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만화, ‘학습’문학
한국에만 남달리 있는 갈래로 ‘학습만화’가 있다. 겉보기로는 ‘만화’처럼 보이지만 만화가 아닌 ‘학습 교재’로 만드는 책이다. 아이들한테 한자·시사·역사·과학·문학 따위를 가르치는 보조 교재쯤으로 만드는 책이다. 오늘날 한국 아이들은 ‘만화책’이 아닌 ‘학습만화’를 만난다.
예전 아이들은 ‘학습만화’를 읽지 않았다. 예전에는 학습 교재로 만화책 만드는 일조차 드물기도 했지만, 학습만화가 얼마나 재미없는가를 아이들 스스로 잘 느끼기도 했고, 예전 아이들은 ‘만화책’을 볼 뿐이었다. 그런데, 더 생각해 보면, 예전 아이들이 읽은 만화책이든 오늘날 아이들이 읽는 학습만화이든, 모두 어른이 그린다. 예전에 만화를 그린 어른은 ‘이야기 있는 만화’를 그려 낱권 만화책을 만든 뒤 아이들한테 베풀었다. 오늘날 만화를 그리는 어른은 ‘학습 보조 교재’로 쓰도록 학습만화를 만든 다음 아이들한테 ‘공부를 시킨’다.
다시 말하자면, 예전 아이들은 스스로 즐겁게 놀면서 스스로 신나게 ‘이야기밭에 풍덩 빠지’려고 만화책을 읽었다. 오늘날 아이들은 놀이도 아니고 이야기도 아닌, 오직 ‘대학입시 앞둔 예비 수험생이 된 몸’으로 학습만화를 받아들인다.
예전에는 만화가 어른이 참 많았다. 만화잡지도 많았고, 만화작품도 많았다. 이웃 일본하고 견줄 수 없었으나, 지구별에서 일본을 빼고 이처럼 ‘만화가 스스로 이야기를 창작해서 내놓는 낱권책’이 많은 나라는 없었다. 비록 때때로 일본만화 슬쩍 베껴서 내놓는 어른들 있었지만, 《주먹대장》이라든지 《아기공룡 둘리》라든지 《요정 핑크》라든지 《달려라 하니》처럼, 만화를 그리는 어른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한껏 뽐냈다. 《장길산》이나 《임꺽정》처럼 문학에 새 옷을 입혀 만화로 선보일 수 있는 빛줄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고인돌》이나 《번데기 야구단》이나 《포장마차》나 《간판스타》처럼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삶을 만화로 살가이 들려주는 꿈자락을 밝히기도 했다.
요즈음에는 왜 만화다운 만화를 그리려는 어른은 부쩍 줄면서, 학습만화만 이토록 판칠까. 오늘날 한국 만화잡지에는 왜 ‘한국 어린이 이야기’를 찾아보기 어렵도록 ‘일본 만화결 흉내낸’ 작품만 그득할까.
아이들이 골목이나 고샅에서 놀지 않은 뒤부터, 아니 아이들이 골목이나 고샅을 자동차한테 모조리 빼앗긴 뒤부터, 그러니까 아이들 놀이터인 골목이나 고샅에 어른들이 자가용을 가득 처박을 무렵부터, 이 나라에서 만화다운 만화도 나란히 사라졌다고 느낀다. 문학은 문학일 뿐이지 ‘학습문학’이란 없다. 그렇지만, 이 나라 어른들은 아이들을 대학입시만 생각하도록 내몬다. 대학입시에서 시험문제 잘 풀기를 바라며 ‘학습문학’을 읽힌다. 문학을 이리 자르고 저리 뜯으면서 주제와 소재를 분석하라고 들볶으며, 비유법이니 대유법이니 하고 외우도록 내몬다. 한국말을 슬기롭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레 쓰도록 이끌지 않고, 고전문법이니 현대문법이니 하면서 자질구레한 지식조각만 머릿속에 쑤셔넣는다. 이 나라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문학’도 ‘말’도 가르치지 않는다. 이 나라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대학입시’만 시킨다. 이 나라 아이들은 ‘삶’도 ‘놀이’도 빼앗긴 채, ‘만화책’조차 손에 쥐지 못한다.
생각해 보라. 어른들더러 소설이나 시를 읽지 못하게 가로막고는, ‘학습소설’이나 ‘학습시’를 읽으라고 한다면, 즐겁겠는가? 어른들은 ‘학습-’이라는 이름표 붙은 책은 만들지도 말고 읽히지도 말아야 한다. 아이들은 ‘학습-’이라는 이름표 붙은 책이 아닌 ‘참다운 책’을 만나야 한다. 4346.9.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