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희 1
강경옥 글.그림 / 팝툰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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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300

 


이 땅에 흔한 이야기는 없다
― 설희 1
 강경옥 글·그림
 팝툰 펴냄, 2008.8.12.

 


  이 땅에 흔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너무 흔한 나머지 누구나 다 쓸 수 있는 이야기는 한 가지조차 없습니다. 이 땅에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나도 두 아이는 빈틈없이 똑같지 않아요. 어버이는 알지요. 둘 가운데 누가 누구인 줄.


  누군가 어느 작품을 흉내내거나 베낀다고 할 적에, 두 작품이 똑같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아무리 똑같이 흉내내더라도 똑같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비슷하게 베끼더라도 비슷하게 되지 않아요. 둘은 사뭇 다릅니다.


  곧, 아주 흔하다 싶은 글감을 놓고 글을 쓰더라도 ‘빈틈없이 똑같은 두 작품’이 나오지 않습니다. 둘은 사뭇 다른 넋과 빛으로 태어나는 새로운 작품입니다.


  그런데, 어느 작품 하나를 놓고 흉내내거나 베끼려는 마음으로 작품을 새로 빚을 적에는 ‘똑같다’라든지 ‘비슷하다’라든지 느끼곤 해요. 왜냐하면, 줄거리나 흐름이나 이야기가 ‘다르다’ 하더라도, 어느 작품 하나에서 비롯한 넋과 빛을 ‘가로채’거나 ‘훔쳐’서 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만화책 줄거리와 이야기를 훔쳐서 연속극을 만들 적을 헤아려 봅니다. 연속극에서 만화책 주인공과 무대와 다르게 꾸민다든지, 줄거리에 살을 붙인다든지 하면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여러모로 장치를 집어넣을 텐데, 이렇게 살을 붙이거나 장치를 집어넣거나 줄거리 틀이나 얼개를 바꾼다 하더라도, 나는 두 작품이 ‘똑같다’거나 ‘비슷하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베끼거나 훔쳤기 때문입니다.


- “아름답겠지. 마지막 본 게 10년 전이던가.” (10쪽)
- “흠, 한번 보고 괜찮으면 네가 꼬셔도 괜찮지 않니? 어차피 섬에서 자라 네가 손 한 번 까딱 해도 넘어올 텐데.” “어머니 그 애 싫어하지 않았어요?” (17쪽)
- “그 애 친자 감정 이런 거 안 해도 돼요? 결혼도 하지 않고 낳은 자식인데 확인해야지요.” “그런 건 의미가 없죠. 수양딸로 들인 이상에는 친딸이냐 아니냐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마커스도 유산을 받지 않았습니까. 주위 눈을 좀 생각하시죠, 부인.” (23쪽)
- “아버지를 10년 전에 마지막으로 보고 못 봤는데, 그 0년 동안 행복하셨나요?” (58쪽)

 

 

 


  새로 만드는 사람, 이른바 ‘창작’하는 사람한테서는 똑같다 싶은 작품이 하나도 안 나옵니다. 새로 만들지 않는 사람, 이른바 ‘표절’하는 사람한테서는 똑같다 싶은 작품이 자꾸 나옵니다.


  스스로 마음을 기울일 때에 새로운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니 새로운 이야기가 샘솟지 않습니다.


  논문을 쓰든 책을 쓰든, ‘다른 사람이 쓴 책이나 글’에서 따오는 일은 나쁘지 않아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쓴 책이나 글에서 ‘배운 즐거움과 보람’을 밝히는 일이거든요. 그리고, 다른 사람이 쓴 책이나 글에서 따온 대목을 ‘낱낱이 밝혀’ 이렇게 아름다운 책과 글이 있기에, 나는 ‘새로운 글을 써서’ 여러분 앞에 선보일 수 있다고 이야기해야 올바르고 아름답습니다.


  올바르지 않을 때에는 착하지 않습니다. 아름답지 않을 때에는 참답지 않습니다. 모든 문학과 문화와 예술과 교육과 사회와 정치와 과학은 ‘올바름’과 ‘아름다움’을 밑틀로 삼아 태어나요. 올바르지 않은 문학이 착할 수 없는 만큼, 올바르지 않은 문학이 어떻게 되겠어요? 바로 일제식민지 때에 드러난 변절문학이 됩니다. 아름답지 않은 문학이 참다울 수 없는 만큼, 아름답지 않은 문학이 어떻게 되겠어요? 바로 독재정권 때에 나타난 독재찬양 문학이 됩니다.


  일제강점기에 변절문학을 한 이들이, 해방 뒤에 독재정권을 찬양하는 시를 쓰고 소설을 쓰며 위인전을 썼습니다. 이들은 올바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아름답지도 않았어요. 착하지도 못하고 참답지도 못하지요. 그러면, 이렇게 변절문학과 독재찬양 문학을 해서 무엇을 얻느냐? 돈을 얻어요. 이름을 얻어요. 힘, 바로 권력을 얻어요. 문단권력을 누리면서 돈과 이름을 새롭게 거머쥘 뿐 아니라, 문단권력을 단단히 키워서 새로운 작가들이 새로운 꿈을 새로운 이야기로 키우는 길을 꽁꽁 틀어막곤 합니다.


- “21억 달러. 그게 얼마죠?” “뭐, 개인이 평생 쓰기에 모자라진 않는 돈이죠.” (29쪽)
- “아, 잠깐 세워요. 나, 뉴욕 핫도그 먹고 싶어요! 아, 맛있다.” (33∼34쪽)
- “피어슨 씨는 돈 버는 걸 좋아하나요?” “네? 그게 내 직업이죠.” “그럼 돈만 벌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나요?” “무슨 뜻이죠?” “난 내가 정당하게 번 돈을 좋아해요. 그럼 좋아하는 자신의 일을 해 주세요. 당신이 수고한 만큼 돌려드리죠.” (36∼37쪽)
- “알리사 양에게 돈의 개념은 무엇입니까.” “파가니 존다는 100만 달러. 아까 산 원피스는 120달러. 핫도그는 1달러. 단지 그거예요.” (39∼40쪽)

 

 

 

 


  이 땅에 흔한 이야기란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땅에 새로운 이야기도 없습니다. 모든 이야기는 다 어디에선가 태어난 이야기입니다. 처음부터 나 혼자서 새롭게 지을 수 있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풀이 자랐기에 풀을 이야기할 수 있어요. 내가 풀을 만들지 않습니다. 꽃이 피었기에 꽃을 노래할 수 있어요. 내가 꽃을 만들지 않습니다. 내가 해와 달과 별을 만들지 않았어요. 그렇지요? 내가 냇물과 골짜기와 들을 만들지 않았어요. 그렇지요? 그러니, 숲을 노래하거나 바람소리를 노랫가락으로 옮긴다 하더라도 ‘내가 새롭게 지은’ 이야기, ‘창작’이 아니라 할 만합니다.


  이 땅에서 나 스스로 새롭게 지어낼 수 있는 이야기는 틀림없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흐르는 모든 이야기는 ‘나 스스로 새롭게 바라보’면서 새롭게 빛납니다. 풀 한 포기는 내가 따사로운 눈길로 바라보면서 푸른 숨결을 나누어 줍니다. 꽃 한 송이는 내가 그윽한 눈빛으로 마주하면서 고운 무늬를 베풀어 줍니다. 바람 한 줄기는 내가 온몸으로 맞아들이면서 싱그러운 기운을 흩뿌려 줍니다.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나 만화나 노래나 춤이나 온갖 모습으로 ‘창작’할 수 있는 바탕은 이런 데에 있어요. 나 스스로 새롭게 눈을 뜨니 언제나 ‘새롭게 지어낼’ 수 있어요. 새롭게 눈을 뜨지 않으면 어느 하나 새롭게 짓지 못해요. 새롭게 눈을 뜨는 사람은 시도 소설도 마음껏 써요. 새롭게 눈을 뜨는 사람은 시도 소설도 마음껏 읽어요.


- ‘아, 역시 자연이 좋긴 좋아. 할 수 없군.’ (65쪽)
- “있죠, 사실 난 가끔 같은 꿈을 꾸거든요. 그 꿈에서 한 남자와 결혼해서 사계절을 보내며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아요. 하지만 그 사람은 전쟁터에 나가 죽고 말죠. 나는 꿈에서 너무나도 슬퍼하다 잠이 깨죠.” (85쪽)

 

 

 


  강경옥 님 만화책 《설희》(팝툰,2008) 첫째 권을 퍽 예전에 읽었습니다. 2013년에 어느덧 아홉째 권까지 나왔습니다. 퍽 예전에 읽고 지나갔는데, 요즈음 새롭게 다시 읽습니다. 뚱딴지 같다고 해야 할는지, 어처구니없다고 해야 할는지, 어느 방송작가께서 이 만화책 이야기를 훔쳐서 연속극 대본으로 쓰고는 돈과 이름과 힘을 거머쥐기 때문입니다.


  돈과 이름과 힘을 거머쥐려는 모습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아름답게 일해서 아름답게 돈을 벌면 아름답습니다. 착하게 일해서 착하게 이름을 누리면 착합니다. 참다운 길을 걸어가면서 참다운 힘을 얻는 일은 참답습니다.


- “그렇게 돈이 갖고 싶었어요? 사람을 죽여서라도?”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모른 체한다고 자신이 한 일이 바뀌지는 않지요.” “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이게 무슨 예의 없는 소리니?” “댁을 보니 그 10년 동안 양부 벤더스 씨는 행복하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164∼165쪽)
- “날 죽이고서 속이 시원했니? 죄책감은 조금 느끼셨나?” “나, 난 그런 적 없어. 무슨 소리야. 넌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잖아.” “남을 죽였으면 그 대가는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사람을 죽이고도 멀쩡히 돈 챙겨서 살아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 “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좀 솔직해지지 그래. 나를 죽인 사진을 그놈들이 보냈을 텐데, 어땠어?” (166∼167쪽)
- “웃기시네. 그 선택에 누가 강요를 했나? 넌 벤더스를 만났을 때 그걸 (돈 거머쥘)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아니야? 저 세상에서 사람을 죽인 참회나 하셔.” (168쪽)

 

 

 

 


  만화책 《설희》에 나오는 줄거리와 이야기와 주인공과 말(대사)은 ‘새롭지’ 않습니다. 나는 1986년부터 강경옥 님 모든 만화책을 다 읽었습니다. 이번에 《설희》뿐 아니라, 1986년에 처음 선보인 《이 카드입니까》를 비롯해 다른 작품을 하나하나 새롭게 다시 읽으며 생각합니다. 강경옥 님은 1980년대에도 ‘판타지’나 ‘에스에프’라 할 만화를 순정만화로 그렸습니다. 《설희》는 2008년에 첫 낱권책으로 나오고 2013년에 아홉째 권까지 나왔는데, 이 만화에 흐르는 고갱이는 서른 해 앞서 선보인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1986년에 선보인 작품에서든 2013년이나 2014년에 선보이는 작품에서든, 작가 이름을 가린 채 만화책을 들추더라도 ‘아하, 이 작품은 강경옥 님 작품이네!’ 하고 알아채거나 느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딱 강경옥 님 넋과 빛이 드러나는 작품인 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줄거리와 이야기와 주인공은 언제나 다르지만, 수많은 작품에서 나타나거나 드러나는 넋과 빛은 모두 같아요.


  언제나 ‘같은’ 넋과 빛을 작품 하나에 담습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같은’ 넋과 빛을 언제나 ‘다른’ 이야깃감을 찾고 살펴서 그립니다. 이리하여, 《이 카드입니까》는 늘 《이 카드입니까》이고, 《설희》는 늘 《설희》이지요. 만화책 《설희》에서 흐르는 줄거리와 이야기와 주인공이라든지 여러 가지를 훔쳐서 연속극 대본으로 삼은 그분은 ‘난 설희를 본 적 없어’ 하고 말하지만, ‘만화책 설희를 이루는 밑틀’을 훔친 모습이 드러나기 마련이에요.


- “당신은 운이 좋아. 정말로 정말로 운이 좋은 거야. 그러니 만족할 줄 알고 살라고. 좋은 일 하면서 살든지 말든지 그건 당신 인생이니 참견 않겠지만, 두 번 다시 나한테는 관여하지 마. 이번에 제대로 죽고 싶으면 다시 한 번 일 벌여 봐! 나에 대해서 파고들어와 봐!” (172∼173쪽)
- “마커스, 여기는 현실이에요. 나를 보고 괜히 그걸 잊지 말아요. 마커스가 본 건 나의 현실일 뿐이에요. 나만의 현실. 이런 능력이 있다고 물리쳐야 할 악당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도 그저 살아가야만 하는 한 인간일 뿐이에요.” (181쪽)


  변절문학이라 하더라도 어느 작가 한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사랑할 노릇입니다. 독재정권 찬양을 일삼은 작가라 하더라도 이이가 빚은 다른 ‘순수문학’을 ‘순수하게’ 즐기고 싶다면 즐길 노릇입니다. 어느 작가께서 ‘어느 정당 아무개’를 찬양하거나 말거나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독자로서는 어느 작가가 보여주는 ‘정치 성향’ 때문에 어느 작가를 좋아한다고 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화책 《설희》를 표절한 연속극을 즐기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즐길 노릇입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만화책 설희를 표절한 연속극’을 ‘표절해서 영화를 찍을’ 수 있고, ‘만화책을 표절한 연속극을 표절한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독자라는 자리에 있는 사람 스스로 ‘아무 생각 없이 작품만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독자는 어떤 작품을 즐기더라도 스스로 고운 넋과 맑은 빛으로 이야기 하나 사랑스럽게 누릴 때에 독자입니다.


  그래서, 어느 작품을 놓고 생각하든, 독자로서 바라보면 ‘원작’이든 ‘표절작’이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표절 작품은 독자로서 바라보면 아주 흐리멍덩해지고 맙니다. 표절 작품은 ‘작가’로서 생각하고 ‘사람’으로서 바라볼 일입니다. 다른 사람 창작품을 훔치거나 베껴서 돈과 이름과 힘을 거머쥐면 표절작가 스스로 어떤 보람과 즐거움과 사랑이 싹틀까요? 다른 사람 창작품을 훔치거나 베껴서 거두는 돈과 이름과 힘으로, 이 표절작가는 얼마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삶을 누릴 만할까요?


  배고픈 나그네는 다른 사람 밭에서 자라는 무 한 뿌리나 토마토 한 알을 서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 밭에서 자라는 무와 토마토를 훔쳐서 저잣거리에서 내다 팔려고 한다면?


  서리와 도둑질은 다릅니다. 배움과 도둑질은 다릅니다. 나눔과 도둑질은 다릅니다. 논문에서 ‘출처’를 제대로 밝히지 않으면 모두 ‘표절 논문’이 됩니다. 연속극과 영화도 이와 같아요. 연속극과 영화를 찍을 적에, 이 연속극과 영화에 담는 이야기와 줄거리와 주인공을 꾸밀 수 있도록 밑바탕이 된 ‘다른 작품’을 제대로 밝히고 저작권사용료를 떳떳이 치르지 않는다면, 그저 도둑질이 될 뿐입니다. 4347.1.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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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4-01-05 0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이 강경옥님의 <설희>군요!
표절작품은 '작가'로서 생각하고 '사람'으로서 바라볼 일입니다.-라는 말씀에
마음이 기울입니다.
그렇겠네요. '다른 사람 밭에서 자라는 무와 토마토를 훔쳐서 저잣거리에 내다 팔려고 한다면?'

숲노래 2014-01-05 09:47   좋아요 0 | URL
어떤 작가도
다른 사람들 수많은 작품을 즐기고 누리면서
새롭고 좋은 마음을 살찌워요.
그러니, '완전한 창작은 없다'고 할 만해요.
그런데, 다른 작가와 작품에서 배웠으면
'배운 고마움'을 제대로 밝힐 수 있어야겠지요.

배우기와 훔치기란
너무나도 다른 울타리이니,
이 사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다면
... 안타깝게도 '표절작가'가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