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16. 놀면서 자라는 말
― 싱그러운 삶에 싱그러운 말

 


  물을 마십니다. 더운 여름날 땀을 흠뻑 흘리고 나서 물을 마십니다. 옛날 사람들은 냇물을 마시거나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때로는 빗물을 받아서 마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땅밑으로 깊이 파서 땅밑물을 마십니다. 때로는 댐을 지어 물을 가둔 뒤 물관을 이어 수도물을 마십니다. 누군가는 가게에서 먹는샘물을 사다가 마십니다. 먹는샘물도 땅밑물처럼 땅밑으로 깊이 파서 뽑아올린 물입니다.


  물마다 물맛이 다릅니다. 골짜기에서 흐르는 골짝물과 들판에서 흐르는 냇물은 물맛이 다릅니다. 도시에서 쓰려고 댐에 가둔 물이랑 논에 대려고 못에 가둔 물은 서로 맛이 다릅니다. 같은 땅밑물이라 하더라도 플라스틱병에 담은 먹는샘물하고 시골마을에서 그때그때 뽑아올리는 땅밑물은 맛이 다릅니다.


  돌이켜보면, 옛날에는 물이 더러워질 일 없기에 냇물도 빗물도 즐겁게 마십니다. 굳이 땅밑을 깊이 파헤쳐서 물을 뽑아올리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물이 깨끗한 곳이 아주 많이 줄어든 터라 땅밑물도 좀처럼 마시기 힘들고, 도시와 멀리 떨어진 조용하고 깨끗한 시골에 커다랗게 댐을 지어 수도물을 쓰곤 합니다.


  사람들 스스로 물을 맑고 정갈하게 지키면,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냇물이나 빗물이나 땅밑물이나 우물물 마실 수 있어요. 그러나, 이렇게 맑은 물 마시려고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은 퍽 적어요. 여느 때에 늘 마주하는 물을 맑으면서 시원하게 돌보는 길보다, 돈을 들여서 물을 사다 마시는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물이 더러워지고 흙이 망가지면서 날씨가 어지럽습니다. 아이도 어른도 누구나 알듯, 도시 문명 사회가 되면서 공장과 자동차와 발전소 부쩍 늘어 물과 흙이 더러워집니다. 공장은 자꾸 늘고, 자동차 때문에 찻길과 고속도로 자꾸 닦으며, 발전소 새로 짓고 송전탑 자꾸 세웁니다. 골프장과 관광지를 만들기도 하니, 조용하면서 깨끗한 시골이 남아나지 않습니다. 이런 흐름이 깊어지는 만큼, 날씨가 미치지요. 날씨가 미치면서 큰비와 막비가 들이붓습니다. 날씨를 알리는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으레 ‘물폭탄’이라 말하는데, 꼭 날씨 때문에 전쟁이라도 터졌다는 듯한 말씨입니다. 어쩌면 전쟁과도 같은 큰비이거나 막비라고 느낄는지 모르겠어요.


  요즈음에는 시골에서조차 무지개를 거의 못 봅니다. 소나기도 거의 못 만납니다. 뭉개구름도 좀처럼 못 봅니다. 날씨가 일그러지면서 몽실몽실 한여름 예쁜 구름이 생기지 못하고, 뭉게구름 생기지 못하니 소나기 찾아들지 않으며, 소나기 찾아들지 않기에 무지개가 뜨지 않아요. 하늘빛이 뿌옇게 되니, 밤하늘 밤별 가득 누리는 시골도 드물어, 미리내를 찾아보기도 어려워요.


  예전 사람들은 언제나 하늘빛 가득 누리던 삶이었기에, 낮달도 밤별도 무지개도 미리내도 늘 보았어요. 책이나 영화에 나오는 낱말이나 모습 아닌 삶으로 한결같이 부대끼는 말마디였어요.


  이제 도시에서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랄 빈터가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놀이터조차 아파트 있는 데 아니면 없어, 아이들 놀 자리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예전처럼 ‘놀이’를 할 틈도 겨를도 자리도 없어요. 요새 아이들은 놀이 아닌 ‘게임’을 해요. 주말이나 방학을 맞이해 ‘레크리에이션’을 배우기도 합니다. 놀이 아닌 게임이 되면서, 게임에서 쓰는 말은 하나같이 ‘game’과 같은 영어요, 어른들은 아예 아이들한테 ‘영어 게임’을 시키며 ‘영어 학습’으로 치닫습니다.


  노는 아이들은 뛰놀면서 놀이동무를 사귑니다. 무더위에도 땡볕에서 신나게 놉니다. 바깥에서 한껏 뛰놀면서 살갗이 까무잡잡하게 바뀝니다. 어른들은 ‘폭염주의보’라느니 하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후끈후끈 무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아요. 놀이에 폭 빠지면 온통 놀이 생각입니다.


  몸을 놀리면서 몸이 튼튼하게 자랍니다. 몸을 놀리니 몸놀림이 새롭게 거듭납니다. 몸놀림이 거듭나면서 손놀림도 남달리 나아집니다. 몸과 손이 튼튼하게 자라면 마음과 꿈과 생각과 사랑도 튼튼하게 자랄 테니, 마음놀림과 꿈놀림도 나란히 예쁘게 자라겠지요.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놀리지 않으려 합니다. 아니, 자동차가 너무 많고 자동차 댈 땅이 모자란 탓에 골목이나 빈터가 없어, 아이들이 걱정없이 놀 자리가 없다 할 만합니다. 아이들이 놀 골목이나 빈터가 사라지면서, 어른들도 쉴 자리를 잃고, 어른들은 그나마 집안에 꽃이랑 풀이랑 나무를 두려 합니다. 그릇에 흙을 담아 꽃씨를 심어요. 제법 큰 그릇에는 제법 흙을 많이 담고는 조그마한 나무 한 그루 돌보기도 합니다. 어려운 말로 ‘화초’나 ‘원예’나 ‘분재’라고 하는데, 어느 한자말이든 ‘꽃’을 가리켜요. ‘꽃심기’나 ‘꽃가꾸기’입니다.


  하이타니 겐지로 님이 쓴 《외톨이 동물원》(비룡소,2003)이라는 동화책 읽다가 98쪽에서 “이튿날의 일이었다.” 같은 글월을 봅니다. 일본사람은 무슨 말을 하건 ‘の’를 붙여요. 이를 잘못 옮기면 ‘-의’를 붙이는 말씨가 돼요. 한국사람 한국말은 “어제 일”이나 “모레 이야기”나 “지난해 모습”이나 “그러께 선물”인데, 일본사람은 이런 말마디 사이에 꼭 ‘-의’를 넣어요. 일본 만화영화 이름은 “紅の豚”이고 “風の谷のナウシカ”예요. 이를 한국말로 옮기면 “붉은 돼지”와 “바람 골짜기 나우시카”입니다. 아이들한테 읽히는 동화책에 어떤 낱말과 말씨를 쓰느냐는 무척 큰 일이에요. 어른들부터 스스로 싱그러운 삶과 싱그러운 말을 아낄 노릇이에요. 그래도 이 글월에서는 ‘이튿날’이라는 낱말을 썼어요. 그다음 날이라서 ‘이튿날’인데, 곰곰이 살피면 ‘이듬날·이듬주·이듬달·이듬해’하고 ‘다음날·다음주·다음달·다음해’처럼 알뜰살뜰 쓸 수 있어요.


  삶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는 결에 따라 말이 달라요. 즐겁게 놀며 맑은 물 마시고 풀이랑 꽃이랑 나무를 노상 마주하는 삶이라면, 이러한 삶에 따라 싱그럽게 빛나는 말이 태어나요. 놀이동무와 함께 씩씩하게 뛰놀며 자라는 아이들은 이웃을 살피고 아끼는 마음을 키우며 사랑스럽게 빛나는 말을 가꾸어요. 놀이하는 아이도 일하는 어른도 따사로운 보금자리 누릴 때에 따사로운 마음입니다. 4346.7.2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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