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문화재단 사외보 2014년 1-2월호에 싣는 글입니다. 지난해 11월에 써 두었고, 이제 비로소 올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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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21. 우리와 함께 있는 말
― 누가 언제 쓰는 말일까

 


  아이한테 읽히려고 그림책을 장만합니다. 그림책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읽히기도 하지만, 아이가 한글을 천천히 익히면서 스스로 읽을 책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어버이 목소리를 들으며 말을 익히고, 나중에는 눈빛을 밝혀 글을 깨칩니다.


  어느 책이건 아이한테 먼저 쥐어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창작 그림책이건 번역 그림책이건 아이들 삶과 걸맞지 않다 싶은 낱말이나 말투가 깃들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아무렇지 않게 쓰지만, 아이한테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없는 낱말과 말투가 있어요. 이를테면, 요새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조차 ‘생일잔치’ 아닌 ‘생일파티’라 하고, 어느 곳에서는 ‘버스데이 파티’라고까지 합니다. ‘버스데이 파티’라 하는 곳은 아이들한테 영어를 더 가르치려 하는 곳인데, 요즘 어른들 가운데 ‘파티’가 영어이고 ‘잔치’가 한국말인지 아는 분이 무척 적어요. 이리하여 ‘돌잔치’ 아닌 ‘돌파티’를 ‘럭셔리’하게 하는 어른들이 있어요.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참말 이렇습니다. 어느 그림책을 읽다가 ‘생일파티 미션’이라는 말이 흐르기에 이내 덮었어요. 도무지 보아주기 힘들더군요.


  스웨덴에서 1983년에 처음 나오고, 한국에서는 2011년에 옮긴 그림책을 아이한테 읽히기 앞서 차근차근 살피다가, “첫눈은 뭔가 특별하고 멋지니까요”라든지 “눈에게 불공평하게 굴지는 않아요”라든지 “눈은 자작나무 숲 위로 펑펑 내리고 있어요”라든지 “한손 부인”과 “한손 씨”와 같은 말투를 봅니다. “계속 달리기만”하고 “내처 달렸어요” 같은 말투도 봅니다.


  아이들한테 ‘다르다’나 ‘남다르다’라는 낱말을 들려주는 어른이 아주 드문 요즈음입니다. ‘까다롭다’라는 낱말을 쓰는 어른도 퍽 드뭅니다. 어른들 스스로 “첫눈은 뭔가 남다르고 멋지니까요”라든지 “눈한테 까다롭게 굴지는 않아요”처럼 말하지 않아, 아이들은 ‘남다르다’라든지 ‘까다롭다’ 같은 낱말을 어른으로 자라기까지 좀처럼 못 듣습니다.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쓰자면 “눈은 자작나무 숲에 펑펑 내려요”처럼 손질해야 합니다. 눈은 “숲 위로”가 아닌 “숲에” 내립니다. “지붕 위로” 쌓이는 눈이 아니라 “지붕에” 쌓이는 눈입니다. 영어 현재진행형을 잘못 옮겨 “내리고 있어요”라 적지만, “내려요”로 바로잡아야 올발라요. 어른들 읽는 책에서도 올바로 가누어야 아름답고, 아이들 읽는 책에서는 더욱 마음 기울여 올바로 가누어야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한손 부인” 아닌 “한손 아주머니”요, “한손 씨” 아닌 “한손 아저씨”입니다. 아이들이 어른한테 “한손 부인” 하고 부르겠습니까. “한손 아주머니(아줌마)”라 부르지요.


  누가 언제 쓰는 말인가 하고 찬찬히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어른들이 으레 쓰는 말을 아이들이 흔히 들으면서 자라는 줄 알아차려야 합니다. 예부터 말매무새 올바로 가다듬으라 했어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했습니다.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뜻일 뿐 아니라, 어른들이 하는 모든 말을 아이들이 고스란히 듣는다는 뜻이에요. 어른들끼리 있는 자리에서 어른들 내키는 대로 아무 말이나 주고받는다 하더라도, 이런 말이 모두 아이들이 주고받는 말로 이어져요. 여느 때에 언제나 아름답게 말할 줄 아는 어른이어야, 아이들 또한 언제나 아름답게 말하는 삶 물려받습니다. 어느 자리에서나 늘 사랑스레 말할 수 있는 어른이어야, 아이들도 늘 사랑스레 말하고 글을 쓰는 넋 이어받아요.


  정일근 님이 쓴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창비,1987)을 읽다가 8쪽에서 “대청마루 떡하니 놓인 쇠북을 보면”이라는 대목을 만났어요. 제 이름 ‘최종규’에서 ‘종’은 한자로 적으면 ‘쇠북 종’입니다. 제 이름에 깃든 ‘종’이라는 한자를 ‘쇠북’으로 읽는 줄 어릴 때부터 알기는 했지만 쇠북이 무엇인 줄 가르쳐 주는 어른이 둘레에 없었어요. 다른 동무는 예쁘거나 멋지다 싶은 뜻(새김)을 이름으로 얻는데, 나는 쇠북이 뭐냐, 웬 이름이 이러한가, 하고 여겼습니다. 아마 어른들도 쇠북이 무엇인 줄 제대로 몰랐구나 싶은데, 나이 서른을 한참 넘긴 어느 날 스스로 쇠북을 깨달았어요. 쇠로 만든 북이라 쇠북이요, 쇠북이란 ‘종’을 가리키는 한국말이었습니다. 떵떵 울리는 ‘종’은 중국말이었어요.


  이오덕 님이 쓴 동화책 《종달새 우는 아침》(굴렁쇠,2007)을 읽으며 31쪽에서 “나만은 내일 학교를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대목을 만납니다. 무릎을 철썩 칩니다. 그래요. 저도 어릴 때부터 ‘쉰다’는 말을 자주 듣고 썼어요. 몸이 아프면 학교를 쉽니다. 어른이 된 뒤에는 몸이 아픈 날 회사를 쉽니다. 네 식구 살아가는 시골집에서 몸이 고단하면 집일을 살짝 쉽니다. 학교나 회사를 다닐 적에는 “학교를 빠진다”라 말하기도 했어요. 이럴 때마다, 학교에서는 ‘결석’이라는 말을 썼고, 회사에서는 ‘결근’이라는 말을 썼어요. 서류에는 이런 낱말 써야 한다고 하지만, 왜 서류에 ‘쉼’이라는 말을 쓸 생각은 못 할까요.


  우리 겨레가 한자를 쓴 지 1500년이 되었다고 말하는 분이 있어요. 그러나 우리 겨레가 한자를 쓰지는 않았어요. 임금님과 신하와 지식인만 한자를 썼어요. 서울에 모이거나 읍내에 모인 몇몇 관리와 지식인, 여기에 임금님만 한자로 글을 썼을 뿐, 글 아닌 말에서는 모두 ‘한자 아닌 한국말’이었어요. 99.9%를 훨씬 넘는 여느 사람들은,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일하면서 ‘정갈하고 고운 한국말’을 썼습니다. 정치와 행정 맡은 이들이 한자를 받아들여 썼다지만, 다른 거의 모든 사람은 한자를 모르는 채 한국말만 알뜰살뜰 주고받았어요.


  여느 시골사람은 ‘물들이기’를 하지만, 관리와 지식인은 ‘염색’을 말합니다. 여느 시골사람은 ‘흙(논밭) 일구기’를 하지만, 관리와 지식인은 ‘농사’를 말합니다. 더 낫거나 더 좋은 말은 따로 없다고 느껴요. 우리가 쓰는 말이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말입니다. 우리가 선 자리에서 말이 새로 태어나고, 우리가 생각하며 사랑하는 자리에서 말이 새로 자랍니다. 아이 앞에서뿐 아니라, 어른 스스로 삶과 넋 곱고 사랑스레 돌보며 말과 글 나란히 곱고 사랑스레 돌보기를 빌어요. 삶사랑이 말사랑 됩니다. 삶가꾸기가 말가꾸기 됩니다. 삶짓기가 말짓기 돼요. 4346.11.2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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