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 - 아이들을 살리는 이오덕의 교육 이야기
이오덕 지음 / 삼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오덕을 읽는다

 


어버이 노릇이란
―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
 이오덕 글
 삼인 펴냄, 2005.11.25.


※ 책풀이 ※
2005년에 처음 나온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는 이오덕 님이 돌아가신 뒤 나온 유고모음 가운데 하나이다. 이 땅 교사와 어버이한테 들려주는 교육 이야기를 다은 책이다. 교사란 어떤 사람인가를 묻고, 이오덕 님 스스로 교사로 지낸 나날을 돌아보는 한편,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면 아름다울까 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


  어버이는 아이를 낳아 돌보는 사람입니다. 어버이는 온 사랑으로 가득한 몸이 되어 아이를 낳아 돌보는 사람입니다. 어버이는 아이를 오롯이 사랑으로 돌보면서 옹근 꿈으로 보살피는 사람입니다.


  아이는 입시기계가 아닙니다. 더 높다는 대학교에 집어넣도록 담금질시킬 아이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초·중·고등학교에서 입시지옥에 허덕여야 하지 않습니다. 어버이라 한다면, 아이가 입시공부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야 올바릅니다. 어버이로 살겠다면, 아이한테 입시공부 아닌 삶빛을 보여주고 베풀며 함께 누려야 마땅합니다.


  어버이가 가르칠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아이가 배울 것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을 가르치고 배울 뿐입니다. 다른 것은 가르칠 일도 배울 까닭도 없습니다. 사랑을 가르치면 다른 모두를 스스로 깨닫습니다. 사랑을 배우면 다른 모두를 스스로 깨우칩니다.


  사랑이 있어야 씨뿌리기와 풀베기와 밥하기와 빨래하기를 알뜰살뜰 꾸립니다. 사랑이 있어야 젖물리기 자장노래 부르기 함께 놀기를 살가이 합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집살림을 알차게 가꿉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늘 웃고 노래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 그 뒤 나는 정작 농사일을 배워야 했던 학교에 가서 지게를 지게 되었지만, 땀 흘려 일하는 삶이 사람으로서 가장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이란 것을 깨닫지는 못했다. 그러고는 교원 생활을 한 것이다 … 나는 지금 생각한다. 내가 배운 학교 공부, 내가 읽은 책들, 도시와 문명이란 것, 그것이 얼마나 나를 해쳤는가! 내가 만약 보통학교에도 들어가지 않고 집에서 마을 사람들과 같이 땅 파고 짐 지면서 일을 몸에 붙이고 자랐더라면 나는 얼마나 자연스럽게 일찌감치 삶의 진리를 얻어 가졌을 것인가 … 나는 오늘날 사람 사회의 온갖 엉클어진 문제를 푸는 아주 손쉬운 진리를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이 즐겁게 일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모두가 평생을 온 정성을 기울이며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그 일을 한 가지씩 찾아내게 하는 것이 교육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일과 놀이와 공부가 하나로 된 아이들 삶을 어른이 되어도 그대로 이어가고, 그래서 평생을 그렇게 살아간다면 지금까지 우리 사람들이 개인으로나 사회로나 안고 있던 모든 문제들이 시원스럽게 풀어진다 …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자라나게 해야 사람다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나무가 없이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만 덩그러니 서 있는 큰 도시의 학교는 눈앞에 그리기만 해도 가슴이 탁 막힌다 ..  (12, 18, 233쪽)


  아이를 낳으려는 어른이라면 스스로 어버이 노릇을 하려는 사람입니다. 나이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이는 열다섯 살에 낳을 수 있고, 서른다섯 살이나 마흔다섯 살에 낳을 수 있습니다. 저마다 마음가짐이 튼튼히 선 때에 아이를 낳습니다. 너무 어리니 아이를 못 낳지 않고, 너무 늙어서 아이를 못 낳지 않습니다. 아이는 오직 사랑으로 돌보고 키우는 만큼 나이를 따질 일이 없습니다.


  잘 살펴보셔요. 아이들은 제 어버이가 열여덟 살이든 서른여덟 살이든 쉰여덟 살이든 따지지 않습니다. 아이한테 어버이는 언제나 어버이일 뿐입니다. 잘생겼으니 어버이요, 못생겼으니 안 어버이가 아닙니다. 돈이 있어 어버이가 되지 않고, 돈이 없어 어버이로 안 삼지 않습니다. 내 재산으로 집이 한 채 있어야 어버이가 되지 않습니다. 전세나 월세를 살기에 어버이가 안 되지 않습니다.


  아이한테는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버이입니다. 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어버이가 못 됩니다.


  어버이도 아이를 바라볼 적에 오로지 한 가지 눈길이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며 믿는 넋일 때에 비로소 어버이예요. 아이를 다그치거나 닦달하거나 들볶는 사람은 어버이 노릇을 못하는 바보입니다.


.. 먹기만 하고 할 일이 없는 도시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고 공놀이를 하고 한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운동은 생산을 하지 않는 행동이다. 사람들이 일은 안 하고(일은 일하는 사람들에게만 맡겨 놓고) 먹기만 해서 몸에 힘이 오르니 그 힘을 어디에다 쏟아 놓을 곳이 없어 싸움을 걸고 싶어 한다 … 범죄의 가장 큰 뿌리는 돈과 물질을 골고루 나눠 가지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이 너무나 환하다. 그리고 이런 사회를 만든 책임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 있고, 모든 어른들은 불행한 아이들에 대해 공범자란 생각을 해야 된다고 본다 … 가난이 부끄럽고 죄스럽다는 생각을 깨뜨리지 않고는 교육을 할 수 없다. 도 많이 가진 것, 큰집에 사는 것,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깨뜨리지 않고는 무슨 재주고 기술을 아무리 잘 가르친다고 해도 교육은 될 수 없다. 바르게 살고 의롭게 살고 올바르고 참되게 살아가도록 하지 않고는 밥을 제대로 먹는 ‘사람의 교육’을 한다고 할 수 없다 … 나는 아이들이야말로 가장 깨끗하고 바르고 참된 사람이라고 봅니다. 아이들은 정직합니다. 거짓말을 하는 아이는 어른한테서 배운 것이고, 어른들이 만든 잘못된 환경이 거짓말을 가르친 것입니다 ..  (17, 38, 40, 56쪽)


  일곱 살 아이가 일곱 살 눈높이로 말합니다. 네 살 아이가 네 살 눈매로 종알거립니다. 일곱 살 아이는 일곱 살 몸짓으로 뛰놉니다. 네 살 아이는 네 살 몸가짐으로 뒹굽니다. 일곱 살 아이는 네 살 아이가 아니요, 네 살 아이는 일곱 살 아이가 아닙니다. 우리 아이는 우리 아이일 뿐, 다른 아이와 견줄 까닭이 없습니다. 잘 헤아려 보셔요. 아이들은 제 어버이를 남과 견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제 어버이와 남을 맞대면서 윽박지르거나 꾸짖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모든 삶을 어버이한테서 배워요. 어버이가 슬기로우면 아이도 슬기롭습니다. 어버이가 바보스러우면 아이도 바보스럽습니다. 아주 마땅합니다. 거친 말을 일삼는 어버이는 언제나 아이한테 거친 말을 가르쳐요. 아이는 처음에 멋모르고 어버이가 ‘가르치는’ 대로 거친 말을 배워요. 이러다가 아이 스스로 철이 들 무렵, 어버이한테서 마음이 떨어집니다. 왜 저한테 ‘말다운 말’이 아닌 거칠고 메마른 말을 가르쳤는가 싶어 마음이 멀리멀리 떠나고 맙니다. 이때부터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안 배우고 스스로 배우거나 다른 ‘배움 어버이’를 찾아 떠납니다. 어버이부터 스스로 아이한테서 사랑이 떠났으니, 아이도 견디다가 끝내 떠나고 만 셈입니다.


  거친 말뿐이 아닙니다. 딱딱하거나 어렵거나 올바르지 않은 말을 아이한테 자꾸 늘어놓으면, 아이는 시나브로 어버이한테서 떨어지거나 멀어집니다. 사랑이 오가는 말이 아니니, 아이는 제 어버이가 참어버이인지 거짓어버이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어버이 곁에 머물지만 나이가 들수록 하루빨리 어버이 곁을 떠나야겠다는 생각(꿈)을 키워요.


  아이들은 어버이 곁을 굳이 떠날 마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를 사랑으로 낳은 님이 어버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스레 어우러지는 삶을 바라는 아이들입니다. 홀로서기(독립)가 대단하지 않아요. 사랑살이가 대단합니다. 사랑살이를 바라는 마음이지, 홀로서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닙니다. 먼먼 옛날부터 아이들은 사랑스러운 보금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늙고 힘들면 늘 어버이 곁에서 한집살이를 하면서 바라지합니다. 어버이가 늙어서 죽으면, 어느새 어른이 된 아이가 낳은 아이가 새롭게 어른이 되고, 늙은 어버이를 보살피던 아이는 제 아이한테서 보살핌을 받아요. 언제나 사랑으로 아끼고 돌보며 흘러온 삶입니다. 요양원이나 경로원 같은 데가 있던 삶이 아니라, 보금자리와 집이 있던 삶입니다.


.. “나는 40년 넘게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그동안 국어교육의 목표가 무엇인지 의문을 품어 본 기억이 없는데요. 우리 아이들에게 바르고 깨끗한 우리 말을 자유롭게 말하고 쓸 수 있게 하면 다 되는 것 아닙니까?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요?” … 민중이란 누구인가? 나는 아주 쉽게 생각한다. 민중이란 ‘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밖에 또 무슨 말이 있어야 하나 … 정치가 바로잡혀야 교육도 제대로 되겠지만, 한편 아이들에게 민주스런 삶을 가르치지 않고 민주사회를 이룬다는 것은 헛된 꿈이다 … 잘못된 교과서를 만들어 낸 사람만큼 큰 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그런 교과서를 비판하지도 못하게 하고, 교과서와 지시하는 것밖에는 다른 것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 또 그런 반민주 반생명 교육에 그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고 하여 아이들을 들볶는 짓을 오직 한 가지, 교사나 부모가 보여주어야 할 교육열이라 알고 있는 어른들의 죄도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 … 한 교실 50명 가운데 단 한 아이도 일하면서 살겠다는 아이가 있다는 말을 어떤 선생님들한테서도 들어 본 적이 없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운동선수가 되겠다, 가수가 되겠다, 이 지경이니 세상에 우리가 이런 교육을 하면서 자본주의는 또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는가. 모두가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회는 자본주의고 공산주의고 무슨 정치를 한다고 해도 절대로 제대로 될 수 없다 ..  (22, 23, 43, 50, 51쪽)


  예부터 어느 나라와 겨레에도 학교가 없던 까닭을 알아야 합니다. 학교란 데는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누구나 제 보금자리에서 즐겁게 살아가면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제 마을을 떠나서 서울로 가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서울로 가야 큰뜻을 펼치지 않아요. 사람들이 조그마한 고장에 모여서 복닥거려야 큰일을 이루지 않습니다. 참말, 큰일이란, 사랑 하나이지, 정치나 경제나 문화나 예술이 큰일이 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큰사람일까요? 아닙니다.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가 큰사람인가요? 아닙니다. 여느 마을 여느 보금자리 여느 어버이가 바로 ‘사람’입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옹근 ‘사람’입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사람이 되어 살아가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사람다움을 배우고 싶습니다.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사람다움을 가르치면서 ‘살아가는 보람’을 누립니다. 먼먼 옛날부터 지구별 어디에서나 ‘귀촌·이촌’ 따위는 없어요. 제 고장에서 나고 자라서 제 고장에서 삶을 잇습니다. 예부터 시골과 서울은 따로 없어요. 숲이 있고 들이 있으며 골짜기와 냇물과 바다와 못이 얼크러진 삶자리가 ‘시골’입니다. 스스로 삶을 짓고 살림을 꾸리는 터전이 ‘시골’입니다.


  이와 달리, ‘서울’이라고 하는 도시는,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짓지 못하는 데입니다. 무엇보다 서울이든 도시이든 밥도 옷도 집도 스스로 지어서 살아가지 못하는 얼거리예요. 서울이나 도시는 모두 돈만 벌어서 돈으로 밥과 옷과 돈을 사들여서 살림을 이어야 하는 틀입니다.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곳은 보금자리가 못 됩니다. 오늘날 도시문명에서 부동산만 있고 집이 없는 까닭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돈으로만 굴러가는 도시문명에서는 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 부동산입니다. 도시사람은 ‘내 집’이 없어요. 오직 재산과 부동산일 뿐입니다.


  ‘내 집’이란 보금자리요 마을입니다.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지어서 살림을 가꿀 수 있는 데가 보금자리이면서 마을입니다.


  예부터 어버이는 아이한테 밥짓기와 옷짓기와 집짓기를 가르쳤습니다. 교과서나 교재나 책 따위는 없이 밥과 옷과 집을 아이한테 가르치고 물려주었습니다. 삶으로 보여주고 삶으로 배웁니다. 삶으로 들려주고 삶으로 받아들입니다. 삶으로 알려주고 삶으로 깨닫습니다.


  밥을 지을 적에 요리법으로 밥을 짓지 않습니다. 집을 지을 적에 건축법으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옷을 지을 적에 패션으로 옷을 짓지 않습니다. 지구별 어느 마을에서나 사람들은 스스로 아이가 되고 어버이가 되며 살았습니다. 지구별 어느 고장에서나 사람들은 스스로 보금자리를 가꾸는 아이이면서 어버이였습니다.


.. 누구든지 잠깐이라도 교단에 선 사람이라면 자기가 아이들에게 체벌을 준 다음에 그렇게 당한 아이들이 그 체벌로 말미암아 마음이 착해지거나 행동이 바람직스럽게 바뀐 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 대관절 ‘사랑의 매’란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이런 속임수 말을 제발 교육자들만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더구나 시험을 쳐서 틀린 점수만큼 작대기로 때리는 짓, 이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이 야만스런 짓이다 … 유치원에서 글자를 가르치는 것도 아주 잘못이니, 그런 유치원에는 아이들을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학교에 들기 전에 가르쳐야 할 것은 학교 공부가 아닙니다 … 일하면서 살아온 모든 부모들은 겨레말을 그 자식들에게 가르치는 훌륭한 교육자였다고 하겠습니다 …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읽힌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나 어른들이 아이들과 같이 공부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렇게 해야 희망이 있습니다.” … 교육이 진짜 교육이 되려면 아이들에게 삶을 가르쳐야 하고, 삶으로 세상을 깨닫고 이치를 알고 튼튼한 마음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남으려고 한다면 다른 어떤 일보다도 먼저 아이들에게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가도록 가르쳐야 한다. 따라서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이, 자기가 먹고 쓰고 놀고 한 결과가 땅을 다치거나 더럽히지 않도록 하는 삶을 몸에 배게 하는 일이다 ..  (83, 86, 101, 117, 119, 124쪽)


  학교는 어떤 곳인가 돌아봅니다. 오늘날 학교는 우리한테 어떤 곳인지 헤아려 봅니다. 한국땅에서 학교가 하는 일은 언제나 한 가지입니다. 대학입시 교육입니다. 대학입시 교육 한 가지만 하는 한국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생각을 못 뻗도록 가로막거나 짓누릅니다.


  학교를 스무 살까지 다니건 서른 살까지 다니건, 아이들은 밥짓기와 옷짓기와 집짓기 가운데 아무것도 못 배웁니다. 대단하다는 대학교를 마친 아이들조차 사랑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나라밖으로 무언가 배우러 다녀온 아이들마저 꿈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삶을 안 가르칩니다. 오늘날 학교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사람이 안 보입니다. 교사와 학생이 있고, 교칙과 규율은 있지만, 사람다운 넋이나 이야기가 없는 학교입니다. 이리하여, 제도권학교에서 사람답게 살기란 참 어려울 뿐 아니라, 사람답게 살 수도 없습니다. 제도권학교에서 여러모로 애쓰고 용쓰면, 몇 가지는 할 수 있어요. 이를테면 ‘교사답게 일하기’와 ‘학생답게 배우기’는 할 수 있습니다. 무척 애쓰고 땀흘리는 분들은 참교사가 되기도 하고, 아름다운 교직을 지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교사다움은 지키더라도 사람다움은 지키지 못해요. 왜냐하면,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처리해야 하는 공문서’와 ‘맡아야 하는 행정’과 ‘다루어야 하는 시험성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제도권학교는 사람다움을 짓밟거나 깔아뭉갭니다. 그래서, 제도권학교에서 사람다움을 말하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대안학교도 이러한 사회 틀거리를 제대로 못 깨달으면 ‘교사다움’에서는 제도권학교보다 살짝 나을는지 몰라도, 대안학교 또한 사람다움이 없으니, 아이들이 몹시 힘들고 아파요. 대안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홀가분하지 못하거나 사랑스레 웃지 못하는 까닭을 어른들이 슬기롭게 꿰뚫어보면서 짚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학교가 제도권이냐 대안이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학교는 그저 학교일 뿐입니다. 이런 학교냐 저런 학교냐를 넘어서, 보금자리가 되느냐 마을이 되느냐 삶터가 되느냐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스스로 삶을 짓도록 이끄는 ‘어버이와 아이’가 만나는 자리가 되느냐를 헤아려야 합니다.


.. 참말 아이들은 놀면서 자라납니다. 놀면서 서로서로 마음을 알고, 말을 배우고, 슬기를 얻고, 몸을 키웁니다. 놀지 못하는 아이는 병신이 됩니다 … 진짜 나라사랑은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과 이 땅에서 살아가는 풀과 나무와 곤충과, 그리고 이웃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동안에 저절로 가슴속에 새겨지는 사랑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마음껏 뛰놀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아이들과 함께 놀아 주십시오. 사람교육과 애국교육이 여기서 이뤄진다고 믿습니다 … 아무리 그럴듯하게 그렸더라도 개성이 없고 자기표현이 안 되어 있으면 칭찬하지 말 일이고, 아무리 서툴어도 자기 생각대로 그렸으면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 아기들은 가르치기 쉬운데, 어른들이 잘못된 버릇을 고치지 않아 교육이 안 됩니다. 짐승들은 땅을 더럽히지 않는데 사람이 땅을 다 버려 놓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할까요? 선생님들은 과자를 사 먹고, 비닐봉지를 아무 데나 버리면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니 이래서 교육이 안 됩니다 … 아이들은 이것 읽어라, 저것 외워라 해서 지시하고, 어디로 어른들이 제멋대로 목표를 정해 놓고 이끌어 가는 대상이 아니다. 아이들은 가꾸어 주고 지켜 주어야 할 생명이다. 생명은 자연 속에서 풀같이 나무같이 스스로 자라나게 되어 있다 … 우리가 만약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자유와 창조의 삶이다. 그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  (60, 62, 65, 69쪽)


  2003년에 눈을 감은 떠난 이오덕 님은 한삶을 ‘교사’로 살았습니다. 마흔세 해 동안 교사 노릇을 하기도 했지만, 이녁이 한 일과 살아온 모습은 ‘누구한테 어떤 지식을 가르치거나 이끌지 않았’어도 교사 노릇입니다. 그런데, 이오덕 님은 교사 노릇을 하면서 늘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습니다. 제아무리 훌륭하거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사 노릇을 하더라도 어딘가 켕기고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참교사로 우뚝 서겠다고 다짐을 하고 애쓰면서, 196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 무렵에도 제도권 울타리와 맞서기도 하지만, 언제나 큰 울타리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이오덕 님은 스스로 ‘참교사’를 생각하며 교사 노릇을 하다가, 1986년에 교사 자리에서 떠밀려 학교를 떠나야 하는 일을 겪으며, 비로소 크게 깨닫습니다. 아하, 내가 교사 노릇에 매달리느라 한 가지를 못 보았구나, 하고 아주 크게 깨우칩니다. ‘참교사’ 아닌 ‘참사람’ 노릇을 하면 되었는데, 미처 이렇게 하지 못했다고 뉘우칩니다. 이러한 뉘우침을 속속들이 담아서 쓴 글이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삼인,2005)라는 책에 깃듭니다.


  우리한테 무엇을 말하거나 가르치기 앞서, 또 글로 써서 이야기를 건네기 앞서, 이오덕 님은 누구보다도 먼저 몸소 해 보입니다. 남한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떠들지 않는 이오덕 님입니다. 스스로 삶으로 가꾸면서 넌지시 이야기할 뿐입니다. 이오덕 님은 우리를 나무란 적이 없고 꾸짖거나 다그친 적이 없습니다. 이오덕 님은 언제나 이녁 스스로를 꾸짖거나 다그치거나 나무랍니다. 왜 그동안 ‘참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을 바라보지 못했나 하고 스스로 꾸짖습니다. 이제부터 ‘참사람’이 되어 슬기롭게 살아가자고 스스로 다그칩니다.


  이리하여, 이오덕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참 쉽습니다. 어려운 말도 없습니다. 참사람으로 살아갈 길을 이야기하니 쉽습니다. 참사람이 되려고 스스로 거듭나는 길에 섰기에, 우리 말과 글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똑똑히 깨우쳤어요. 어려운 말을 쓸 턱이 없습니다. 살갑게 사랑하는 말로 이야기를 펼칩니다.


.. 어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다만 살아 있을 때 돈을 많이 가졌다고 해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해서 대문짝만하게 광고가 된다. 그런데 아이들은 아무리 억울하게 죽어도 소식이 없다 … 성적이 나빠서 자살하는 것은 오로지 어른들이 그런 지경으로 몰아간 때문이다. 시험 점수를 서로 빼앗아 가는 싸움에 만족할 만한 성적을 못 올리는 아이는 이 세상에서 사람 노릇을 못하는 쓰레기 같은 아이가 된다고 학교에서 가정에서 밤낮없이 선생들과 부모들이 채찍을 치면서 부추기어 멀쩡한 아이들을 아주 바보 머저리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 의무교육을 마친 이 나라 착한 백성들이 신문을 읽을 수 없도록 온통 한자투성이 신문을 43년 동안 만들어 온 것도 상식을 벗어난 상태다 … 노동 시간을 선진국 수준으로 줄인다고 하더라도 노동하는 자체를 낮게 여기고 노동자를 깔보는 풍조를 만들어 내는 교육을 하고 있는 동안, 노동은 언제나 괴롭고, 될 수 있으면 꺼리고 싶은 것이 될 수밖에 없다 ..  (142, 153, 187, 194쪽)


  마음을 열면 됩니다. 뜬구름 잡는 허울 좋은 이름을 붙잡으려 하지 않으면 됩니다. 내 것으로 가로채려는 마음을 버리면 됩니다. 우리 모두 즐겁게 껴안고 부대낄 만한 길을 걸어가면 됩니다.


  남에게 하라고 시킬 까닭이 없습니다. 스스로 즐겁기에 즐겁게 합니다. 스스로 기쁘니까 기쁘게 합니다. 즐거운 삶을 즐겁게 가꾸면 됩니다. 기쁜 노래를 기쁘게 부르면 됩니다.


  정부에서 정책을 마련하지 않았기에 못할 일이 없어요. 정부에서 지원금을 안 주니까 못할 일이 없어요. 늘 우리 스스로 하는 일입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삶이 정부 복지정책으로 하는 일이 아니거든요. 아이와 사랑스레 꾸리는 살림살이가 정부 복지지원금으로 이루어지는 삶이 아니거든요.


  아이들은 값비싼 장난감이 있어야 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돌멩이 하나로 놀고, 작대기 하나로 놉니다. 아이들은 맨손으로 흙을 만지며 놉니다. 아이들은 온몸으로 뒹굴면서 뛰놉니다.


  아이들 곁에서 어른들은 돌멩이 하나로 일합니다. 작대기 하나로 일해요. 맨손으로 흙을 만지며 일합니다. 어른들은 온몸으로 땀흘리면서 일합니다.


.. 정신이 없으니 얄팍한 말재주나 부리고 싶어 한다. 우리 어린이문학은 갈수록 말재주나 부리고 싶어 한다. 우리 어린이문학은 갈수록 말재주가 더해져서 손장난 문학으로 타락해 가는 느낌이 든다. 정신이 없는 것은 바로 삶이 없기 때문이다 … 나는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 이른바 출세란 것을 해서 이름난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농사를 짓든지 노동을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이웃과 정을 나누면서 자연을 사랑하면서 넉넉한 사람다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 주기를 바란다 …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으로 해야 할 일은 자기가 먹는 밥을 자기 힘으로 생산하는 것과, 그 먹고 마시면서 나온 찌꺼기를 자기 힘으로 생산하는 일이다 … 산골 생활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이 세상 착한 사람들은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는 견디지 못하고 모두 밀려나와 산골에 들어가 산다는 것이다 … 산골에서 자연만을 상대로 살아가면 사람의 마음이 저절로 깨끗해지고 착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 자연과 삶을 잃어버리고 무시무시한 경쟁으로 자라난 사람들이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돈 많이 벌어 편안하게 사는 것’이다 ..  (197, 203, 219, 225, 226쪽)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는 인문책이 아닙니다. 교육책도 아니고 이론책도 아닙니다. 교사 노릇을 하던 이오덕 님이 스스로 깨달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삶책입니다. 이오덕 님은 늘 입버릇처럼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느냐” 하고 말씀합니다. 이녁 스스로 점잖거나 다소곳하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오덕 님은 참말 ‘교사 노릇’ 아닌 ‘사람 노릇’을 하고 싶었기에, 스스로 다짐하듯이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도 모두 같아요. 우리는 누구나 사람 노릇을 하면 됩니다. 어버이 자리에 섰다면 어버이 노릇을 하고, 아이 자리에 설 적에는 아이 노릇을 하면 돼요.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누이기에 어버이가 아닙니다.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누이기도 하지만,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누이는 손길은 늘 사랑입니다.


  기저귀를 가는 손길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기저귀를 빨래해서 햇볕에 너는 손길은 늘 사랑입니다. 아기한테 젖을 물리고, 아이한테 밥을 먹이며, 아이가 갈아입을 옷을 마련하는 어버이 손길은 노상 사랑입니다.


  새삼스럽지만, 거친 말을 물려받는 아이는 어른이 되어 제 아이한테 거친 말을 다시 물려주고 맙니다. 사랑을 물려받는 아이는 어른이 되어 제 아이한테 사랑을 새롭게 물려줍니다. 꿈을 물려받는 아이는 어른이 되어 제 아이한테 꿈을 새록새록 물려줍니다.


.. 만약 권 선생의 글이 자기 한몸 살기 위한 생각의 표현이었다면, 그는 자기 개인의 앞날에 대해 아주 절망했을 것이고, 따라서 그의 몸도 그런 절망으로 하여 한층 나빠졌을 것이 틀림없다 … 자유가 없는 시대일수록 거짓스런 말이 세상을 뒤덮는다 … 알맹이가 없는 터무니없는 말에 끌려가는 사람은 그 자신이 알맹이가 없기 때문이다 … 학교교육이 언제 아이들에게 삶을 주었던가? 우리는 그 어린 아이들이 1학년에 들어오자마자 교과서만 가지고 끊임없이 머릿속에 무엇을 쑤셔넣으려고만 한다. 그것이 교육의 모두다 … 실업인들이란 대체로 모두 이렇게 노동자들의 삶을 모른다. 또는 알고도 모른 척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바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이 그들이 마음치 배가 잔뜩 불렀는데도 더 먹으려고 욕심을 부린다고 생각하거나, 지금까지 자기들이 먹여살려 주었는데 이제 와서 은혜를 원수로 갚는 행동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노동운동을 짓밟고 있다 … 점수가 으뜸이란 생각을 하게 하고, 점수 따기를 가장 큰 목표로 하는 교육은 그대로 돈과 권력이 으뜸이란 생각을 아이들 마음속 깊이 심어 준다 … 아이들 앞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아이들을 착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키우는 일입니다 ..  (250, 255, 264∼265, 268, 276쪽)


  우리는 누구나 생각하며 살아야 사람입니다. 아름답게 생각하고, 착하게 생각하며, 참다이 생각할 때에 사람입니다. 어깨동무하는 삶을 생각하고, 품앗이와 두레로 피어나는 삶을 생각합니다. 오순도순 가꾸는 삶을 생각하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삶을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섣불리 입시학원에 넣지 말아요. 입시학원 굴레에서 허덕여야 하는 아이들은 자꾸자꾸 삶하고 동떨어져요. 생각하는 깊이가 사라져요. 아이들한테 함부로 입시과외를 시키지 말아요. 입시과외를 받는 아이들은 차츰차츰 어버이 손길에서 멀어져요. 어버이가 투박하거나 수수한 손길로 가르치거나 보여주는 이야기가 반갑고 즐거운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비싼 요리집에서 맛있게 밥을 먹지 않아요. 아이들은 투박하고 수수한 어버이가 차려서 내주는 투박하고 수수한 밥을 맛나게 먹어요.


  생각이 자라고 사랑이 피어나며 꿈이 날갯짓할 적에 비로소 사람입니다. 아이도 어른도 다 같이 생각하고 사랑하며 꿈꿀 적에 바야흐로 사람입니다.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사람다움하고 멀어집니다. 지구별에 전쟁이 자꾸 터지는 까닭은 사람들 스스로 생각을 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니 사람다움을 등집니다. 우리 사회에서 끔찍하거나 슬프거나 아픈 일이 끝없이 터지는 까닭은 사람들 스스로 사랑을 잊기 때문입니다.


  남 때문에 생각이나 사랑을 잊지 않습니다. 언제나 우리 스스로 잊습니다. 입시학원과 입시학원 굴레에서 허덕이다가 입시시험에 얽매인 채 대학교에만 들어가니, 사람들은 늘 스스로 생각과 사랑을 잊어요.


.. 민주인을 기르는 교육은 그 방법도 민주다워야 합니다. 민주교육의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삶입니다 … 삶으로 하는 교육은 당연히 손과 발을 움직여 무엇을 만들고 가꾸고 기르는, 곧 일을 하는 교육이 됩니다 … 아이들을 억누르는 교육체제를 뜯어고치지 않고는 절대로 민주교육을 할 수 없습니다 … 진짜 애국심 가지게 하는 교육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교실에 가두어 놓고 시험공부만 시키는 짓을 그만두고, 아이들을 풀어 놓아서 자연 속에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지 저는 궁금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어야 할까요? 어른들이 만들어 온 난장판 역사? 엉망진창이 된 사회?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만 가고 있는 과학? 정신을 어지럽히기만 하는 온갖 잡동사니 지식? 자기 핑계의 철학? 무슨 무슨 주의? 사상? 종교의 교리? … 지도자나 선각자는 필요합니다만, 그는 역사의 어느 한때에 잠깐 필요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지, 그 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뭇사람의 앞장을 서서 일하는 사람을 그렇게 대단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일은 밑에서 백성들이 하는 것이고, 역사는 민중이 밀고 나가는 것이지요 ..  (278, 279, 285, 296, 329쪽)


  어버이 노릇은 아름답습니다. 보금자리를 가꾸는 어버이 손길은 따스합니다. 아이를 어루만지는 어버이 눈빛은 사랑스럽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 아버지로 자라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대학생이나 직업인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저를 낳아 돌본 어버이처럼 사랑스러운 어버이로 자라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저를 이 땅에 부른 어버이처럼 착하고 참다우며 맑은 눈빛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마음을 읽어요. 어버이 넋을 살펴요. 우리는 저마다 아이이면서 어버이입니다. 아이를 낳은 사람만 어버이가 아닙니다. 아이이면서 어버이입니다. 아이다움과 어버이다움을 알뜰살뜰 보듬으면서 살아갈 적에 어른으로 거듭납니다. 나이를 먹은 사람이 어른이 아니에요. 아이답고 어버이다울 적에 어른입니다.


  즐겁게 살아가는 길을 찾으면서 즐겁습니다. 사랑스레 살아가는 빛을 누리면서 사랑스럽습니다. 아름답고 싶다면? 얼굴을 뜯어고치거나 화장품을 바른대서 아름답지 않아요. 아름답게 살아가는 꿈을 키울 때에 아름답습니다. 서로서로 어여쁜 어버이인 줄 새록새록 배우고 가르치면서 우리 보금자리를 스스로 가꾸기를 빕니다. 마음밭에서 자라날 눈부신 씨앗을 볼 수 있기를 빌어요. 4347.3.1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이오덕을 읽는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들레처럼 2015-01-20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말이 빛나는 아름다운 글을 읽게 되어 참 벅찹니다. 두고 두고 살피고 배울 수 있는 글이네요. 자주 와서 배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