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化果는 없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35
김해자 지음 / 실천문학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시를 노래하는 시 55

 


살아서 숨쉬는 날에
― 무화과는 없다
 김해자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01.7.10. 5000원

 


  빗소리를 듣는 동안 비와 하나가 됩니다. 가늘게 내리는 빗소리, 굵게 내리는 빗소리, 가을어지는 빗소리, 들이붓는 빗소리, 벼락과 동무하는 빗소리, 바람과 어울려 노는 빗소리, 여러 빗소리를 들으며, 내 몸과 마음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빗방울은 땅에 깃듭니다. 빗방울은 풀과 나무를 적십니다. 빗방울은 지붕도 적시고 숲과 들과 길과 바다와 자동차를 모두 적십니다.


  들짐승이나 멧짐승은 비가 오면 비를 고스란히 맞습니다. 아마 예전에는 들짐승과 멧짐승 모두 비를 그을 만한 보금자리나 쉼터가 있었으리라 생각해요.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이 깊고 깊은 두메까지 파헤치며 길을 내느니 구멍을 파느니 공장을 짓느니 골프장을 까느니 합니다. 짐승들이 살아갈 터가 없습니다.


  요새는 환경영향평가를 하기는 한다지만, 먼 옛날 살림살이가 나오지 않는다면, 어떤 공사도 멈추지 않습니다. 범과 곰과 여우와 늑대와 수달을 생각하며 공사를 안 하던 사람은 없습니다. 꾀꼬리와 소쩍새 삶터를 망가뜨리니까 고속도로 함부로 안 놓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소리와 멧토끼 보금자리를 일그러뜨리니까 송전탑 아무렇게나 안 박는 사람은 없습니다.


.. 울다 문득 너를 들여다보니 / 나를 울린 사람이 내 속에 들어 있어 / 미워하다 괜스레 미안해져 되돌아보니 / 내가 미워하던 바로 그것이 내 안에 있어 ..  (수많은 나)


  찻길이든 공장이든 발전소이든 쓰레기터이든 공항이든 골프장이든 무엇이든, 사람과 이웃이 될 뭇짐승 삶자리를 생각할 때에, 찻길 둘레에 옛날부터 집을 짓고 살아온 사람들과 마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웃사람조차 살피지 않기에 이웃짐승은 조금도 살피지 않아요. 이웃짐승을 돌아보지 않으니 이웃사람은 하나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나무 한 그루 함부로 베어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참말 우리 겨레는 먼먼 옛날부터 나무 한 그루 함부로 베지 않았습니다. 나무를 베어야 하면, 먼저 나무한테 말을 걸었어요. 나무를 베어야 하는 까닭을 묻고, 천천히 기다리고서야 나무를 베었어요.


  풀을 벨 적에도 이와 같습니다. 풀을 함부로 베지 않습니다. 씨앗을 심을 적에도 이와 같습니다. 씨앗을 아무렇게나 심지 않습니다. 풀잎 하나한테도 말을 걸던 우리 겨레요, 씨앗 한 톨한테도 사랑을 속삭이던 우리 겨레예요.


.. 미싱판에 엎드려 심지에 쓴 시 / 작업하다 말고 초크로 쪽가위로 새긴 시 / 방통고등학교 다니던 현옥이 따라 끄적거리던 / 뒤에서 쪽가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 칼라와 함께 기워버린 유산된 / 시를 찾아 뒤를 잇는다 ..  (심지에 쓴 시)


  맑은 날, 나는 시나브로 햇살과 하나가 됩니다. 후끈후끈 내리쬐는 땡볕이라면, 내 몸과 마음은 땡볕처럼 뜨겁습니다. 포근포근 감싸는 겨울날 볕살이라면, 내 몸과 마음은 겨울볕처럼 따사롭습니다.


  우리 살갗은 햇볕을 쬐야 무슨무슨 비타민이 생긴다고 해요. 햇볕을 알맞게 쬐야 튼튼하게 살아간다고 해요. 그런데, 이런 지식이 있는 도시사람 가운데 날마다 햇볕을 알맞제 쬐려 하는 이는 몹시 드물어요. 알아도 햇볕하고 멀고, 몰라도 햇볕하고 멀어요. 알아도 맨 살갗을 햇볕에 드러내지 않고, 몰라도 맨 살갗을 햇볕 앞에 환히 드러내지 않아요.


  무엇보다, 도시는 햇볕 들지 않는 일터와 삶터 너무 많아요. 도시에서는 햇볕에 빨래를 말리지 못하는 데가 무척 많아요. 빨래기계 훌륭하더라도 햇볕과 바람처럼 보송보송 말리지 못해요. 아이들부터 알아차리지요. 햇볕에 잘 말린 이불을 덮고 자는 아이는 해님과 같은 웃음을 띄고 새근새근 잘 잡니다. 햇볕에 잘 말린 옷으로 갈아입고 노는 아이는 해님처럼 맑고 환하게 노래합니다.


.. 나는 평화시장의 일급 미싱사 / 손이 안 보이도록 옷을 만들지 / 서울 시내 와이셔츠 십분의 일은 / 이 손으로 만들었지 나는 미싱사 / 이 바닥에서 구른 지 벌써 칠 년째 ..  (미싱사의 노래)


  김해자 님 시집 《무화과는 없다》(실천문학사,2001)를 읽습니다. 어떤 마음을 노래하려는 뜻에서 무과화를 떠올리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하고 헤아립니다. 어떤 삶을 빙그레 웃으려는 뜻으로 무화과와 함께 싯말을 엮는가 하고 살핍니다.


  무화과나무를 생각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사람들이 가지를 끔찍하게 쳐내도 곧 새 줄기를 올립니다. 우리 집 뒤꼍에 무화과나무 무리가 있어요. 우리 식구는 이 무화과나무 무리가 씩씩하게 자라며 고운 그늘 드리우면서 울타리 구실 하기를 바라며 그대로 두는데, 웬만큼 자라고 나면 어느새 누군가 우리 집에 몰래 들어와서 무화과나무를 몽땅 베곤 해요. 마침 우리 식구가 시골집 비운 때를 맞추어 ‘나무를 죽이려고’ 들어옵니다.


  무화과나무는 모진 이웃이 누구인 줄 알 테지요.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모진 이웃이 있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아요. 다시 줄기를 올려 다시 가지를 뻗고 다시 잎을 냅니다.


.. 이제 조금 쉬려무나 / 작은 나뭇가지 위에서 / 너의 노래 부르렴 / 새야 작은 새야 ..  (노래를 잊은 새)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살며시 만져 보셔요. 풀물(녹즙)을 짤 적에 곧잘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함께 넣곤 해요. 무화과나무 잎사귀는 꼭 사람 손처럼 생겼고, 무화과나무 잎사귀 무늬는 더없이 곱습니다. 뜨개옷 무늬로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담는 분이 제법 많아요.


  한여름 뜨거운 볕을 먹고 촉촉하게 잘 익은 무화과꽃 또는 무화과열매를 톡 따서 먹어 봐요. 저잣거리에서 파는 꽃 또는 열매를 먹어도 즐겁고, 마당 한쪽에 무화과나무를 두어 ‘우리 집 무화과나무에 나는 꽃 또는 열매’를 손수 쓰다듬으며 톡 따서 먹어도 즐겁습니다.


  햇볕 머금은 맛을 떠올립니다. 빗물 마신 맛을 떠올립니다. 바람 스며든 맛을 떠올립니다. 하나하나 따진다면, 무화과나무도 사람도 햇볕과 빗물과 바람이 있기에 목숨을 잇습니다. 풀도 새도 짐승도 햇볕과 빗물과 바람이 있을 때에 아름답게 살아갑니다. 지구별 모든 목숨은 햇볕과 빗물과 바람을 즐겁게 누리면서 하루하루 맑게 밝힙니다.


.. 전철 방음벽을 타고 / 호박 넝쿨이 올라간다 / 콩, 콩, 콩, 울타리 콩도 / 벽을 껴안고 넘어간다 ..  (문규현)


  여름이 저무는 비가 내리는 선선한 아침입니다. 큰아이는 오늘 조금 늦잠을 자고 작은아이는 여느 때처럼 일찌감치 깹니다. 작은아이는 작은 발을 콩콩 굴리며 놀다가 노래를 부릅니다. 누나가 늘 부르는 노랫가락이랑 아버지가 언제나 부르는 노랫말을 하나씩 곱씹으면서 저 조그마한 입을 달싹달싹 놀립니다.


  큰아이는 밤오줌을 누다가 “저기 개구리가 우네.” 하고 말했습니다. 얘는, 오줌 누러 밤에 일어나서 개구리노래를 듣다니. 그래, 우리 집은 풀집이요 숲집이니까, 하루 내내 풀벌레와 개구리와 멧새 깃들어 사랑스레 노래를 베풀지. 빗소리에 섞이는 개구리노래란 여느 때 듣던 개구리노래하고 사뭇 다르지.


  간밤에 큰아이 다독여 다시 재우고 나도 곯아떨어지는데, 큰아이가 말한 개구리노래를 가만히 되새기면서 빗소리하고 나란히 들었습니다. 누가 일러 주지 않아도 다 아는 노래이지만, 곁에서 함께 느끼며 듣는 사람이 있으면, 한결 고소하게 즐기는 노래로구나 싶어요.


.. 설거지를 하려다 개수구에서 올라온 바퀴벌레를 / 나도 몰래 맨손으로 때려잡다 움찔 생각하니 / 시간이 흐르긴 흘렀다 처음 살림 할 땐 / 죽은 갈치 지느러미도 못 도려내던 내가 / 산 향어 배때기도 잘도 따고 / 신문지로도 못 잡던 바퀴 따윈 알 매단 어미까지 / 맨손으로도 탁탁 두들겨 잡는다 ..  (반거충이)


  시 한 줄이란 무엇일까요. 함께 듣는 노래일까요. 함께 부르는 노래일까요. 함께 일구는 삶에서 피어나는 ‘일노래(노동요)’일까요. 함께 사랑을 속삭이면서 읊는 노래일까요.


  살아서 숨쉬는 날에 시 한 줄 읽습니다. 살아서 숨쉬는 날에 시 한 줄 적습니다. 살아서 숨쉬는 날에 꿈 한 자락 그립니다. 살아서 숨쉬는 날에 사랑 한 타래 어루만집니다.


  어제 새로 얻은 큰아이 치마 열 벌을 신나게 빨아 햇볕에 널다가, 저녁에 비구름 잔뜩 끼어 방으로 들였습니다. 하루 지난 오늘 큰아이 새 치마는 아직 다 안 말랐습니다. 큰아이는 방으로 들어온 제 옷가지를 보고는 방긋방긋 웃으며 “내 치마를 세어 볼까?” 하며 하나 둘 셋 넷 꼽습니다. 하루에 두 벌이나 세 벌씩 갈아입혀도 재미있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날마다 두어 벌씩 갈아입히면 빨래하는 품이 들지만, 이렇게 고운 옷 잔뜩 얻었으니, 빨래야 뭐 신나게 하면 되지요. 아이가 웃으며 어버이가 함께 웃고, 어버이가 함께 웃으며 아이가 나란히 웃습니다. 삶이란. 4346.8.3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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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8-30 09:51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전에 이 시집을 읽었는데 오늘 다시
함께살기님의 아름다운 느낌글과 만나 더욱 기쁘고 즐겁습니다.^^

저는 무화과 열매는 먹어봤는데, 무화과 나무는 본적이 없네요..
그런데 왜 이웃사람이 몰래 들어와 무화과 나무를 몽땅 베곤 할까요?
그래도 개구리노래~즐겁게 듣는 예쁜 어린이가 삶빛 환히 밝히는 어버이랑
날마다 웃으며 자라나니 참~좋습니다!

숲노래 2013-08-30 10:11   좋아요 0 | URL
우리 이웃들은
우리 몰래 '농약'도 뿌려 주는걸요 ㅋㅋ

에구... 슬픈 일입니다...

아무튼, 이 시집 느낌글 쓰려고
퍽 오래 삭혀서
오늘 아침에 솟아났습니다.

무화과나무... 도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어요.
나중에 사진을 올리면
아하, 이 나무였네 하고 알아보시리라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