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로는 책을 읽힐 수 없다

 


  스스로 마음속에서 우러날 때에 비로소 책을 읽습니다. 누가 시켜서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교육과정이나 시험점수를 들이밀며 시킨들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입사시험이나 승진시험을 들먹이며 시킨들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간행물윤리위원회나 문화체육관광부나 문화재단에서 시키기에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시청이나 군청에서 시킨다 하더라도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시장이나 군수가 ‘책도시’나 ‘책마을’ 이름을 들먹이니까 책을 읽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언제라도 스스로 마음속에서 우러날 때에 비로소 책을 읽습니다.


  올바른 사회가 되도록 하자면 사회운동을 해야 할까요? 올바른 정치가 되도록 하자면 정치투쟁을 해야 할까요?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막는 길은 무엇일까요? 국회투쟁을 하거나, 누군가 국회의원이 되거나, 누군가 대통령이 되면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막을 수 있을까요? 밀양 송전탑을 어떻게 막을까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는 어떻게 막을까요? 미군기지 문제와 전쟁무기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두 ‘정치’로 풀고 맺는 일인가요? 대통령 한 사람 떡하니 나타나야 풀 수 있을까요? 국회의원 몇 사람이 소매를 걷어붙여야 풀거나 맺을 일인가요?


  정치로는 책을 읽힐 수 없습니다. 정치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습니다. 정치로는 정치조차 바꾸지 못합니다.


  책은 저마다 다른 삶으로 읽습니다. 아이를 낳고 돌보며 살림을 꾸리는 바쁜 틈틈이 살짝살짝 말미를 내어 책을 읽습니다. 흙을 만지거나 기계를 다루면서 살짝 숨을 돌려 땀을 씻는 겨를에 조용조용 책을 읽습니다. 버스나 전철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잊고 덜덜 흔들리는 몸을 가누면서 아늑하게 책을 읽습니다.


  나한테 돈이 억수로 많아 아무 일을 안 할 수 있어야 책을 읽지 않습니다. 나한테 돈이 엄청나게 많아 어느 책이든 마음껏 장만할 수 있어야 책을 읽지 않습니다. 밥을 안 지어도 되거나 빨래를 안 해도 되기에 책을 읽지 않습니다. 아이들하고 놀아 주지 않아도 되거나 아이들 가르치는 몫을 남한테 떠맡겼기에 책을 읽지 않습니다. 자가용하고 헤어진들 책을 읽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살더라도 책을 읽지 않습니다. 집에 따로 서재를 마련하니까 책을 읽나요? 돈이 많거나 대학교를 다녀야 책을 읽나요?


  올바른 정치가 서자면, 사람들 스스로 올바른 삶을 세워야 합니다. 스스로 올바르게 살아가면 올바른 정치가 됩니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끝장내자면, 사람들 스스로 올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 나라 사람들 모두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는데, 도시에서 태어났어도 시골로 갈 생각을 않는데, 온갖 자유무역협정이 끝없이 불거질밖에 없습니다. 멀리서 찾아와 도와주는 이들 있으니 밀양 송전탑 말썽을 풀는지 모릅니다만, 밑바탕이 달라지지 않아요. 송전탑은 밀양에만 있지 않아요. 온 나라에 엄청나게 많아요. 송전탑이 왜 설까요? 바로 사람들이 몽땅 도시에 몰려 살아가면서 엄청난 물질문명을 누리기 때문이에요. 도시에서 살더라도 전기를 집집마다 스스로 만들어 쓸 생각을 안 하기 때문이에요. 밀양 송전탑을 안 하면 청도 송전탑을 하면 될까요? 사람 없는 아름다운 숲을 망가뜨리며 송전탑을 놓으면 될까요? 평화 아닌 전쟁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니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말썽이 불거집니다. 평화는 평화로 지킬 뿐인데, 전쟁무기가 있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줄 잘못 알기 때문에, 군부대를 끝없이 새로 짓고 늘리려는 정치 움직임이 나타나요. 스스로 삶이 아름다운 평화가 되도록 할 때에 실마리를 찾을 수 있어요. 삶이 아름다운 평화가 되지 않으면, 언제나 싸움이요 정치요 투쟁이요 혁명만 외칠 뿐입니다.


  대통령이 바뀐대서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습니다. ‘책읽기 운동’을 한대서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습니다. 입시지옥이 버젓이 있는 까닭은 학력차별이 버젓이 있기 때문이고, 학력차별이 버젓이 있는 까닭은 계급차별이 버젓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 온갖 차별은 정치로는 씻지도 풀지도 못합니다.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면서, 저마다 제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건사하는 삶을 일굴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길로 나아갑니다. 교육감도 전교조도 교육부도 교사도 학교도 아무것도 못 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삶을 세우고 스스로 삶을 아름답게 다스리면서 아름다운 사랑을 누릴 때에 비로소 모든 실타래가 풀리니까요. 삶을 읽을 때에 책을 읽고, 삶을 다스릴 때에 사회를 다스리며, 삶이 아름다울 때에 나라가 아름답습니다. 4346.12.2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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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3-12-24 11:2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공감 백배!

숲노래 2013-12-24 12:34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사람들이 조용히 이녁 보금자리를 아름답게 일굴 적에
천천히, 시나브로, 차근차근
아름다운 마을과 사회와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느껴요.

책으로 태어나는 이야기란
바로 이런 작은 아름다움을 나누는 사랑에서
태어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