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직역, 의역, 오역, 번역투, 창작
작가가 들려주려는 이야기를 알아채지 못하면 번역이 엉터리가 되겠지요. 왜냐하면, ‘직역’은 직역일 뿐 번역이라 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문장을 ‘의역’으로만 옮기면, 이때에는 번역이 아닌 창작이 됩니다. 작가가 들려주려는 이야기가 아닌 번역가가 들려주려는 이야기로 바뀌어요. 직역이 되든 의역이 되든 둘 모두 ‘오역’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고 만다고 느낍니다. 번역은 번역이 되도록 할 일입니다. 직역도 의역도 아닌 번역을 해야지요.
번역을 하려면 무엇보다 제 나라 말을 잘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어를 잘 안다 하더라도 한국말을 제대로 모르면, 번역가는 영어로 된 책을 잘 읽고 헤아렸어도 이 책을 한국말로 읽을 독자한테 제대로 알려주지 못합니다. 외국말과 함께 한국말을 잘 알아야지요. 게다가 외국말만 잘 알아서는 안 되고 외국 문화를 나란히 알아야 하며, 한국 문화까지 아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골고루 헤아리면서 짚을 수 있는 눈길과 마음결일 때에 비로소 번역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외국말을 전공해서 번역하는 사람이 꽤 많기는 해도, 막상 한국말을 함께 슬기롭게 익혀서 번역하는 번역가는 뜻밖에 퍽 적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쓰는 ‘비유’를 번역가가 공부하지 않으면, 번역이 엉터리가 될 테지요. 작가가 쓰는 말투를 살리지 않고 번역가가 쓰는 말투를 쓴다면, 이때에도 번역이 아닌 의역이 되어요. 상품 해설서를 한국말로 적는 일이 아니라면, 인문책이나 문학책을 번역한다면, 마땅히 작가를 잘 알아야 하고 작가가 살아온 터전을 살펴야 하며 작가가 태어난 나라가 어떤 문화요 사회인가를 차근차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흔히 떠도는 서평을 헤아려 봅니다. 서평은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품 해설서와 같은 서평을 하면, 이러한 서평은 책과 작가를 제대로 읽어서 말한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궁금해요. 수많은 서평은 상품 해설서에서 맴돌지 않느냐 싶습니다. 작가 한 사람이 책을 낸 뜻, 작가 한 사람이 살아온 길, 작가 한 사람이 이녁 보금자리에서 가꾸는 빛 들을 골고루 짚으며 헤아릴 때에 비로소 ‘상품 해설서 아닌 느낌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번역투가 나타나는 까닭은 한국말을 제대로 모르면서 상품 해설서와 같은 번역을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말을 올바로 배우고 슬기롭게 가다듬는 이라면 번역투로 번역을 하지 않습니다. 한국말로 번역을 하겠지요.
창작을 하는 사람도 한국말을 슬기롭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레 익혀야 합니다. 독자한테 ‘상품 해설’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를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 나라 이웃인 독자(한국사람)가 즐겁게 알아듣고 아름답게 받아들이며 사랑스레 삭힐 수 있도록 한국말을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고 느껴요.
제대로 읽을 때에 제대로 씁니다. 제대로 쓸 때에 제대로 읽습니다. 제대로 볼 적에 제대로 살아갑니다. 제대로 살아갈 적에 제대로 봅니다. 언제나 함께 맞물리면서 이루는 삶이고 넋이며 빛입니다. 삶과 넋과 빛이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태어나는 책입니다. 4347.3.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