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마한 간판

 


  지난날 참 많은 헌책방들은 간판이 없이 가게를 열었다. 간판도 책방이름도 없이 책만 가게에 두었는데,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와서 책을 살펴서 사 갔다. 마음속으로 고운 책빛을 품는 사람들은 간판도 책방이름도 없는 조그마한 헌책방 옆을 스쳐서 지나갈 일이 어김없이 생긴다. 헌책방지기도 책손도 바로 이곳에 어느 날부터 헌책방이 문을 열 줄 생각조차 못했겠지. 그러나 두 사람 책빛이 마음과 마음으로 만나 이 길을 걸어갈 일이 생기고, 이 길을 걸어가다가 살며시 만난다.


  서른 해 마흔 해 쉰 해 헌책 만지며 살림 일구는 할배 헌책방지기와 할매 헌책방지기는 말한다. “좋은 책 두면 되지. 간판이 뭐가 대수로워.” 헌책방은 ‘이 좋은 책이 나온 곳’이라는 이름을 사람들한테 알리지 않는다. 헌책방은 그저 ‘이곳에 오면 책이 있다’는 이야기만 사람들한테 알린다.


  과일장수가 길가에 능금 몇 알 놓으면 이곳이 과일 파는 집인 줄 알려준다. 헌책장수는 길가에 헌책 몇 권 놓으면 이곳이 헌책 파는 집인 줄 알려준다.


  ‘이 책을 꼭 읽으시오’ 하고 말하는 헌책방은 없다. ‘이 책을 반드시 사시오’ 하고 끌어당기는 헌책방지기는 없다. 모두 책손 몫이다. 조그마한 동네새책방이건 동네헌책방이건, 책빛이 숨쉬는 책터를 알아보는 몫은 오로지 책손한테 있다. 책방지기는 이녁 책방에 ‘아름다운 빛 물씬 흐르는 책’을 꾸준히 알뜰살뜰 건사한다.


  책방을 광고하거나 홍보하지 않는다. 책은 광고하거나 홍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을 엮은 출판사 일꾼도 책을 알리지 못한다. 보도자료는 쓸 수 있어도 책을 알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책을 알아채거나 느끼는 몫은 ‘마음속에 책빛 담은 사람’ 스스로한테 있기 때문이다. 두 손으로 쥐어 두 눈으로 살피며 온마음으로 읽는 책이다.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라 해서 이냥저냥 읽을 수 없다. 백만 사람이 읽는 책이 아니라,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른 가슴으로 읽는 책이다. 백만 사람이 읽었더라도 백만 가지 새 이야기가 흐를 수 있어야 옳다. 천만 사람이 읽었으면 천만 가지 이야기가 새로 태어나야 마땅하다.


  책방마실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책시렁을 살핀다. 책방을 꾸리는 사람은 스스로 책을 캐낸다. 책방마실을 하는 동안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책을 헤아린다. 책방살림 일구는 동안 마음속으로 퍼지는 책씨앗을 돌아본다.


  커다랗게 붙여야 알아볼 만한 책방 간판이 아니다.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글이나 광고글 실렸기에 읽어 볼 만한 책이 아니다. 4346.11.1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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