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겹 -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안세홍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75

 


살아가는 즐거움과 사진
― 겹겹,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안세홍 글·사진
 서해문집 펴냄, 2013.8.15.

 


  안세홍 님이 글과 사진으로 엮은 사진책 《겹겹,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서해문집,2013)를 읽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아시아 수많은 나라를 식민지로 삼던 지난날, 일본군이 식민지 나라 사람들을 죽이고 괴롭힐 뿐 아니라 돈을 빼앗고 여성을 노리개로 삼다가 성병에 몹시 많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여러모로 말썽이 되기에 일본 제국주의 군대는 식민지 나라 가시내들을 일본군 씨받이처럼 삼으려고 ‘위안부’를 둡니다. 식민지 나라 사내들은 전쟁터로 내몰아 총알받이가 되거나 군수공장이나 탄광으로 내몰려 부속품이 되었습니다.


  가만히 헤아리면, 남녘땅에도 ‘위안부’와 비슷한 곳이 여기저기에 많습니다. 남녘에 있는 미군 부대 둘레에 ‘미국 군인 씨받이’ 구실을 하는 골목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 ‘위안부’라면, 식민지도 강점기도 아닌 오늘날에는 이 나라 정부가 버젓이 눈을 감고 만들어 주는 ‘미국 군인 씨받이 골목’이 있어요.


  군대에 사내만 끌려가지 않고 가시내도 함께 끌려가면 무언가 달라질까 궁금합니다. 그러나, 군대에 가시내까지 함께 끌려간대서 달라지리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전쟁무기와 폭력으로 이루어진 군부대가 있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성폭력’이 함께 도사립니다. 총과 칼과 폭탄과 주먹으로 사람 죽이는 짓을 온몸으로 익히는 군대라는 곳은 지구별 모든 것을 부수거나 망가뜨리는 일을 합니다. 죽음을 부르고 죽음을 바라며 죽음을 노래하는 군대인 터라, 전쟁무기와 군부대를 모조리 없애지 않고서는 평화를 바랄 수 없습니다. 전쟁무기와 군부대를 몽땅 쓸어내지 않고서는 ‘위안부’와 ‘미국 군인 씨받이 골목’ 생채기나 아픔이나 멍에를 풀지 못합니다.

 


.. 30여 분 경로원 주변을 배회하는 동안 할머니가 나물을 한 움큼 쥐고 들어왔다. 할머니의 모습은 그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앞니 네 대가 빠지고, 얼굴이 약간 말랐을 뿐이다. 같은 위안소에서 지낸 동갑내기 김순옥 할머니보다 훨씬 정정해 보였다 … “이젠 가족이 보내준 이 사진 한 장밖에 없어. 유일한 가족사진이지.” 가족과 함께 있어야 할 나이에 할머니는 고향을 떠났다. 겨우 가족들과 연락이 닿았지만 만날 수 없어 고향 가족들이 모여 사진을 찍어 보내 왔다. 할머니는 무엇보다도 이 사진 한 장에 의지해 지금까지 살아왔다 ..  (19, 34쪽)


  ‘위안부’가 되어야 한 사람들은 어디 별나라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어머니이자, 우리 언니이자, 우리 이웃입니다. 우리 아지매이자, 우리 누나이자, 우리 이모와 고모입니다.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수수한 사람들이 ‘위안부’가 되었습니다. 징용과 징병이 되어 수없이 죽고 만 사람들 또한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수수한 넋입니다.


  그러면, 전쟁을 일으키거나 전쟁무기를 만든 권력자는 누구일까요. 이들도 우리 이웃일까요. 이들도 우리 아버지일까요. 이들도 우리 아재이거나 삼촌일까요. 시골에서 조용히 흙을 일구던 사람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군수공장과 탄광으로 끌고 간 그네들은 어디 별나라 사람은 아닐까요.


  생채기와 아픔을 달고 살아온 할머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찍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채기를 만들고 아픈 짓을 일삼은 ‘누군가’를 찾아다니면서 이야기를 듣거나 사진을 찍는 분은 아직 못 봅니다. 두들겨맞은 사람들 이야기는 있습니다. 두들겨팬 사람들 이야기는 없습니다.


  언제나 궁금하다고 생각하는데, ‘위안소’로 찾아갔던 ‘일본 제국주의 군대 병사와 간부’들이 아직 다 안 죽었어요. 이들은 일본에서 할아버지가 되었겠지요.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어쩔 수 없이 위안소에 가야 했던 조선인 할아버지도 있어요. 이분들도 아직 다 안 죽었습니다. 이들을 하나하나 만나고 이야기를 들으며 사진을 찍는 작가들 있을까 궁금합니다. 위안소를 만들라 명령과 지시를 내린 일본 제국주의 권력자 발자취를 살피며 이야기와 사진을 아로새기는 작가들은 몇 사람쯤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제는 ‘위안부 (드나든) 할아버지’ 이야기를 갈무리하면서 전쟁과 평화를 더 또렷하게 밝히고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시먼쯔 위안소는 촌이어도 군부대가 많았어요.” “군인을 적게 받으면 주인이 때렸어요. 일본 군인도 술 마시고 발로 막 때리는 거예요. 눈앞이 노랬지요.” “매 맞고 있으면 여자들이 다 운다 말이야. 마음 달래는 게 창가하고 신세타령이 전부지.” … “내래 죽기 전에 한복 입고 사진 박히는 게 소원인데, 한 장 박아 주소.” 할머니는 그동안 사진관에 가서 사진 한 장 남길 여유가 없었다. 너무나 말라 보이던 몸에 한복을 두르니 그나마 왜소한 몸이 넉넉해 보인다 ..  (45, 51쪽)


  우리 집 큰아이는 2014년을 맞이해 일곱 살입니다. 어느새 일곱 살이로구나 하고 느끼다가는 예전 사진을 돌아보면서 새삼스럽습니다. 오늘은 일곱 살 모습을 마주하지만, 여섯 해 앞서는 갓난쟁이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일곱 해 뒤에는 일네 살 푸름이 모습을 만나겠지요.


  큰아이를 처음 낳아서 돌보던 때를 떠올립니다. 갓 태어나서 세이레를 맞이하기까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젖을 물리는 곁님은 젖몸살에다가 아기가 어머니 곁에서 안 떨어지려 해서 몹시 고단합니다. 아버지가 안아서 재우려 할 때에 잠들면 좋으련만, 큰아이는 아버지 등판이나 가슴에 안겨서는 잠들지 않았어요. 이러면서 삼십 분마다 쉬를 누니 삼십 분마다 기저귀를 갈고, 오줌기저귀 밀리지 않도록 한 시간마다 기저귀를 빨았어요. 마침 큰아이가 태어난 뒤 한 달 남짓 장마철이었습니다.


  밤잠도 낮잠도 이루지 못한 채 꾸벅꾸벅 졸면서 다리미로 기저귀를 말렸습니다. 날마다 미역을 손으로 끊어서 미역국을 끓입니다. 아기가 젖을 물지 않을 적에는 안아서 노래를 부르고 어릅니다. 세이레 지난 뒤 비로소 바깥바람을 쏘이는데, 곁님이 집에서 쉴 수 있도록 한두 시간씩 골목마실을 했습니다. 한손에는 아기를 안고 다른 한손으로는 사진기를 쥔 채 골목이웃 사진을 찍었어요.


  아기는 자라고 자라 두 다리로 섭니다. 두 다리로 서면서 걷습니다. 걸음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아이를 업고 안으면서, 이때부터 서너 시간씩 골목마실을 합니다. 밥을 먹이고서 다시 밥을 먹이기까지 골목꽃 보러 돌아다니면서 지냈어요.


  갓난쟁이였을 적에 늘 어머니 품에서 잠들던 큰아이인데, 작은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늘 아버지 곁에서 잠듭니다. 아버지가 작은아이 재우느라 부르는 자장노래를 옆에서 함께 들으면서 잡니다. 작은아이도 큰아이도 곁님도 시골집에서 아버지가 차리는 밥을 먹으면서 하루를 누립니다. 네 식구 모두 아버지가 손빨래를 하는 옷을 입으며 겨울을 보냅니다. 두 아이는 아버지가 모는 자전거를 함께 타고 마실을 다닙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어느 하루도 아이하고 떨어져 지내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버이 둘레에서 맴돕니다. 다른 데에 마음을 쓸 수 없고, 하루 내내 아이들 앞바라지 옆바라지 뒷바라지를 한는 셈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누리는 삶은 힘이 드는가? 글쎄, 이제껏 힘들다는 생각은 아직 해 본 적 없습니다.

 


.. 부산에서 만난 조카 귀남이 할머니는 같은 해에 한국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되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등록 절차를 밟지 않았다. 할머니가 방문할 당시 오래전에 한국에서 사망 신고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한국에서 살 곳도 없고, 늙어서 돈을 받아 어디에 쓰갔어. 귀찮아.” … 할머니는 베이징에서 살면서도 한국말을 잊지 않기 위해 혼자 있을 때면 조선 노래를 부른다 ..  (72, 75쪽)


  아이들이 밥을 먹습니다. 무엇을 차리든 맛나게 먹습니다. 풀밥을 먹고 된장국을 먹습니다. 무채를 먹고 오이채를 먹습니다. 나물버무림을 먹고 곤약을 먹습니다. 아이들은 늘 수수한 밥을 먹습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버이도 언제나 수수한 밥을 먹습니다. 수수하게 살아가니 아이들을 사진으로 찍으면 수수한 빛이 감돕니다. 수수하게 지내는 시골마을이기에, 우리 보금자리를 사진으로 담으면 수수한 내음이 깃듭니다.


  안세홍 님이 선보이는 사진책 《겹겹》에 나오는 할머님들 삶자리를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모두들 더없이 수수한 집에서 그지없이 수수한 살림을 꾸립니다. 수수한 얼굴이요 수수한 목소리이지 싶습니다. 이분들이 살아가는 곳은 중국일 뿐, 내가 우리 식구들과 지내는 보금자리하고 똑같은 살림살이입니다. 똑같은 마음이고, 똑같은 사랑입니다.


  집 언저리를 돌며 풀을 뜯어 먹습니다. 손님이 찾아오면 밥을 대접하고 싶습니다.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기쁠 적에는 활짝 웃고, 슬플 때에는 아프게 웁니다. 할머님들은 모두 역사 한 자락을 살아내셨는데, 이 할머님들이 ‘위안부’ 아닌 ‘그냥 식민지 여성’으로 살아내셨어도 모두 역사 한 자락을 살아내셨으리라 느낍니다. 안세홍 님이 할머님한테서 들은 이야기는 ‘역사책에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하루하루 살아온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역사책에 나와야 역사가 아닙니다. 살아온 나날이 모두 역사입니다. 대통령 이름이나 무슨무슨 대단한 사람들 발자취가 역사이지 않습니다. 아니, 대통령 이름도 역사가 되겠지요. 그리고, 대통령도 시장도 군수도 아닌 사람들, 여느 시골마을 할매와 할배 이야기도 역사입니다. 《겹겹》에 나오는 모든 할머님들 이야기도 역사입니다. 《겹겹》에 나오는 할머님들 이웃 이야기도 역사예요.

 


.. “꽃이 피어오르는 걸 끊어낸 거지.” … “늙은이 사진을 이렇게 많이 찍어 어디에 써.” 사진을 많이 찍어 그 중에서 좋은 사진을 골라 드린다고 했다. “인제 그만 찍어. 혼이 나가. 혼이 나가면 몸이 아파. 조금만 찍어.” … 점심때가 되어 할머니한테 같이 식사하러 나가자고 권하니, 일없다며 사양한다. 오히려 할머니는 점심 먹고 가라며, 부엌에서 달걀 대여섯 개를 들고 나온다 ..  (89, 97. 136쪽)


  일본에서 사진잔치를 열려고 했다는 안세홍 님입니다. 그런데 ‘니콘’이라는 회사가 갑자기 말을 바꾸고 사진잔치를 가로막았다고 합니다. 그렇겠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럴 만하지 않나요?


  더 많은 사람한테 사진을 보여주어도 할머님들 이야기를 널리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꼭 더 많은 사람한테 사진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한테라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으면 됩니다. 굳이 어떤 사진관이나 전시관에 사진을 걸어야 하지 않아요. 길거리에 사진을 걸고서, 지나가는 사람 아무한테나 사진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겹겹》에 나오는 할머님들이 ‘어디 먼 별나라에서 똑 떨어진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여느 수수한 이웃’인 만큼, 사진관이나 전시관까지 찾아오는 사람들한테뿐 아니라, 이냥저냥 ‘수수한 마을 한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사진을 붙여서 조용히 보여줄 수 있습니다.


  사진은 보고서가 아닙니다. 사진은 기록물이 아닙니다. 사진은 보도자료가 아닙니다. 사진은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사진은 고발이 아닙니다. 사진은 역사자료가 아닙니다. 사진은 언제나 사진입니다.


  사진책 《겹겹》은 사진과 함께 이야기로 엮습니다. 그예 사진인 사진이 하나 있고, 그저 이야기인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겹겹》에 깃든 이야기는, 다 다른 할머님이 다 다르게 걸어온 삶길입니다. ‘어느 한 점’에 머문 이야기 아닌, 조선반도 남녘이나 북녘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어느 한때를 식민지 백성으로 생채기를 받은 뒤, 기나긴 나날을 중국에서 뿌리를 내려 살아온 이야기입니다.

 


.. 할머니와 헤어질 무렵 아들이 택시운전 일을 마치고 돌아옸다. 아들은 할머니의 과거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게 조사하고 사진을 찍어 가는데도 할머니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또 다시 할머니에게 상처가 된다고 생각한다 … 할머니는 열아홉 살에 집안의 가난을 덜기 위해 시집갔다. 남편 얼굴도 모른 채 부산에서 가까운 시골로 간 것이다. 도시에서 자란 할머니에게는 목화, 길쌈 등 농사일이 버거웠다. 시어머니한테 구박받다가 1년 만에 쫓겨났다. 친정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식당에서 일했다. “그저 공장일이나 허드렛일만 하면 되는 줄 알았지.” “먹고살 일이 걱정이라 돈을 벌 요량으로 스무 살에 만주로 왔지.” ..  (143, 169쪽)


  안세홍 님은 사진책 《겹겹》을 흑백사진으로 묶습니다. 흑백사진이 드리우는 빛깔과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문득, 이 사진책 곳곳에 흑백 아닌 무지개빛 사진이 나란히 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할머님들 누구나 ‘끊어진 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본 제국주의 권력자와 군대는 할머님들이 젊은 나날 보내야 했던 지난 한때에 ‘꽃을 끊으려’ 했습니다만, 할머님들은 젊은 나날을 보내고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고운 꽃’으로 씩씩하게 맑은 내음과 밝은 빛을 드리웠어요. ‘꽃’을 사진으로 담을 적에 흑백사진도 얼마든지 쓸 수 있습니다만, ‘꽃’을 사진으로 담는 만큼, 얼마나 아름다운 삶빛이 흐드러지고 쏟아지며 눈부시는가 하는 이야기를, 때때로 무지개 무늬로 살포시 담으면 어떠했을까 싶어요.


  시골마을에서 네 식구 살아가면서 노상 느껴요. 우리 아이들 모습을 흑백사진으로 찍어도 되게 멋있어요. 새삼스러운 빛을 느낍니다. 흑백사진을 찍으면, 우리 아이들 얼굴과 모습이 한결 도드라집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아이들을 으레 무지개빛으로 담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예쁠 뿐 아니라, 아이들이 지내는 이 시골마을 보금자리 빛깔이 더할 나위 없이 고우면서 환하거든요. 아이들이 지내는 삶터 무늬와 바람과 볕살을 함께 사진으로 담고 싶기에 늘 무지개빛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에서 살아가는 ‘위안부’ 할머님들이 조그마한 집에서 손님맞이를 하려고 달걀을 부치는 모습도, 집 언저리에서 풀을 뜯어서 나물로 삼는 모습도, 조용히 드러누워서 쉬는 모습도, 오랜 나날 손길과 손때 밴 밥그릇이나 부엌 살림살이 모습도, 햇살 드리우는 무지개빛 사진으로 넌지시 보여준다면, ‘이야기’가 새삼스러울 수 있겠구나 생각합니다.


  지는 꽃도 아름답습니다. 진 꽃도 아름답습니다. 동백꽃이 송이째 툭툭 떨어져도 아름답습니다. 꽃은 져야 합니다. 꽃이 져야 씨앗을 맺습니다. 꽃이 지고 씨앗을 맺어야 새롭게 피어날 꽃을 낳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총칼은 할머님들이 푸릇푸릇한 꽃이었을 적에 군화발로 짓밟으려 했지만, 이 꽃들은 꺾이지도 끊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아기를 밸 수 없는 몸이 되었어도 씩씩하게 새 삶이라는 꽃을 피웠어요. 꽃송이가 툭툭 떨어졌어도 어느새 씨앗을 맺고 어느새 이 씨앗이 새로운 터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새롭게 뿌리를 내린 꽃씨는 천천히 자라 꽃나무 됩니다. 꽃나무 둘레로 벌과 나비가 찾아들고, 꽃내음이 마을 한자락을 따사롭게 보듬습니다.


  살아가는 즐거움이 없다면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꽃을 피우려는 마음을 곱다시 보듬어 즐겁게 살아가려고 다짐합니다. 수수하게 살고 투박하게 살림을 꾸립니다. 작은 꽃도 아름답고 수수한 꽃도 아름답습니다. 들꽃도 아름답고 시골꽃도 중국꽃도 모두 아름답습니다. 할머님들은 언제나 꽃입니다. 4347.1.2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ppletreeje 2014-01-23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나왔을 때 읽고는 싶었는데, 어쩐지 마음이 너무 무거울까봐 쭈밋거리다
못 보았어요. 그런데 함께살기님께서 삶으로 삭히고 쓰신 느낌글을 읽으니 이젠 <겹겹>을 보아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보슬비님께서도 도서관에서 대출하셨다는 페이퍼를 보았는데, 저도 얼른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어야겠습니다~
'겹겹'이란 제목에 들어있는 마음도, '할머님들은 언제나 꽃입니다.'하신 마지막 말씀도 다 좋네요.
오늘도 훌륭하고 좋은 글, 감사히 잘 읽다 갑니다~*^^*

숲노래 2014-01-23 12:22   좋아요 0 | URL
저는 1990년대 첫무렵부터 나온 정대협 책들을 다 읽고 하나하나 모아서 그러한지는 몰라도, 이 책은 그다지 '무겁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이 느낌글에서도 밝히기는 했는데, 할머님들을 '무겁게' 바라보아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실마리를 못 맺으리라 느껴요. 이분들도 모두 우리와 살가운 '이웃'이니까요. 1990년대에 처음 자료집을 내고 세상에 크게 알리려 할 적에는 '무거운' 대목을 많이 짚어야 했다면, 이제는 '할머님들 살아온 나날'을 되새기면서, 우리들이 서로를 어떤 이웃으로 느끼면서 어깨동무를 해야 할까를 헤아려야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