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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ㅣ 창비시선 156
함민복 지음 / 창비 / 1996년 10월
평점 :
시와 골목꽃
[시를 말하는 시 34]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책이름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글 : 함민복
- 펴낸곳 : 창작과비평사 (1996.10.10.)
- 책값 : 8000원
골목동네에 골목꽃이 핍니다. 골목동네에서 피기에 골목꽃입니다. 자그마한 집이 촘촘하게 모인 골목동네인데 울타리 틈이나 계단 한쪽에 작은 씨앗 하나 뿌리를 내려 천천히 피어납니다. 누가 씨앗을 뿌리지 않았어도 들풀은 뿌리를 내리고 꽃송이를 피웁니다.
골목동네에는 햇볕이 골고루 드리웁니다. 아침과 낮과 저녁에 따라 그림자가 다릅니다. 어느 골목집에 볕이 더 많이 깃들지는 않습니다. 옥탑집이라면 하루 내내 볕이 들 테지만, 낮은 자리에 있는 골목집이라 하더라도 빨래를 말리고 기지개를 켜도록 햇살이 곱게 스며듭니다.
골목동네 사람들은 흙땅 없는 골목동네에 꽃밭이나 텃밭을 조그맣게 마련하려고 흙을 퍼서 나릅니다. 천천히 자리를 다지고, 조금씩 흙을 옮깁니다. 한 평조차 안 될 만한 꽃밭이나 텃밭을 알뜰히 가꿉니다. 푸성귀를 심고 나무를 심습니다. 꽃을 심고 사랑을 심습니다.
.. 나는 어머니 속에 두레박을 빠뜨렸다 / 눈알에 달우물을 파며 / 갈고리를 어머니 깊숙이 넣어 휘저었다 .. (세월 1)
나무 한 그루 그늘을 드리우기까지 제법 오래 걸립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크는 만큼 두고두고 지켜보면서 돌볼 때에 나무 한 그루 그늘을 맞이합니다. 나무 한 그루 열매를 맺기까지 퍽 오래 걸립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는 만큼 차근차근 바라보면서 보살필 적에 나무 한 그루 열매를 맺습니다.
공무원이 심지 않았고, 개발업자가 심지 않았으나, 골목동네에 여러 가지 나무가 자랍니다. 대추나무가 자라고, 감나무가 자랍니다. 석류나무가 자라고, 밤나무가 자랍니다. 탱자나무가 자라고, 무화과나무가 자라요.
골목동네 골목나무는 어느 골목사람이 언제 심어서 돌보았을까요. 이 골목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골목아이는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요. 이녁 어버이가 심어서 우람하게 자란 나무를 어떤 마음이 되어 바라볼까요. 골목동네를 재개발한다고 할 적에 이 나무를 어떻게 하려나요.
..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을 수 없다네 // 어머니 가슴에서 못을 뽑을 수도 없다네 .. (가을 하늘)
아파트에도 꽃밭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파트에는 텃밭이 없습니다. 아파트에도 나무가 자랍니다. 그러나, 아파트 나무는 관리인이 손질하거나 매만질 뿐,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 스스로 씨앗이나 어린나무를 심어 보살피지 못합니다.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에는 어떤 나무가 있을까요. 십 층 이십 층 삼십 층에 이르는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한테는 어떤 나무가 있을까요. 건물이 크고 주차장이 넓다지만, 정작 나무 한 그루 자랄 땅은 처음부터 안 마련하는 데가 많습니다. 예술작품이니 조형물이니 세우려고 돈을 꽤 많이 쓰지만, 정작 사람들이 흙을 밟고 풀내음을 맡으며 나무그늘 누릴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이는 곳은 아주 드뭅니다.
흙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풀이 베푸는 내음을 맡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무가 나누어 주는 이야기를 마주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 (눈물은 왜 짠가)
사람이 먹는 밥은 흙에서 비롯합니다. 사람이 입는 옷이나 사람이 지내는 집은 흙에서 비롯합니다. 흙이 있을 때에 밥과 옷과 집이 태어납니다. 흙이 있을 뿐 아니라, 흙이 튼튼하고 싱그러울 적에 사람살이가 즐겁고 아름답습니다.
흙이 튼튼하지 못하면 밥도 옷도 집도 후줄근합니다. 흙이 싱그럽지 못하면 밥도 옷도 집도 빛을 잃고 슬어 버립니다. 흙을 아끼면서 웃음이 피어나는 삶입니다. 흙을 보살피면서 노래가 샘솟는 삶입니다.
누군가는 골목꽃이 볼썽사납다며 밟거나 꺾습니다. 누군가는 골목꽃을 알뜰히 아끼면서 빙그레 웃는 낯으로 바라봅니다. 누군가는 골목꽃이 피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골목꽃 곁에 나란히 앉아 해바라기를 합니다.
사람이 따로 물이나 거름을 안 주어도 골목꽃이 핍니다. 햇볕과 빗물과 바람을 먹는 골목꽃은 씩씩하고 예쁘게 자랍니다. 조그마한 틈에서 돋아나 조그마한 씨를 다시 조그마한 틈에 내려놓습니다. 이듬해에 새로운 싹이 돋고 새로운 잎이 나며 새로운 꽃이 핍니다. 달개비도 봉숭아도 고들빼기도 골목길 한쪽 조그마한 틈에서 돋습니다. 민들레도 씀바귀도 냉이도 골목길 한켠 작디작은 틈에서 깨어납니다.
.. 살구골 저수지에 살구꽃 피지 않는다 / 물 흐려져 초등학생들 봄소풍 나오지 않고 / 낚시꾼들 휘두르는 카본대 끝에서 야광찌만 반딧불로 날아 // 살구골 사람들 // 살구골 저수지가 더 빨리 오염되길 바란다 / 살구골 저수지 오염되어 농업용수로 쓸 수 없어야 / 절대농지 풀리고 땅 팔려 / 도회지로 떠날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만 붉다 .. (살구골 저수지의 봄)
골목동네 빈터에 자동차 아닌 아이들이 있던 지난날, 골목꽃은 아이들과 함께 놀았습니다. 조그마한 동네 조그마한 빈터라 하더라도, 아이들은 풀내음과 꽃내음 먹고 자랐어요. 작은 집 모인 작은 동네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풀꽃하고 사귀면서 컸어요.
아이들도 때때로 ‘우리 집이 가난한갑다’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내 이런 생각을 잊습니다. 놀기에 바쁩니다. 놀면서 웃습니다. 놀면서 신이 나고, 노는 동안 까르르 웃음노래 웃음꽃 웃음잔치 벌어집니다.
어른들은 으레 ‘우리 집이 가난하구만’ 하고 생각합니다. 참말, 어른들은 이런 생각을 늘 품습니다. 그래도, 곧 이런 생각을 내려놓습니다. 즐겁게 밥을 짓습니다. 즐겁게 빨래를 합니다. 흐뭇한 눈길로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오순도순 이야기꽃 피웁니다.
골목 한쪽에서는 골목꽃이 피고, 골목집 한켠에서는 이야기꽃이 핍니다. 골목아이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골목동네 골골샅샅 사랑꽃이 핍니다.
.. 물을 길어 먹던 겸허한 세월은 가고 / 물을 끌어다가 먹는 시절이 와 / 저 강물에 빠지면 익사하기 전에 / 오염되어 죽을지도 모를 세월이지만 .. (한강 2)
함민복 님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작과비평사,1996)를 읽습니다. 함민복 님은 이 시집에서 ‘가난’을 노래했다고 합니다. 아프거나 슬프면서도, 싱긋 웃는 가난을 노래했다고 합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이 땅에 태어난 시 가운데 가난을 안 노래한 시가 있었나 궁금합니다. 이 땅에 태어난 시 가운데 ‘가난하지 않은 삶’, 곧 ‘돈이 넉넉한 삶’을 노래한 시가 있나 궁금합니다.
돈이 이렇게 있어 즐겁게 이웃한테 나누어 주었다네, 하고 노래하는 시가 있었을까요. 돈이 이렇게 많아 신나게 동무하고 나누며 살았다네, 하고 노래하는 시가 있었을까요. 돈이 자꾸자꾸 생겨 언제나 이리 나누고 저리 나누면서 아름답고 착하게 살았다네, 하고 노래하는 시가 있었을까요.
.. 저 작고 소꿉장난 같은 부엌이 / 나의 어머니다 / 따뜻한 눈물이다 .. (어떤 부엌)
‘가난’한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살림돈이 얼마쯤 되어야 가난하다 할 만할까요. ‘내가 가난하다’고 하면, 나보다 살림돈 더 있는 사람은 ‘안 가난한’ 사람이 될까요. 나보다 살림돈 더 없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안 가난하네’ 하고 말할 만할까요.
.. 숨찬 산중턱에 살고 있는 나보다 / 더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많아 / 아직 잠 못 이룬 사람들 많아 / 하수도 물소리 / 골목길 따라 흘러내린다 .. (달의 눈물)
이 땅에 태어난 아름다운 시를 돌아보면, 어느 시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이 땅에 샘솟는 사랑스러운 시를 살펴보면, 어느 시나 ‘사랑스러움’을 노래합니다.
참 그렇습니다. 푸른 물결 넘치는 시는, 그야말로 푸릅니다. 파랗고 깊으며 넓은 하늘이나 바다와 같은 시는, 그야말로 파랗습니다.
함민복 님은 ‘가난’을 노래했을까요? ‘웃음’을 노래했을까요? ‘삶’을 노래했을까요? ‘사랑’을 노래했을까요?
.. 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 (긍정적인 밥)
도시에서는 골목꽃입니다. 시골에서는 시골꽃입니다. 두멧자락이나 숲에서는 숲꽃입니다. 바다에서는 바다꽃이요, 너른 들에서는 들꽃입니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마음꽃이 있습니다. 우리들 생각이 환하게 빛나면 생각꽃입니다. 시 한 자락은 시꽃일 테고, 글 한 줄은 글꽃입니다. 잔잔하게 흐르며 따사로이 감도는 노래 한 가락은 노래꽃입니다. 애틋하며 고운 춤사위는 춤꽃입니다. 밥 한 그릇은 밥꽃입니다. 웃음꽃과 함께 눈물꽃입니다.
저마다 꽃입니다.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저마다 사랑스럽습니다.
시 한 줄로 쌀 몇 말 얻을 수 있다면 즐겁습니다. 씨앗 몇 톨 심어 쌀 몇 줌 얻을 수 있다면 즐겁습니다. 씨앗을 심어 아끼는 흙일꾼처럼 낱말 하나를 차곡차곡 마음에 심어 꿈을 지피고 사랑을 일구는 시인입니다. 도시에서 시를 노래하는 님들은 골목꽃입니다. 시골에서 시와 춤추는 님들은 시골꽃입니다. 4346.8.2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3/0827/pimg_705175124890817.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