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크레이터 The Crater 1 데츠카 오사무 걸작선
데즈카 오사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261

 


삶에는 핑계가 없다
― The crater 1
 데즈카 오사무 글·그림
 도영명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1.4.25. 9000원

 


  비가 오는 날은 하늘이 흐리고, 하늘이 흐리면서 여름에는 더위가 한풀 꺾입니다. 가을이나 봄에 비가 오면 날이 선선하고, 겨울에 비가 오면 날이 축축하면서 서늘합니다.


  비가 그친 여름날 하늘은 매우 파랗습니다. 비가 지나간 봄날과 가을날 하늘은 참 높습니다. 비가 스친 겨울날 하늘은 퍽 차가우면서도 맑습니다. 비가 내리며 들과 숲은 푸른 물결 한껏 짙으며, 하늘은 새롭게 싱그러운 빛을 뽐냅니다.


  오래 가문 끝에 내리는 비는 풀과 나무를 살찌웁니다. 가문 날 이어지다가 비가 내리면, 푸나무뿐 아니라 새와 벌레도 산뜻한 노래잔치 베풉니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목숨이 살아가는 바탕 가운데 하나가 비(물)로구나 하고 다시금 생각합니다. 햇볕이 드리우고 비가 찾아오며 바람이 흐를 적에 모든 숨결이 가장 맑으면서 빛납니다. 흙을 밟고 풀을 만지며 나무와 꽃을 바라볼 때에 모든 숨결이 가장 밝으면서 환합니다.


- “미안하다. 용서해 다오. 전쟁이었어. 어쩔 수가 없었다고! 원망하려면 전쟁을 원망해. 나는 그 후로 줄곧 뉘우치고 있단 말이다.” (21쪽)
- “이 자식, 왜 날 노려보는 거야. 마음에 안 드는 고양이라니까!” “치로도 너한테 질린 게지, 분명.” “웃기지 마요. 고양이가 인간의 말을 알 리가 있나. 이제 그만 좀 노려보면 안 되냐. 마음에 안 드는 고양이라니까.” (28쪽)

 


  삶은 누구나 스스로 빚습니다. 스스로 살아가려 하는 대로 삶을 빚습니다. 게으르면 게으른 대로, 바지런하면 바지런한 대로 삶을 빚습니다. 즐겁게 웃는 하루를 바라는 사람은 언제나 즐겁게 웃는 하루를 빚습니다.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를 꿈꾸는 사람은 언제나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를 빚습니다.


  맑은 물과 바람을 바라는 사람은 이녁 보금자리를 맑은 물과 바람이 감도는 자리에서 일굽니다. 어떤 뜻이 있어 정치판에 나선다든지,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된다든지, 공부를 한다든지, 이웃나라를 돌아다니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에서 살림을 도맡으면서 아이들을 보살피는 즐거움을 누리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가용을 장만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자전거를 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격증을 따서 어떤 일을 하려는 사람이 있고, 자격증은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하고픈 일을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삶을 즐기려는 사람한테는 요일이 없습니다. 삶을 즐기려는 사람한테는 철과 달과 날과 해가 있습니다. 삶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한테는 요일이나 달력은 있으나, 철과 달과 날과 해가 없습니다.


  곧, 삶을 즐기는데 월요일이나 토요일이란 대수롭지 않아요. 달력이란 아무것 아니에요. 삶을 즐기기에 봄에는 봄대로 가을에는 가을대로 즐겁습니다. 삶을 즐기는 만큼, 아침 낮 저녁과 새벽 밤 흐름을 모두 즐거이 받아들입니다. 삶을 즐기니 새로운 한 해가 새롭고, 새삼스레 지나간 한 해가 새삼스럽습니다. 더운 날이건 추운 날이건 따스한 날이건 시원한 날이건 그리 대단하지 않아요. 어떤 날 어떤 날씨라 하더라도 즐거운 삶은 똑같습니다.


- “네가 실험하고 있는 거 신형 독가스 맞지!” “아니야.” “그럼 세균병기야?” “아니야!” “어쨌든 베트남전쟁에 관계가 있는 약이라는 건 대강은 알고 있어. 이봐 너랑 나는, 친구 사이잖아. 내 충고를 들어. 당장 연구를 중단하라고. 지금 당장 말이야.” “그건 안 돼. 이미 완성을 바로 앞에 두고 있다고.” “완성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미군이 사용하는 건가.” “…….” “그리고 또 하나 충고해 두지. 혹시 극비라면 네가 그 녀석을 완성했을 때 미군의 정보부가, 너를 그대로 놔두지는 않을 거야.” (47쪽)
- “오카다 씨, 예의 그 약품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건 넘길 수 없습니다, 소위님.” “어째서? 명령이오.” “그건 무서운 약품입니다. 어떤 일에 쓴다고 해도 인류에는 죽음의 약입니다.” “적을 전멸시키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고르지 않는 거요. 이리 넘기시오.” “안 됩니다.” (58쪽)

 

 


  올봄에 한국으로 씩씩하게 찾아온 제비들이 큰 무리를 이루는 모습을 봅니다. 제비 무리는 머잖아 한국을 떠나 중국 강남으로 갑니다. 한국부터 중국 강남까지 얼마나 먼길인지 잘 모릅니다만, 태평양 바다를 가로지르는 길인 터라, 날아가면서 쉴 수 없어요. 아마, 날면서 잠을 잘 수도 없을 테지요. 한 번에 날아야 합니다. 한 번 날갯짓을 하고 나면 끝까지 날아야 합니다.


  제비 무리는 차근차근 힘을 모으고 날을 살피는구나 싶어요. 그동안 다 다른 시골집 처마에 깃들어 새끼들 낳아 보살피더니, 이제는 다 함께 모여 무리지어 날갯짓하며 어울리는구나 싶어요.


  제비가 이 나라를 떠나면, 여름은 훌쩍 지나가고 가을로 접어들어 새로운 겨울이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제비춤을 더 만날 수 없어 아쉽지만, 이듬해 봄에 다시 제비들 찾아오리라 생각하며 겨울을 반가이 맞이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제비가 이 나라를 떠난다면, 제비가 즐겨먹던 모기도 파리도 잠자리도 나비도 거의 사라졌다는 뜻이라고 느껴요.


  가만히 돌아봅니다. 살충제나 농약 따위 없던 지난날, 제비와 박쥐와 개구리가 모기나 파리나 잠자리나 나비나 나방을 신나게 잡아먹었습니다. 살충제와 농약을 잔뜩 쓰면서 어느새 제비와 박쥐와 개구리가 자취를 감춥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더 살충제와 농약을 써서 모기나 파리나 나방을 쫓아내려 합니다. 그렇지만, 모기나 파리나 나방을 살충제와 농약에 잘 살아남습니다. 살충제와 농약에 죽는 목숨은 제비와 박쥐와 개구리입니다. 거미도 죽고 사마귀도 죽습니다. 맹꽁이도 두꺼비도 살충제와 농약에 곧바로 목숨을 잃습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즐거운 마음’이 되어 살충제와 농약을 뿌리는지 궁금합니다. 이녁 삶을 즐겁게 살찌우거나 가꿀 수 있기에 살충제와 농약을 뿌리는가요. 이녁 삶을 아름답게 북돋우거나 보살필 만하기에 공장과 발전소를 잔뜩 짓는가요. 오늘날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이 될 수 있어 한두 살짜리 아이들을 보육원에 집어넣고, 이 아이들이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영어를 배우게 내몰며, 초등학교에 들자마자 대학입시 수렁에 빠지도록 들볶을까요.


- “칸타로! 머리는 괜찮아? 저 녀석들, 우주에서 온 괴물들이었다고!” “하지만 신사적이었어.” “그래, 감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어쨌든, 네 머리를 고쳐 주었으니까 말이야!” (127∼128쪽)
- “아티. 그런 기품 없는 말은 쓰지 말거라. 두 번 다시 쓰지 마.” “그렇지만 류도 쓰는걸요.” “류 말이냐. 그 녀석은 불량아야. 그런 건달 녀석과 어울리면 안 돼.” “그렇지만 친구인걸.” (164쪽)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 《The crater》(학산문화사,2011) 첫째 권을 읽습니다. 사람들이 꾸리는 삶을 만화로 담아 보여주는 데즈카 오사무 님은 《The crater》라는 이름을 붙여 ‘분화구’ 또는 ‘폭탄이 떨어져 생긴 큰 구멍’으로 빗댈 만한 사람들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막힌 길이란 무엇일까요. 터져나오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폭탄은 누가 만드는가요. 폭탄은 왜 떨어져야 하고, 폭탄이 떨어지면 누가 다치는가요. 예부터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했는데, 가는 말이 안 고우면서 오는 말이 곱기를 바라는 우리들 모습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살충제와 농약을 쓰면 살충제와 농약은 도로 우리한테 찾아옵니다. 우리 몸에 깊숙이 차곡차곡 쌓여요. 요즈음 과자나 라면에는 ‘엠에스지’를 안 넣는다고 겉봉지에 밝히지만, 얼마 앞서까지 모두 다 ‘엠에스지’를 썼어요. 몸에 나쁜 줄 생각하지 않으면서 가공식품이 쏟아졌고, 지난날 어른들은 가공식품을 아이들한테 잔뜩 먹였어요. 시골사람은 도시로 내다파는 먹을거리에 농약을 잔뜩 썼고, 이웃나라에서 들여오는 먹을거리는 방부제를 뒤집어쓰고 들어와요. 이러니, 아이들 몸에 나쁜 것이 자꾸자꾸 쌓여, 이제 오늘날 아이들은 모두 몸이 많이 아프고, 마음이 많이 힘들어요. 어른들은 아이들이 아프면 병원에 갈 뿐, 가공식품을 끊거나 대학입시지옥을 걷어낼 생각은 하지 않아요. 아이들이 뛰놀 터가 없는데, 아이들이 뛰놀 터를 마련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한두 평 빈터만 있어도 놀이터로 삼지만, 어른들은 한두 평 빈터만 있으면 자동차 대기에 바빠요.


- “뭔가 남길 말은 없는가? 없겠지?” “전 죽는 건 싫어요! 전 좀더 살고 싶어요. 신의 곁 따윈 가고 싶지 않아요!” (133쪽)
- “행복이란 건 시간과는 관계가 없는 거야. 단 한 순간의 행복을 붙잡기 위해 몇 십 년이나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어. 행복이란 건 대체 뭘까?” “내 생각에는, 죽을 때가 되어서야, 그걸 처음 깨달을 것 같아요.” (153쪽)

 


  아이들한테 핑계를 대는 어른이라면 ‘어른’도 아니지만 ‘사람’도 아니고 ‘숨결’도 아니라고 느껴요. 아이들한테 사랑을 보여주고 꿈을 보여줄 어른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사랑을 일구고 꿈을 지을 어른입니다. 누구보다 스스로 사랑을 일굴 어른으로 살아가면서 즐겁게 웃어야지요. 바로 나 스스로 꿈을 짓는 어른으로 살아가면서 기쁘게 노래해야지요.


  아이들한테 한 살 두 살 세 살 나이는 꼭 한 번뿐입니다. 아이들한테 네 살 다섯 살 여섯 살 나이는 참말 한 번뿐입니다. 어른들한테도 스물다섯 서른 서른다섯 살 나이는 꼭 한 번뿐이에요. 어른들한테도 마흔 마흔다섯 쉰 나이는 참말 한 번뿐입니다.


  한 번 누리면서 지나가는 한 해를 어떻게 살아갈 때에 아름다울까요. 한 번 보내며 지나가는 오늘을 어떻게 빛낼 때에 즐거울까요. 오늘 하루가 아름다울 때에 어제 하루도 아름답습니다. 오늘 하루가 빛날 때에 모레와 글피도 빛납니다. 4346.8.2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만화책 즐겨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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