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사과 꽃이 피었다
황인숙 지음 / 문학세계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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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50

 


비가 오면 빗소리를
― 꽃사과 꽃이 피었다
 황인숙 글
 문학세계사 펴냄
 2013.7.29./1만 원

 


  아침에 평상에 엎드려 편지 보낼 봉투에 주소를 한창 적는데, 큰아이가 마당 한켠 커다란 고무통 물을 갈아 달라 말합니다. 날이 더워 물놀이를 하고 싶답니다. 한창 바삐 봉투에 주소를 적다가, 주소 적기를 그만둡니다. 밀솔로 고무통 바닥을 닦고, 물을 새로 받아 작은 솔을 오른손에 쥐고는 바닥을 샅샅이 밀고 닦습니다.


  작은아이는 고무통 물놀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큰아이만 혼자 고무통 물놀이를 좋아합니다. 큰아이가 물놀이를 하는 동안 큰아이가 벗은 땀에 젖은 치마를 빨래합니다.


  한참 물놀이를 즐긴 큰아이는 고무통 물놀이를 하며 적신 옷을 조금 짜서 아버지한테 내밉니다. 땀과 물이 어우러진 다른 치마와 속옷을 새롭게 빨래합니다. 이동안 작은아이는 바지에 똥을 질펀하게 눕니다. 작은아이 밑을 씻기고 똥을 치운 뒤 새 바지를 입힙니다.


.. 매일매일 내 창엔 고운 햇님이 / 하나씩 뜨고 지죠 ..  (잠자는 숲)


  한낮에 비가 한 줄기 듣습니다. 처음에는 시원하게 마당과 지붕과 들을 적시더니, 이윽고 한쪽은 해가 나고 한쪽은 비가 내립니다. 머잖아 비는 말끔히 갭니다. 마당과 지붕과 들을 후끈후끈 내리쬡니다. 비오는 동안 살짝 시원해지는가 싶던 날은 비가 멎으면서 한결 후끈후끈 달아오릅니다. 그래도 풀과 나무는 한 차례 싱그러운 빗물 마셨을 테지요.


.. 그 모르게 살짝 외출을 다녀올 때 / 빈 방안을 하염없이 지켜보는 / 그의 등을 보는 것이 / 즐겁다 ..  (로망스)


  비가 그친 뒤, 마을 큰길에서 공사판 벌어집니다. 마을사람 모두들 멧골짝부터 흘러내리는 물을 집집마다 한 줄기씩 이어 오래도록 잘 쓰는데, 생뚱맞다 싶은 상수도 공사를 벌입니다. 군 행정과 도 행정은 이 깊은 시골마을 집집마다 수도물 이어야 문화요 복지인 듯 내세웁니다. 마을마다 일흔 훌쩍 넘은 늙은 할매와 할배뿐인데, 이 마을에 새로 깃들려 하는 젊은 사람이나 식구 없는데, 온 마을에 상수도 공사를 해서 수도물 잇는들 누가 얼마나 쓸 수 있을까 아리송합니다.


  설마, 논이나 밭에 대는 물을 수도물로 쓰라는 뜻은 아닐 테지요. 시골물 마시며 시골사람 몸과 마음 오래오래 시원하며 튼튼히 이었는데, 저기 전라도 어디메쯤 주암댐 세우며 사라진 시골마을 둥둥 뜨는 댐물을 예까지 이어서 마시라고 다그치려는 셈인지요.


  아이들 낮잠을 재워야 하는데 시끄럽게 길바닥 깨는 쿵쿵 소리 집 안팎을 울립니다. 저 상수도 공사는 오늘 하루 하는 공사가 아니라 지난해부터 하는 공사입니다. 길바닥 조금 파는가 싶으면서 이도저도 못 가게 길을 막으며 이레쯤 공사하다가 한 달쯤 조용하고, 그러다가 이레쯤 또 시끄럽게 공사하며 온 길 다 막으며 수선스럽다가 다시 두 달쯤 조용하고, 이러더니 또 공사를 하다가 쉬고, 또 공사를 하다가 쉬고.


.. 아아 남자들은 모르리 / 벌판을 뒤흔드는 / 저 바람 속에 뛰어들면 / 가슴 위까지 치솟아오르네 / 스커트자락의 상쾌! ..  (바람 부는 날이면)


  마을 이웃들은 논이며 밭이며 농약을 듬뿍듬뿍 뿌립니다. 시골이지만 논이나 밭에 잠자리가 얼마 없습니다. 잠자리가 얼마 없으니 파리와 모기가 들끓고, 파리와 모기를 잡는다며 마을 이웃들은 무척 고약한 모기약을 잔뜩잔뜩 뿌립니다.


  우리 집은 농약도 모기약도 뿌리지 않습니다. 우리 집 둘레로 파리나 모기가 모이기도 하면서, 거미와 잠자리도 모입니다. 모기가 제법 나오는 풀밭 언저리에 마을 잠자리 스물 서른 남짓 날아다닙니다. 그래, 너희 먹이가 우리 집에 많은갑다. 우리 집에서 모기 실컷 잡아먹으렴. 우리 집 풀밭에는 풀개구리도 여럿 있어 모기를 신나게 잡아먹지만, 풀개구리가 다 잡아먹지 못할 만큼 많으니, 너희가 우리 집에서 살면 아주 즐거우면서 근심 하나도 없으리라.


.. 자정 지나 남산, / 숲의 냄새, 냄새의 숲에 / 깊이 빠졌다 ..  (자정 지나 남산)


  잠자리는 모기를 마음껏 잡아먹다가 가끔 거미줄에 걸립니다. 거미는 통통하게 살이 오릅니다. 처음에는 새끼손톱보다 훨씬 작더니, 이제 첫째손가락 마디보다 굵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마루문과 빨래줄 사이로 커다랗게 거미줄을 칩니다.


  얘들아, 너희도 집을 지으며 살아야 할 테지만, 여기에 치면 우리 식구 못 드나들잖니. 너희는 너희대로 살 만한 데에 집을 짓고, 우리는 우리대로 살 만한 자리는 내어주렴.


  마당이나 뒷밭이나 옆땅 어디에도 농약을 안 치는 우리 집이라, 고작 백예순 평 즈음 되는 조그마한 집과 집터이지만, 사마귀도 방아깨비도 메뚜기도 방울벌레도 골고루 깃듭니다. 저녁에 아이들 재울 즈음 풀벌레 노래 가짓수를 헤아리면 열 몇 가지쯤 되는 듯싶습니다.


.. 아버지, 그 집에 / 문이 두 개 있었다면 / 얼마나 좋았을까요? / 당신의 문은 여닫힐 때 / 너무도 완강한 소리를 냈어요. / 섣불리 바스락거릴 수 있는 건 / 나무들뿐인 것 같았어요. / 방안에 누워 나는 / 참 많은 문을 냈었지요 ..  (두 개의 문)


  큰아이 태어난 도시에서는 살뜰한 풀벌레 노랫소리를 들려주지 못했습니다. 작은아이 낳은 멧골자락에서야 비로소 알뜰한 도랑물 노랫소리를 들려줄 수 있었습니다. 옆지기가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도시를 떠날 생각 안 했을는지 모릅니다. 옆지기도 나도 몸이 그리 안 아픈 사람이었으면, 서로서로 시골에서 새 삶자리 찾아 새 하루 일구는 즐거움 찾아나서는 길로 안 접어들었을는지 모릅니다.


  도시에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냥저냥 사람들로 북적거리기도 하고, 아름다운 빛 찾으려는 사람도 많으며, 슬기롭거나 빼어난 생각으로 훌륭한 일 이끄는 사람도 많습니다. 아기자기한 가게 많고, 재미나며 반가운 이웃 많다 할 도시요, 오늘날 시골에서는 거의 사라지는 두레모임이 있는 곳 있고, 도시 곳곳에는 생협 모임이 또아리를 틉니다.


  시골에는 이제 두레가 없다 할 테고, 시골에서 생협 모임 꾸리려는 사람도 드뭅니다. 워낙 사람 숫자가 적으니 두레도 생협도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시골사람은 스스로 흙을 일구어 밥을 얻는다 하지만, 시골사람 흙일은 농약과 비닐과 항생제와 쓰레기를 해마다 엄청나게 쏟아내는 돈벌기로 기울어집니다. 흙을 북돋우면서 밥을 얻으려는 흐름이 좀처럼 살아나지 못합니다. 아직도 시골마을에는 독재정권 새마을운동 깃발이 펄럭입니다.


.. 땅바닥이 뛴다, 나무가 뛴다, / 햇빛이 뛴다, 버스가 뛴다, 바람이 뛴다. / 창문이 뛴다, 비둘기가 뛴다. / 머리가 뛴다. // 잎 진 나뭇가지 사이 / 하늘의 환한 / 맨몸이 뛴다. / 허파가 뛴다 ..  (조깅)


  자동차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서는 자동차 소리를 듣습니다. 사람들 북적거리는 데에서는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집안으로 울립니다. 가게가 많은 데에서는 가게마다 틀어 놓는 기계 소리가 퍼지고, 공장 둘레에서는 공장 움직이는 소리가 우렁차지요.


  나무로 숲을 이룬 둘레에 보금자리 있으면, 숲에서 숲노래와 숲내음과 숲빛을 가만히 나누어 줍니다. 숲에 깃드는 여러 새들과 짐승들과 벌레들이 얼크러지며 이루는 무늬와 소리가 나란히 흘러나옵니다.


  나무가 자라고 풀밭이 있어야 나비가 깨어납니다. 나뭇잎이 푸르고 풀잎이 싱그러울 때에 애벌레 즐겁게 먹을 풀잎 있을 테며, 나비로 깨어날 때에 먹을 꽃가루와 꿀이 나오겠지요.


  사람들이 새롭게 맛보려고 먹는 꿀이 아니에요. 곰도 먹고 벌과 나비와 개미도 함께 먹는 꿀을 사람도 조금 나누어 먹을 뿐입니다. 사람들만 베어서 쓰는 나무가 아니에요. 집을 짓거나 옷장이나 책꽂이를 짜거나 책을 만들거나 종이를 얻거나 연필이나 붓을 만들거나 이것저것 하느라 베어서 사람들만 쓸 나무가 아니라, 새도 보금자리를 얻고 짐승들도 쉴 터를 누리며, 온갖 목숨들이 서로서로 어우러질 숲에서 자라는 나무입니다.


.. 요번 추위만 끝나면 / 창문을 떼어놓고 살 테다 ..  (추운 봄날)


  황인숙 님 시집 《꽃사과 꽃이 피었다》(문학세계사,2013)를 읽습니다. ‘사과꽃’이나 ‘능금꽃’ 아닌 ‘꽃사과 꽃’이로군요. 꽃을 피우는 꽃사과는 어떤 씨앗에서 비롯한 나무일까요. 스스로 씨앗을 떨구어 숲에서 씩씩하게 자라는 나무일까요. 아니면, 사람들이 따로 뭔가를 건드려 꽃만 소담스레 누리려 하는 나무일까요.


  꽃사과는 이 나라에 어느 만큼 자랄까요. 이 나라 도시나 시골에는 꽃사과가 얼마나 싱그러이 뿌리를 내리면서 자랄까요. 꽃사과에서 꽃이 필 무렵 마음 깊이 하얀 웃음을 터뜨리면서 맑은 목청으로 노래를 부르는 이웃은 얼마나 있을까요.


.. 새의 노랫소리를 듣고 / 나무는 울창해진다 ..  (소풍)


  비가 오니 빗소리를 듣습니다. 빗소리를 들으며 비와 나는 한몸이 됩니다. 개구리가 노래하니 개구리노래를 듣습니다. 개구리노래를 들으며 개구리와 나는 한몸이 됩니다. 멧새가 지저귈 때에는 멧새 이야기를 들으면서 멧새와 내가 한몸이 됩니다. 낫을 들어 풀을 베든, 어른 키만큼 자란 풀숲을 헤치며 거닐든, 풀과 마주하노라면 풀과 나는 한몸이 돼요.


  자전거를 몰면 자전거와 한몸이 됩니다. 자가용을 몰면 자가용과 한몸이 됩니다. 버스를 탈 적에는 버스와 한몸이 될 테지요. 도시에서는 도시와 내가 한몸이 되고, 시골에서는 시골과 내가 한몸이 됩니다.


  바다에 서 보셔요. 바다와 내가 한몸이 돼요. 숲에 들어가 보셔요. 숲과 내가 한몸 되지요. 농약을 치려 하면 농약과 내가 한몸이 되고, 밥을 지으려 하면 밥과 내가 한몸이 돼요.


..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 비! ..  (말의 힘)


  스스로 되고 싶은 대로 되는 삶입니다. 즐거움을 이끌어 내는 낱말을 떠올려 보셔요. 참말 즐겁습니다. 걱정을 끌어당기는 낱말을 떠올려 보셔요. 참말 걱정스럽지요. 노래가 태어나는 낱말을 떠올려 보셔요. 저절로 노래가 샘솟아요. 사랑이 피어나는 낱말을 떠올리면, 나는 스스로 사랑이 돼요. 꿈이 자라는 낱말을 떠올리면, 나는 스스로 꿈이 돼요.


  시인 황인숙 님은 틀림없이 고양이로 다시 태어나리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황인숙 님은 스스로 고양이로 다시 태어나겠노라 하고 읊은데다가 싯말로 똑똑히 아로새겼거든요.


.. 비가 온다. / 네게 말할 게 생겨서 기뻐. / 비가 온다구! // 나는 비가 되었어요. / 나는 빗방울이 되었어요. / 난 날개 달린 빗방울이 되었어요 ..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도시에서 살아야 어떤 일을 할 수 있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살아야 어떤 즐거움이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살든 스스로 바라는 꿈과 사랑을 생각할 노릇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 스스로 나아가려는 길을 찾고 돌아보면서 가꿀 노릇입니다.


  도시에서도 무지개와 미리내를 바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시골에서 출판사를 차리거나 찻집을 열면 됩니다. 도시에서라고 별을 못 본다고 여기면 참말 별을 못 봐요. 시골에서라도 카페를 열겠다고 다짐하면 시골카페 알뜰살뜰 꾸릴 수 있습니다.


  생각대로 삶이 흐르고, 삶대로 사랑이 태어납니다. 생각대로 이야기가 감돌며, 이야기대로 꿈이 자라납니다.


  나는 오늘 빗소리를 생각했고, 풀벌레 노랫소리를 생각했습니다. 아이들 웃음과 옆지기 사랑을 가만히 되새깁니다. 그리고 내가 씩씩하게 걸어갈 길에 어떤 숨결 푸르게 넘실거릴 때에 아름다울까 하고 조용히 곱씹습니다. 4346.8.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시집 읽기)

 

appletreeje 님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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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8-06 16:40   좋아요 0 | URL
신문 혼자만 보내기가 내내 섭섭해서, 신문 따라 작은 제 마음 하나 보냈는데
즐겁게 읽으셨다니...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숲노래 2013-08-06 17:16   좋아요 0 | URL
차근차근 여러 시집 두루두루 기쁘게 누릴 수 있으니 고맙습니다~ ^^

아이들 사탕노래 때문에 하루하루 고단하지만
뭐... 곧 다 팔려서 이제는 노래 못 부르겠지요~