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녁은 이름을 얻으셔요

 


  스스로 ‘비평가’나 ‘평론가’라는 이름을 붙이는 분들이 왜 재미없거나 따분하거나 어렵거나 딱딱하게 글을 쓰는가 하고 돌아본다. 처음부터 비평가나 평론가라는 일(직업)이 있을 수 없다. 누구나 비평하고 평론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누구나 말하고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따로 할 사람이란 굳이 없어도 된다.


  그러나, 비평가나 평론가가 일이 되면서, 비평을 해야 하기에 비평을 하고, 평론을 해야 하기에 평론을 한다. 글이 아니라 비평과 평론이 된다. 이야기가 아닌 비평과 평론으로 넘어간다.


  비평과 평론으로 자리잡자면 어떤 틀을 잡아야 한다. 틀을 세우지 않으면 비평이나 평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알맹이는 없더라도 틀이 있어야 비평이 되고 평론이 된다. 이리하여, 어느덧 알맹이는 동떨어진 채, 아니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채, 껍데기만 남는 비평과 평론이 늘어나고, 껍데기만 남은 비평과 평론이 모인 책을 읽으며 다시 비평과 평론을 낳아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며 기자가 되는 사람이 생겨난다.


  글이란 재미있어야 글이다. 글이란 사랑스러울 때에 글이다. 글이란 아름답게 빛나면서 글이다. 그런데, 글이 글답지 못하고 비평이나 평론에 머물면, 그예 재미없고 따분하고 어렵고 딱딱하고야 만다.


  글이 재미있는 까닭은, 글이 삶을 담기 때문이다. 글이 사랑스러운 까닭은, 글이 삶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글이 아름다운 까닭은, 글이 삶을 빛내기 때문이다.


  재미있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비평이나 평론이 아예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참말 재미있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비평이나 평론이 있다. 그런데, 이런 비평이나 평론은 ‘비평’이나 ‘평론’이기보다 ‘글’이요 ‘이야기’이다. 이름표만 비평이나 평론으로 붙였을 뿐이다.


  문학평론이나 사진평론이나 그림평론이나 정치평론이나 사회평론이나 교육평론이나 스포츠평론이나 대중가요평론이나 영화평론 …… 수많은 평론이 ‘평론’이라는 자리를 얻고 이름값 지키려 하면 부스러기가 된다. 이웃과 삶을 나누려는 글이 되고, 동무와 사랑을 속삭이려는 이야기가 되며, 지구별 푸른 숨결과 함께 웃음짓는 노래가 될 때에 비로소 어여쁜 글이다.


  글을 써서, 아니 비평과 평론을 써서 이름을 얻고 싶다면, 이녁은 이름을 얻을 노릇이다. 그런데, 이름을 얻어서 무슨 보람이나 즐거움이 있을까. 글을 써서, 아니 비평과 평론을 써서 돈을 얻고 싶다면, 이녁은 돈을 얻을 노릇이다. 그렇지만, 돈을 얻어서 무슨 재미나 사랑이 샘솟을까. 글을 써서, 아니 비평과 평론을 써서 힘을 거머쥐고 싶다면, 이녁은 힘을 거머쥘 노릇이다. 그러나, 힘을 거머쥐어서 무슨 뜻과 빛이 있을까.


  글쓰기는 오직 삶쓰기이다. 글쓰기는 그예 사랑쓰기이다. 글쓰기는 마침내 빛쓰기이다. 삶을 쓰며 사랑을 노래하고 빛이 되는 글이다. 글 한 줄로 꿈을 키우는 아이들이 푸른 바람 마시면서 나무를 어루만질 수 있기를 빈다. 4346.11.1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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