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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예쁜 고양이 카이
이와고 히데코 지음, 구혜영 옮김, 이와고 미츠아키 사진 / 동쪽나라(=한민사)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66
이 아름다운 숨결을 사진과 함께
― 세상에서 가장 예쁜 고양이 카이
이와고 미츠아키 사진, 이와고 히데코 글
동쪽나라 펴냄, 2003.9.10.
아이들과 살아가며 글이 태어납니다. 아이들과 살아가지 않던 지난날에도 글은 마음속에서 태어났는데, 아이들과 살아가며 이 아이들이 나누어 주는 고운 빛을 받는 글이 태어납니다.
글은 어디에서나 태어납니다. 시골에 살거나 도시에 살거나 글은 늘 어디에서나 태어납니다. 복닥거리는 전철에서도 글은 태어납니다. 이른바 ‘지옥철’이라는 이름이 붙은, 인천서 서울로 달리는 전철에서도 글은 태어납니다. 지옥철을 타며 온몸이 마른오징어처럼 납작해지는 하루를 견디는 동안에도 글은 얼마든지 태어납니다. 매캐한 배기가스 맡으며 회사를 오가야 하는 길에서도, 대학입시에 목을 매달도록 내모는 시험지옥 고등학교에서도, 글은 언제나 태어납니다.
무시무시한 곳이라 해서 글이 못 태어나지 않습니다. 어둡고 퀴퀴하며 슬픈 곳이라 해서 맑거나 사랑스러운 글이 못 태어나지 않습니다. 살림이 넉넉하거나 근심걱정 없다 싶은 곳이라 해서 맑거나 고운 글만 태어나지 않습니다. 어떠한 글이든 어디에서나 태어나고, 어느 삶자리에서든 어떠한 글이라도 길어올릴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빚고, 아이들과 부대끼는 나날을 사진으로 옮깁니다. 글을 잘 쓰기에 아이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잘 다루기에 아이와 부대끼는 나날을 사진으로 옮기지 않습니다. 연필과 종이가 있기에 글을 써요. 필름(또는 메모리카드)과 사진기 있기에 사진을 찍어요.
멋스럽게 찍지 않아도 멋스러운 삶입니다. 멋스럽게 꾸미지 않아도 멋스러운 사랑입니다. 삶을 누리는 그대로 쓰면 글이 되고, 삶을 즐기는 그대로 찍으면 사진이 됩니다. 이 아름다운 숨결을 글과 함께 빚고, 이 아리따운 숨결을 사진과 함께 일굽니다.
.. 이날 카이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침착해 보였습니다. 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요?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 걸까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냥 따사로운 봄햇살이 내려쪼이는 창가에서 행복한 듯 평화로이 앉아 있는 모습이군요 .. (39쪽)
날마다 꾸준히 밥을 새로 차려서 먹듯이, 날마다 꾸준히 글을 새로 일굽니다. 날마다 꾸준히 옷을 갈아입히듯이, 날마다 꾸준히 사진을 새삼스레 찍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아이를 찍더라도 늘 다른 사진이 나옵니다. 같은 집에서 같은 아이와 얼크러지더라도 늘 다른 글이 태어납니다.
생각해 보면, 같은 집에서 날마다 마주하는 똑같은 일이라 하지만, 어제와 오늘은 다르고, 오늘과 모레가 달라요. 다 다른 날에 다 같은 일을 한다 하지만, 다 같은 일이란 참말 없습니다. 조금씩 다른 일이요, 새롭게 다른 일이며, 새삼스레 다른 일입니다. 그러니까, 아이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쓰더라도 날마다 다른 글을 쓰고, 아이와 복닥이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더라도 노상 다른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아침해와 저녁해를 사진으로 찍어 보셔요. 날마다 다를밖에 없습니다. 아침햇살과 저녁햇살을 가만히 바라보며 날마다 글로 써 보셔요. 참말 날마다 다른 글을 쓸밖에 없습니다.
학교 가는 길이건 회사 가는 길이건 날마다 달라요. 같은 때에 집을 나서 같은 때에 버스나 전철을 타더라도, 날마다 다른 하루요, 날마다 다른 이야기 샘솟습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얼마나 다른 줄 느낄 때에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요. 날마다 어느 만큼 새로운 빛이 흘러드는가를 느낄 때에 글과 사진을 빚어요.
움직이는 삶이기에 움직이는 글이 됩니다. 흐르는 삶이기에 흐르는 사진이 됩니다. 애써 꾸미거나 지을 까닭이 없어요. 움직이는 삶을 따라 글을 쓰기만 해도 미처 못 쓰는 글이 있어요. 흐르는 삶과 나란히 거닐며 사진을 찍어도 모든 모습을 찍지 못해요.
.. 아침부터 눈이 내리더니 하염없이 수북수북 쌓여만 갑니다. 멋진 경치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지요. 우리는 집 근처에 있는 노가와 공원으로 나갔습니다. 카이 입장에서 보면 뭐가 멋진 경치냐고 하겠지만 말예요 … 카이에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경이로운 계절의 변화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눈이 올 때마다 노가와 공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 (43, 72쪽)
가장 아름답구나 싶은 때에 글을 씁니다. 가장 사랑스럽구나 싶은 때에 사진을 찍습니다. 연필을 들어 종이에 또박또박 씁니다. 사진기를 들어 한 장 두 장 신나게 찍습니다. 네 숨결을 내 가슴으로 맞아들입니다. 내 숨결을 네 가슴에 건넵니다. 네 삶빛이 내 마음속으로 스며듭니다. 내 삶빛이 네 마음밭으로 젖어듭니다.
서로 눈빛이 오갑니다. 서로 사랑이 오갑니다. 서로 손길이 오갑니다. 아름답게 꿈을 꾸며 아름답게 쓰는 글이요, 아리땁게 꿈을 지으며 아리땁게 찍는 사진입니다. 삶을 아름다이 일구면서 글 또한 저절로 아름다이 흘러요. 삶을 아리따이 돌보면서 사진 또한 시나브로 아리따이 자라요.
사진을 찍으러 미국에 가도 되고 일본에 가도 됩니다. 사진을 배우러 프랑스에 가도 되고 영국에 가도 됩니다. 그리고, 사진을 찍으러 마을 한 바퀴 돌아도 되고 이웃이나 동무를 만나러 가도 됩니다. 사진을 배우러 아이와 복닥이며 살림을 꾸려도 되고 논밭을 일구어도 됩니다.
미국여행과 일본여행도 사진이 됩니다. 마을걷기와 이웃사랑도 사진이 됩니다. 프랑스나 영국에 있는 이름난 학교에서도 사진을 배웁니다. 아이들한테서도 사진을 배우고, 집살림 꾸리면서도 사진을 배웁니다.
사진은 이론도 실기도 아닙니다. 사진은 사진입니다. 사진은 창작을 하지 않고 작품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은 사진입니다. 사랑스러운 아이가 곁에 있는데 사랑스러운 아이를 사진으로 찍지 못한다면, 무엇을 사진으로 찍을까요. 아름다운 삶이 언제나 내 곁에서 흐르는데 이 아름다운 삶을 사진으로 찍지 않는다면, 무엇을 사진으로 찍는가요.
꽃을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모델을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장치를 해서 무언가 넌지시 보여주려는 소품을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설치예술을 한대서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동네를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힘든 이웃이나 정치꾼을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찍어야 할 이야기라면,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 스스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사진으로 담아야 할 모습이라면, 사진기를 어깨에 멘 사람 스스로 가장 아름답게 누리는 삶입니다.
즐겁게 웃는 옆지기와 아이를 사진으로 찍습니다. 요모조모 앙증맞게 차린 밥상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아이들과 신나게 뛰노는 들판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토닥토닥 재운 아이 곁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책방마실을 하며 사진을 찍고, 자전거를 타며 사진을 찍습니다. 빨래터에서 놀며, 텃밭에서 풀을 뜯으며, 하늘바라기를 하며, 멧골에서 냇물에 발을 담그며 사진을 찍습니다.
.. 남편은 언제나 카이의 눈높이에서 셔터를 눌렀습니다. 즉 고양이 사진을 찍을 때, 가능하면 배를 깔고 낮은 자세에서 사진 파인더를 바라보면 카이의 기분이 가장 잘 보인다고 합니다 … 이일라(Yilla)는 고양이에게 말을 걸면서 촬영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요, 남편은 얼른 “미안해요. 모두 내 잘못이야.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너희들 사진을 찍고 싶단다. 이건 아저씨 일이니까 말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 (69, 124쪽)
내가 선 이곳이 나한테 가장 아름다운 삶터입니다. 나와 마주한 사람이 나한테 가장 사랑스러운 님입니다. 사진은 늘 바로 이곳에 있어요. 사진은 언제나 바로 오늘 이루어요.
무엇을 찍느냐? 내 사랑을 찍어요. 누구를 찍느냐? 내 사람을 찍어요. 어디에서 찍느냐? 내 보금자리에서 찍어요. 왜 찍느냐? 즐겁게 살아가니 찍어요. 어떻게 찍느냐? 아름다운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로 찍어요. 언제 찍느냐? 활짝 웃을 적에 찍어요.
밥을 지으며 무엇을 생각하는지 가만히 돌아보셔요. 밥을 짓듯이 사진을 찍으면 즐겁습니다. 빨래를 하며 무엇을 떠올리는지 살며시 헤아려요. 빨래를 하듯이 사진을 찍으면 재미있습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놀이를 하면서, 잠을 자면서, 우리들 꿈과 사랑이 어떻게 흐르는가 하고 곰곰이 되새겨요. 홀가분하면서 씩씩하고 다부지게 사진을 찍으면 아름답습니다. 나는 나답게 찍는 사진입니다. 이녁은 이녁답게 찍을 사진입니다. 나는 나답게 읽는 사진입니다. 이녁은 이녁답게 읽을 사진입니다.
.. 강가에서 흠뻑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카이 몸에서 향긋한 냄새가 폴폴 납니다. 좁은 아파트 방 안에서는 솟구치는 고양이의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합니다 .. (70쪽)
이와고 미츠아키 님이 사진을 찍고 이와고 히데코 님이 글을 쓴 《세상에서 가장 예쁜 고양이 카이》(동쪽나라,2003)라는 사진책을 읽습니다. 사진이랑 글하고 함께 살아가는 두 사람이 엮고 일군 아름다운 사랑이 스민 이야기를 조그마한 책에서 읽습니다.
참말, 사진찍기란 사랑찍기입니다. 사랑을 찍는 사진이니 삶을 찍어요. 삶찍기입니다. 사진읽기란 사랑읽기입니다. 사랑을 읽는 사진이니 삶을 읽어요. 사진을 찍은 사람은 이녁 사랑과 삶을 담고, 사진을 읽는 사람은 이녁 사랑과 삶을 읽습니다.
이밖에 무엇을 더 찍거나 읽을 수 있을까요? 이론이나 실기를 읽거나 찍는가요? 사조나 유행이나 흐름을 읽거나 찍는가요? 주의주장을 읽거나 찍는가요?
삶은 이론도 실기도 아닙니다. 사랑은 사조도 유행도 흐름도 아닙니다. 사진은 사진일 뿐이지, 현대사진도 과거사진도 아닙니다. 사진은 사진일 뿐, 다큐사진도 패션사진도 아무 사진도 아닙니다.
.. 사실 남편은 밝히고 싶지 않겠지만, 카메라가 보이면 카이는 싫은 내색을 합니다. 나는 이런 카이의 기분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남편 귓속에다 살며시, 카이에게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속삭이면서 말했습니다. “카이는 다 기억하고 있어요. 모든 걸 말예요.” .. (149쪽)
아침해가 뜨고 아이들이 깨어납니다. 작은아이는 일어나자마자 쉬를 눈 뒤 곧바로 똥을 눕니다. 속이 개운하겠네. 똥이 마려워서 잠을 깼니. 다 컸구나. “누나는 자.” 하고 말하는 세 살 아이가 혼자 씩씩하게 마당으로 내려가서 놉니다. 아침볕을 듬뿍 받습니다. 혼자서도 까르르 웃으며 노래를 하고, 가을볕 드리우며 까맣게 익은 부추씨를 보다가, 새까만 까마중알 쳐다보다가, 구름을 노랗게 물들이며 천천히 오르는 해를 바라봅니다.
멧새는 아침부터 부산하게 날아다니며 노래하고 먹이를 찾습니다. 개미도 바지런히 먹이를 물어 나르겠지요. 아직 겨울잠 안 자는 풀벌레도 곧 모두 겨울잠에 들어요. 서늘한 바람이 불며 가랑잎 지고 풀잎 시듭니다. 머잖아 차가운 바람이 불다가 눈송이 흩날릴 테지요.
가을이 깊어 가을빛을 사진으로 누립니다. 겨울이 찾아와 겨울빛을 사진으로 즐깁니다. 가을과 겨울 지나면 새봄에 봄빛을 사진으로 밝히겠지요. 여름에는 여름빛 싱그러운 사진이 됩니다.
사진은 늘 오늘을 찍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이곳에서 찍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사진뿐 아니라 글도, 노래도, 그림도, 춤도, 흙일도, 물일도, 집일도, 아이키우기도, 책읽기도, 온누리 어떠한 것이라도 늘 오늘 이곳에서 이룹니다.
삶이란 바로 오늘 이곳에서 누려요. 사랑이란 바로 오늘 이곳에서 나눠요. 생각이 자라며 사진이 자라고, 마음이 크면서 사진이 빛납니다. 삶을 보듬으며 사진이 새롭고, 사랑을 아끼면서 사진이 새삼스럽습니다. 4346.11.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