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가리키던 손가락 삶창시선 37
조동례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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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56

 


풀밭에서 숨을 쉬다
― 달을 가리키던 손가락
 조동례 글
 삶창 펴냄, 2013.6.28. 8000원

 


  요즈음 시골 할매와 할배는 논이나 밭이나 길이나 들이나 숲에 농약을 뿌립니다. 이녁이 심은 씨앗이 아니라면, 어떤 풀이든 쑥쑥 자라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논에는 벼 아닌 것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농약과 벼에 달라붙는 벌레를 죽이는 농약을 뿌립니다. 밭에는 밭에 심은 남새 아닌 것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농약과 남새에 달라붙는 벌레를 죽이는 농약을 뿌립니다. 길이나 들이나 숲에는 모든 풀을 죽이려는 농약을 뿌립니다. 무덤 둘레에 보드라운 풀이나 잔디가 깔린 곳 많지만, 이런 땅에도 농약을 곧잘 뿌리기에, 어른이든 아이이든 함부로 뒹굴다가는 잘못될 수 있습니다.


  예부터 풀밭에서는 풀내음을 맡고 흙내음을 마셨습니다. 이제 풀밭에서는 농약내음을 물씬 맡습니다. 농약은 풀과 흙이 베푸는 보드랍고 푸른 숨결을 가로막습니다. 일손이 없어 풀베기를 못하니 농약을 뿌린다고 하지만, 곡식과 남새를 뺀 모든 풀은 한 포기조차 자라지 못하도록 꽁꽁 가두거나 묶거나 짓누르는 요즈음 시골살이라 할 만합니다.


.. 그냥반이 왜 죽었으까이 / 아따 숨을 못 쉰께 죽어부렀지라 / 긍께 숨 쉬는 것이 젤로 힘들드랑께 / 찜질방 가는 할머니들 숨소리 거칠다 ..  (새삼스럽게)


  시골사람이 왜 풀을 미워하거나 싫어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언제부터 이 나라 시골사람이 풀을 멀리하거나 꺼려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풀을 보듬지 못하면서 시골살이를 얼마나 즐거이 누릴 만한지 궁금합니다. 풀과 사귀지 못하는 시골살이는 어떤 모습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한약으로 쓸 적에만 찾는 풀은 아닙니다. 백초효소를 담글 때에만 뜯는 풀은 아닙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모든 들과 숲은 풀밭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이곳에서는 이 풀이 돋고, 저곳에서는 저 풀이 날 적에 아름답습니다. 한 가지 풀만 자라서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온갖 풀이 저마다 얼기설기 곱게 얽혀 자랄 적에 아름답습니다.


  그러니까, 다 다른 아이들한테 똑같은 옷을 입히고 똑같은 머리모양에 똑같은 지식을 외도록 틀에 맞추는 일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다 다른 아이들은 다 다른 삶과 꿈과 넋에 맞추어, 스스로 저희한테 가장 아름다울 옷을 입고 몸차림을 가누며 슬기와 빛을 가다듬을 적에 아름답습니다.


  똑같은 옷을 입히는 짓이란, 사람을 사람 아닌 노예나 군인이나 기계로 만듭니다. 사람을 사람 아닌 신분과 계급으로 나누려고 똑같은 옷과 지식과 모습으로 가둡니다. 유행도 이와 같아요. 유행이란 있을 수 없어요.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멋과 삶을 찾을 뿐입니다. 바다에서는 바다에서 살아가는 슬기를 누리고, 들에서는 들에서 살아가는 슬기를 누리며, 숲에서는 숲에서 살아가는 슬기를 누려요. 학교에 다니며 똑같은 지식을 배울 아이들이 되지 말고, 스스로 살아가는 보금자리에 가장 알맞고 즐거우며 밝은 넋과 빛과 슬기를 배울 아이들이 되어야 아름답습니다.


.. 버리세요 어머니 / 그것이 뭔 꽃이다요 풀이제 // 이쁘기만 허구만 / 이쁘먼 꽃이제 ..  (등대풀 때문에)


  전라도 사람은 전라말을 합니다. 경상도 사람은 경상말을 합니다. 강원도 사람은 강원말을 해요. 전라도 나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나주말을 하지요. 전라도 곡성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곡성말을 해요. 전라도 나주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통영말이나 거제말을 할 까닭 없습니다. 경상도 남해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순천말이나 영암말을 할 까닭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산사람은 부산에서 살아갈 넋과 빛과 슬기를 배울 때에 아름답습니다. 홍성사람은 홍성에서 살아갈 넋과 빛과 슬기를 배울 때에 아름답습니다.


  제철에 난 먹을거리로 밥을 차려 먹을 때에 몸에 가장 알맞다고 해요. 그러면, 제철뿐 아니라 ‘제곳’에서 난 먹을거리가 우리 몸에 가장 알맞겠지요. 사람들 스스로 살아가는 터에서 얻는 먹을거리가 이녁 몸에 가장 알맞을 밥이 되어요.


  남이 짓고 갈무리하고 건사한 먹을거리 아닌, 스스로 짓고 갈무리해서 건사하는 먹을거리가 내 몸에 가장 알맞습니다. 내 삶은 내가 지어서 일굽니다. 내 삶은 내 빛과 슬기로 가꿉니다. 내 삶은 나 스스로 나아갑니다.


.. 요놈 가지먼 다섯 식구 너끈히 묵고도 남을 것이여 / 고추 열무 한 두둑, 쑥갓 시금치 상추 가지 / 들깻잎은 밀쳐놓고 따 묵을 것이고 / 호박 물외도 심심찮게 열릴 것이다 / 뿌린 대로 거둔다고 안 허든 / 잔딘지 풀인지 묵도 못 헐 것을 심어놨길래 / 싹 갈아엎어 부렀다 / 야야 땅만 보먼 묵을 것으로 안 보이냐 / 니도 거들고 갖다 묵어라 / 허리가 뻐근허다만 아따 오지다 ..  (어머니 형편)


  내가 아름답게 바라보기에 아름답게 보살필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스럽게 마주하기에 사랑스럽게 돌볼 수 있습니다. ‘등잔풀(‘등대풀’은 일본 풀이름이고, 한국 풀이름은 ‘등잔풀’입니다)’은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이월 첫머리에 남녘땅 바닷가에서 모진 바닷바람 맞으면서도 씩씩하게 돋습니다. 등잔풀 잎사귀 돋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면 동글동글 몽글몽글 맺는 모습이 꼭 꽃잎 같습니다. 꽃잎 아닌 풀잎이지만, 등잔풀 잎사귀는 ‘꽃송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곱습니다.


  누군가는 집 앞을 마당으로 삼을 수 있고, 누군가는 집 앞을 뜰로 꾸밀 수 있으며, 누군가는 집 앞을 밭으로 일굴 수 있어요. 어떠한 모습이어도 아름답습니다. 어떻게 가꾸더라도 아름답습니다.


  빈터에 이 씨앗 저 씨앗 심어도 아름답고 즐겁습니다. 빈터에 아무 씨앗 안 심어도 풀씨는 저절로 돋아, 아름답고 즐거운 빛 베풉니다. ‘남새’는 사람이 심어서 거두는 풀이지만, ‘나물’은 사람이 안 심어도 씩씩하게 돋아 사람들 누구나 즐겁게 거두는 풀이에요.


  미나리 농사 짓는 사람 있지만, 논도랑에서 들미나리(또는 돌미나리) 뜯어서 먹을 수 있어요. 씀바귀나 고들빼기를 따로 씨앗을 심어 돌보는 사람 있을 테지만, 들에서 스스로 돋는 씀바귀랑 고들빼기를 실컷 누리는 사람 있어요. 아주까리를 꼭 사람이 씨앗으로 심어야 하지 않아요. 대추나 매실을 얻으려고 어린나무 사들여 심을 수 있지만, 대추씨나 매실씨 흙으로 깃들어 스스로 나무로 자라곤 해요. 느티나무도 벚나무도 뽕나무도 먼먼 옛날부터 스스로 씨앗을 드리워 새로 태어났어요.


.. 요것을 어쩌믄 좋다냐 남새밭 한가운데 접시꽃이 뭣이여 호박 같으먼 기어서라도 내보내제 두자니 숭허고 뽑자니 순헌 싹 여럿 다치것고 이쁘기는 허다만 묵도 못헐 것인디 요것을 어쩌믄 좋다냐 싹 나기 전에는 암도 몰랐제 저것이 풀인지 꽃인지 꽃도 가지가지드랑께 ..  (밭)


  풀밭에서 숨을 쉽니다. 풀밭에서는 풀숨을 쉽니다. 숲에서 숨을 쉽니다. 숲에서는 숲숨을 쉽니다. 들에서는 들숨을 쉬고, 바다에서는 바다숨을 쉽니다. 멧골에서는 멧숨을 쉬며, 밭에서는 밭숨을 쉬어요.


  빈터라고 농약을 뿌리면 들숨이나 흙숨 아닌 농약숨을 쉬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뿌린 농약은 땅속으로 스며들어 땅밑물에 깃들어요. 겉흙으로 보이는 풀은 농약에 타죽어서 안 보인다지만, 땅밑물에 깃든 농약은 다시 사람한테 스며들어요. 논과 밭과 열매나무에 뿌린 농약은 어떻게 되겠어요. 모두 사람한테 돌아옵니다.


  공장 매연과 자동차 배기가스도 고스란히 사람한테 돌아옵니다. 도시를 가득 메운 아파트와 건물에서 전기를 쓰는 동안 전자파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이 전자파는 고스란히 도시사람 몸으로 깃듭니다. 과자 한 봉지를 사다 먹으면 과자봉지가 쓰레기가 되듯, 물질문명 누리는 사람들은 누구나 물질문명에 걸맞게 쓰레기를 내놓아요. 그리고, 이 쓰레기는 바로 오늘날 사람들한테 돌아갑니다.


  흙을 만지는 사람은 흙에서 얻은 것을 흙한테 돌려줍니다. 흙한테 돌려줄 것을 누리니까 쓰레기란 없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시골마을 흙사람한테는 쓰레기가 한 가지도 없었습니다. 풀로 이은 지붕도 흙으로 돌아가 거름이 됩니다. 오래되어 무너지는 집이라면, 기둥도 돌도 모두 흙으로 돌아가지요. 그런데, 오늘날 집들은 어떻게 될까요. 아파트이건 다세대주택이건, 오늘날 집들은 오래되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요. 재개발을 한다며 허물면 이 쓰레기는 어떻게 될까요. 비닐쓰레기와 음식쓰레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기를 얻으려고 발전소에서 우라늄과 석유와 석탄과 천연가스를 태우면서 이 매연과 공해물질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열폐수는 바다를 어떻게 더럽힐까요. 송전탑은 들과 숲과 시골을 얼마나 어지럽힐까요.


.. 풀숲 여러해살이 / 꽃이 풀빛이다 ..  (여로)


  조동례 님 시집 《달을 가리키던 손가락》(삶창,2013)을 읽습니다. 조동례 님이 하루하루 일구는 삶과 조동례 님을 낳아 돌본 이녁 어머님이 시골에서 짓는 삶이 골고루 어우러진 이야기를 싯말 하나로 읽습니다.


  달을 가리키던 손가락으로 씨앗을 살며시 쥐고 흙땅에 심었습니다. 달을 가리키던 손가락으로 풀숲에서 나물을 얻었습니다. 달을 가리키던 손가락으로 숲에서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땔감을 얻었습니다. 달을 가리키던 손가락으로 낫질을 하고 호미질을 하며 키질과 물질을 했습니다. 달을 가리키던 손가락으로 빨래를 하고, 아이들을 쓰다듬으며, 옷을 기웠습니다.


  달을 가리키던 손가락으로 글도 쓰고 책도 펼칩니다. 달을 가리키던 손가락으로 악기를 타고 자전거를 달립니다. 달을 가리키던 손가락으로 붓을 쥐어 그림을 그리다가는, 주걱을 쥐고 밥을 풉니다.


..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건 / 그도 배고프고 나도 배고팠던 것 ..  (가난한 풍경)


  풀이 있기에 푸른 숨결을 맞아들입니다. 풀이 있어서 풀바람을 마십니다. 햇볕은 풀을 살찌우고, 흙은 풀을 북돋웁니다. 풀은 흙을 다시 살찌워 냇물과 샘물과 우물물 싱그럽게 돌봅니다.


  공기청정기가 제몫을 하자면, 큰도시 한복판이라 하더라도 가까이에 풀과 나무가 자라야 합니다. 공기, 곧 바람이란, 사람이 들이켤 숨이란, 풀과 나무가 베푸는 빛이며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풀과 나무를 어여삐 아끼고, 풀과 나무는 사람들을 알뜰히 돌봅니다. 맑은 바람 마시지 못한다면 숨을 잃어 자동차도 물질문명도 아파트도 은행계좌도 부질없이 되어요. 맑은 물 마시지 못한다면 숨을 잇지 못해 대학졸업장도 신분도 명예도 직함도 계급도 덧없이 되어요. 맑은 밥 먹지 못한다면 숨이 살아나지 못해 아무런 일도 놀이도 할 수 없어요.


  내 손가락은 어디에서 무엇을 가리키면서 움직일 때에 환하게 빛날까요. 우리 손가락은 저마다 어디에서 무엇을 가리키면서 꼬물꼬물 움직일 때에 아름답게 춤출까요. 가을로 접어든 시골마을 풀밭에서 풀벌레 하루 내내 노래합니다. 가을내음 물씬 나는 시골마을 숲에서 멧새 싱그러이 웃으며 노래합니다. 4346.9.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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