 모레와 글피가 된다”란 하루(오늘)와 하루(하루)가 모여서 이틀(모레)이 되고 사흘(글피)이 된다는 말입니다.


ㅂ. “무더위에 갑작스레 찾아드는 소나기는 목이 마른 나무 한 그루를 싱그럽게 적신다”에서 ‘한 그루’는 숫자 하나만 가리키지 않습니까. 때로는 나무 한 그루일 수 있습니다. 시골이든 도시이든, 나무가 숲을 이루지 못하고, 나무 한 그루만 덩그러니 있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 뒤로 숲정이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땔감을 얻느라 숲정이가 사라졌다고도 할 테지만,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한국 나무를 어마어마하게 베어서 가져갔습니다. 오늘날에서는 시골에서조차 마을마다 당산나무로 삼을 나무 한 그루 빼고는 마을나무를 찾아보기 어렵기까지 합니다.


ㅅ. “나무 한 그루”라고 일부러 적기도 했습니다. “목이 마른 나무 두 그루”라고도 말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이 글은 일부러 이렇게 썼어요. 왜냐하면, 요즘 사람들은 “한 그루의 나무”처럼 번역 말투를 함부로 쓰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쓴 글(문장)은, 요즘 사람들이 잘못 쓰는 글을 ‘애써 비판할 까닭 없이’ 예부터 바르게 쓰던 말투를 살려서 넣으려고 한 글이기도 합니다.


ㅇ. 하늘빛은 언제나 ‘파랗다’부터 이야기합니다. 바다빛도 언제나 ‘파랗다’가 밑바탕입니다. 바다에서 바닷말이 많이 불어날 적에는 ‘푸른 빛깔’ 바다가 되기도 합니다. 바다에서는 ‘녹조’와 ‘적조’가 있어요. 이때에는 바다빛이 다르지요. 다른 모습을 띨 적에 다른 빛깔을 말할 뿐입니다. 그러니 ‘녹조’와 ‘적조’라는 말이 따로 있어요. ‘녹조’가 끼지 않는 바다는 언제나 ‘파랗습’니다. ‘녹조’가 끼는 바다는 ‘푸른 바다’이고, ‘적조’가 끼는 바다는 ‘빨간 바다’입니다. 하늘빛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밑바탕이 되는 빛을 제대로 말하면서, 다른 때에는 다른 빛이 나기도 한다고 말해야 올바릅니다. 여느 때와 다른 바다빛은 그때마다 이러한 모습에 걸맞게 가리켜야 올바릅니다. 밑바탕이 되는 빛을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서 아무렇게나 써도 되지 않습니다. 빛깔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말하는 일이 오히려 ‘아이들 생각을 틀에 박히도록’ 하고 맙니다. 다만, ‘보리가 파랗게 올라온다’와 같는 말을 시골에서 쓰기도 합니다. ‘푸른’ 싹인데 ‘파랗다’라고 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싱그럽다’는 뜻에서 ‘푸르다’를 쓰기도 합니다. “마음이 푸르게 물들었어요”처럼 씁니다. 이러한 말투 때문에 ‘파랗다’와 ‘푸르다’를 잘못 섞어서 쓰는 일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푸르다’는 “풀 빛깔”을 가리키는 밑말이니, 하늘빛에서는 ‘파란하늘’을 기본으로 올바르게 쓰면서, ‘푸르게 물드는 하늘’이라든지 ‘푸르게 눈부신 하늘’처럼 쓰면 ‘푸르다’도 어느 모로 쓸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녹색’과 ‘초록’이란 ‘푸르다’를 가리키는 한자말입니다. ‘녹색’은 일본 한자말이고, ‘초록’은 중국 한자말입니다. ‘푸른 하늘’은 하늘빛을 ‘녹색이나 초록’으로 가리키는 꼴이기에, 이런 말투가 알맞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ㅈ. ‘바지저고리’가 ‘시골뜨기’나 ‘얼뜨기’를 나타낸다는 말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런 잘못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군국주의자가 한겨레를 짓밟으면서 함부로 퍼졌습니다. 이런 말 잘못이 자꾸 번져서, 도시공업사회에서 시골사람을 얕보는 말투로 더 퍼졌는데, 이처럼 잘못 퍼진 말과 문화를 바로잡는 일이 ‘한국말을 살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먼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바지저고리와 치마저고리로 ‘한복’을 가리켰어요. ‘한복’은 문화학자가 지은 한자말입니다. 한겨레가 쓰던 말이 아닙니다. ‘한식’와 ‘한옥’ 또한 한자가 지은 말입니다. 아이들한테 이런 말을 가르쳐 줄 수 있기도 하지만, 이런 말을 가르치면서, 한겨레가 예부터 쓰던 말을 안 가르치거나 못 보여준다면, 아이들은 한국말을 배울 수 없어요. 게다가, 잘못 쓰는 말은 바로잡아야지요. 더욱이 ‘시골사람’을 얕잡듯이 쓰는 말투는 오늘날에서는 거의 뜻이 없을 뿐 아니라, 이런 차별을 제대로 바로잡아야 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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